콘솔게임의 역사 (18) 워너와 아타리의 갈등

2014. 3. 6. 01:31콘솔게임의 역사


    :: 1977년 아타리는 차세대 콘솔인 VCS(VIDEO COMPUTER SYSTEM)을 출시한다. 오늘날 게임 업계에 전설로 알려져 있는 것과는 상반되게, 출시 직후 워너 커뮤니케이션의 경영 개입으로 아타리와의 관계가 악화된다. 결국 창업자 놀란 부쉬넬은 이듬해에 대표 자리에서 사퇴하게 이른다. (사진은 1980년에 출시된 4개 스위치 모델인 CX-2600A의 지면 광고) ::

    (지난 시간에 이어서)

    1977 : 250,000 Units

    숫자로 보는 아타리의 차세대 콘솔 VCS(VIDEO COMPUTER SYSTEM)의 출시 1년차의 판매량은 처참했습니다. 1억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개발 비용이 투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퐁(Pong)이 출시되던 시절의 폭발적인 반응을 기대했던 워너 커뮤니케이션과 아타리로서는 시장의 냉혹한 반응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경쟁사인 페어차일드의 채널 F[각주:1]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00 후반대의 비싼 가격도 그렇지만, 그당시 이미 1세대 Pong(퐁)류의 카피캣 게임들이 헐값에 팔리고 있던 시기라 아직 시장은 비싼 금액을 들이면서 2세대를 구입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초창기에 출시된 9가지 게임들이 기존의 Pong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주 원인입니다.

    VCS 출시 이후 워너와 아타리 사이에 골이 깊어져 갑니다. VCS의 판매 성적도 나빴지만 거기에 아케이드, 핀볼, 휴대용 게임기 등 다른 사업부까지 예상보다 좋은 실적을 얻지 못하게 되는데요, 결국 워너의 경영 개입까지 더해져 아타리는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시작합니다.


    :: 1977년 아타리 VCS의 TV광고 ::


    :: 아타리는 지난 Pong 시절과 마찬가지로 Sears사와 OEM 계약을 맺어
    Sears Tele-Games 이름으로도 함께 출시한다. ::

    계속되는 아타리와 워너 커뮤니케이션의 갈등

    출시 후 이듬해인 1978년까지 계속되는 판매 부진은 아타리와 워너 케뮤니케이션의 경영진들 사이에 불화를 가중시켰습니다. 빨리 투자 금액을 회수하길 원하던 워너로부터 경영 개입이 깊어집니다. 사실, 워너의 아타리 인수 이후 놀란 부쉬넬과 워너의 관계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경영 효율과 성과 중심의 관료적인 워너와는 대조적으로 연구개발에 집중하는 아타리의 엔지니어 중심 경영 방침이 늘 충돌했는데요. 당시 워너의 부사장이던 Manny Gerard도 처음에 아타리의 연구개발에 집중하는 모습에 긍정적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불만을 토로하게 됩니다.

    "아타리의 경영 전략에는 판매도, 광고도, 마케팅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연구개발(R&D)뿐이었죠."[각주:2] - Manny Gerard

    그의 말처럼 아타리의 연구개발 중심의 경영 방침은 과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당시 아타리 개발자 들에게 업무 환경은 '천국'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하나의 게임을 개발하는데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완성될 때까지 개입하지 않고 개발자가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하니 대기업 워너 입장에서는 이런 부분 하나 하나 '비 효율'로 보였던 것이죠.

    거기다 놀란 부쉬넬은 VCS를 출시하자마자 차세대 게임 개발을 동시에 시작해야 한다고 워너의 경영자들에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기존의 레코드 음악 사업의 마인드로 비디오 게임 비즈니스에 접근하던 워너로서는 VCS는 업그레이드 없이 계속 생산해서 단가를 낮추고, 게임 소프트만 만들어서 팔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엔 VCS의 첫 해 판매량이 부진한 것도 한 몫 했습니다.

    "VCS가 출시될 당시, 저는 곧바로 차세대 게임기를 위한 연구 개발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당시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고 우리는 나날이 발전하는 하드웨어에 맞춰 더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너의 경영진은 이 제안을 끔찍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45rpm 레코드(LP) 기계처럼 한 번 만들어두면 오랫동안 비즈니스를 유지할 수 있는 사업이었습니다. 비디오 게임은 이런 레코드 음반 산업과는 다르기 때문에 2~3년 이내로 새로운 하드웨어를 출시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워너의 향후 결정사항에 차세대 게임기 개발은 없었습니다. 훗날 아타리가 붕괴하는 1982년 말까지 말이죠."[각주:3] - 놀란 부쉬넬

    이런 식으로 놀란 부쉬넬과의 경영 방침에 마찰이 있던 와중에 Manny Gerard는 1978년 초, 섬유 업계에 몸 담던 Ray Kassar (Raymond Edward Kassar)를 아타리의 소비자 사업부로 영입해 아타리의 경영에 참여시킵니다. 엔지니어링 밖에 모르던 아타리에 전문 경영자가 투입된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아타리에 오기 전까지 게임에 대해선 문외한이었습니다. 당연히 엔지니어 중심의 아타리에 융화되기 쉽지 않았습니다.

