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후드] '비긴즈'라는 제목을 뒤에 붙였어야 했다.
2010. 5. 26. 17:57ㆍcinema
ⓒ Universal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대략 초등학교 2~3학년 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청춘스타였던 케빈 코스트너의 로빈훗은 어린 시절 제게 있어 '로망' 그 자체였습니다. 노팅엄의 악덕 영주와 부패한 관리들과 맞서 백성들을 위해 싸우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의적'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랬기 때문에 리들리 스콧 감독과 러셀 크로우가 로빈 후드를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어라. 이 감독과 배우의 조합은 액션물 보다는 에픽한 전쟁물이 어울릴텐데...'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5년 주기로 출시된 대작 글레디에이터와 킹덤 오브 헤븐을 상기해보니 설마 로빈후드를 기존의 두 영화처럼 만들리 있을까 싶었지만, 리들리 스콧과 러셀 크로우는 로빈후드에 대한 제 추억을 과감하게 깨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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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후드가 아니라 사실상 '로빈후드 비긴즈'
리들리 스콧은 기존의 로빈후드가 다루지 못했던 앞 이야기를 심도 깊게 다루는 것을 시도하게 됩니다. 즉, 로빈후드를 재해석한 것이죠. 귀족 신분이던(이 부분도 조금 설정이 바꼈지만) 로빈 롱스트라이드가 어떤 계기와 과정으로 '로빈후드'가 되는지 2시간20분동안 길게 풀어낸 프리퀄 형태를 선택했습니다. 사실상 로빈후드 비긴즈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배트맨 비긴즈로 재해석했듯이, 그리고 3편으로 끝날 줄 알았던 엑스맨이 '울버린의 탄생'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프리퀄로 회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저 같이 기존의 로빈후드 리메이크 정도로 기대했던 분이라면 조금 어안이 벙벙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반부터 사자왕 리처드의 십자군 원정부대의 숨 막히는 공성전이 펼쳐지는가 하면, 슬슬 기대하던 로빈후드의 이야기가 시작할 것 같은데 끝이 나버리니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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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것 만큼은 보여준다.
아무래도 리들리 스콧의 로빈후드는 시점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야기 흐름상 너무 평면적이고 진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이 보여줄 수 있던 무난한 연출과 화려한 전쟁신이 이를 커버해주고 있기 때문에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도 물 흐르듯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숨막히는 전쟁신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CG 사용을 줄이고 최대한 인물들을 많이 동원한 점은 글레디에이터나 킹덤 오브 헤븐과 비슷합니다. 또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답게 무난한 연출과 재미는 선사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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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념같이 들릴 지는 몰라도 프리퀄 형태를 선택한 탓에 멋진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도 다음 편으로 미뤄야만 했고, 다소 정치적인 로빈후드도 이질감이 느껴진데다, 마리안이 유부녀라는 설정(...)도 그닥 맘에 들지 않았지만 이를 상쇄시켜준 러셀 크로우의 보증된 연기가 일품이었고 연출과 어울러지는 음악이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극중에 로버트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 흐르는 음악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주는 <전설은 이렇게 시작된다>라는 멘트와 함께 영화가 종료되는 만큼 기존의 로빈후드를 기대했던 분들은 뒤가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겠지만, 기존의 로빈후드를 답습하지 않고 재해석 하려고 노력했고 리들리 스콧이기에 보여줄 수 있던 연출과 스펙터클한 규모는 헐리우드 영화로서 손색이 없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영화가 후속편으로 이어져야 이번 전작이 더욱 빛날 수 있겠지만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