    :: 놀란 부쉬넬에 이어 아타리의 두 번째 CEO가 되는 Ray Kassar. 그는 아타리에 오기 직전에 게임 산업과 관계 없는 섬유 업계에 있었다. 취임 후 엔지니어 위주의 아타리 사업부들을 뒤집어 놓았고 개발자들에게 양말왕(Sock King), 수건황제(towel czez)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그 역시 아타리 개발자들을 까칠한 프리마돈나(high-strung prima donnas)라고 인터뷰 상에서 언급할 정도로 아타리 직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

    창업자 놀란 부쉬넬의 퇴사

    앞서 말씀 드렸듯이 1978년, 아타리는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전년도 VCS 출시 후 판매 실적이 부진했고, 창고에는 4,000만달러에 이르는 게임기 재고가 쌓여있었습니다. 놀란 부쉬넬은 올해도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좋은 판매량을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워너는 새로운 경영자 Ray Kassar의 마케팅 계획이 좋은 성과를 얻을 거라 확신했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작합니다.

    결국, 놀란 부쉬넬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그 시기에 출시된 스페이스 인베이더(Spcae Invaders)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 입어 게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거기에 Ray Kassar의 공격적인 TV 광고가 더해져 크리스마스 시즌 판매 호조를 이룹니다. 이런 아타리의 활약[각주:4]으로 1978-1979 년도 워너의 소비자 사업부는 2억달러의 영업 이익을 달성하게 됩니다.


    :: 1978년 아타리 VCS의 TV광고 ::

    놀란 부쉬넬은 워너의 아타리 인수 이후 첫 성과를 인정 받았고, 워너로부터 계속해서 아타리의 게임 사업부의 수장 자리를 이어가길 바랐지만 계속되는 경영 갈등으로 인해 사실상 회사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났다고 꺠닫습니다. 결국 1978년, 그는 비슷한 시기에 개업한 복합 문화 센터인 Chuck E. Cheese's Pizza Time Theatre가 향후 7년간 아타리와 경쟁 사업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아타리 대표 자리를 내려놓습니다. 이렇게 최초의 비디오 게임회사는 엔지니어 창업자와의 이별을 고하고,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아타리를 구원한 Ray Kassar 체재로 돌입합니다.

    :: 놀란 부쉬넬이 창업한 Chuck E. Cheese's는 월트 디즈니의 놀이동산에 영감을 받아 피자를 먹으면서 게임과 여러 놀이 문화를 함께 즐기는 복합 공간을 만들었다. 생일 파티의 1등 장소가 될만큼 오늘날까지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아타리의 신임 수장, Sock King(양말 왕)[각주:5] Ray Kassar

    아타리의 대표가 바뀌자마자 가장 먼저 조직 개편이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CEO는 그간 아타리가 불필요한 프로젝트가 너무나 많다고 느꼈습니다.[각주:6] 무엇보다 아타리의 핵심이었떤 R&D부서들을 없애거나 대폭 축소하게 되는데요, 그의 경영 방침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지금의 아타리는 이미 출시된 VCS가 당장 잘 팔리는데 집중해야지, 과도한 연구 개발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타리는 엔지니어의 천국이던 회사 업무 분위기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요, 금요일 파티를 폐지하고 드레스 코드를 재정하고 업무 시간을 엄격하게 정하고 회사 건물에 보안 설비와 담당자를 배치하는 등 점점 관료적인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이런 분위기만 봐서는 서서히 암운이 다가올 것 같은 아타리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부터 몇 년 간은 전례 없는 황금기를 맞이하게게 되는데요,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아케이드 게임을 이식하면서 비디오 게임 업계에 써드파티(Third-Party) 시대를 맞이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http://en.wikipedia.org/wiki/Atari_2600
    http://en.wikipedia.org/wiki/Atari_2600_hardware
    http://www.gamasutra.com/view/feature/132160/atari_the_golden_years__a_.php
    http://www.gamasutra.com/view/feature/6364/the_replay_interviews_ray_kassar.php


    1. 재밌는 사실은, 두 경쟁 게임기 모두 1977년 판매량이 25만대였다. http://goo.gl/CwSPRj [본문으로]
    2. Zap: The Rise And Fall Of Atari By Scott Cohen. [본문으로]
    3. [Gamasutra] Atari: The Golden Years -- A History, 1978-1981 [본문으로]
    4. 1978년 아타리 VCS는 55만대의 판매량을 달성한다. 이는 전년도 25만대의 2배가 넘는 수치이다. [본문으로]
    5. 그가 아타리에 오기 전에 섬유 업계에 종사하던 이유로, 아타리 직원들의 비하가 담긴 별명이었다. [본문으로]
    6. 그는 처음 아타리에 입사할 당시 연구개발 중심의 회사 경영상태를 보고 재앙(Disaster)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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