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솔게임의 역사에 해당하는 글 21

  1. 2014.03.27 콘솔게임의 역사 (20) 스페이스 인베이더
  2. 2014.03.21 콘솔게임의 역사 (19) 타이토(TAITO)
  3. 2014.03.06 콘솔게임의 역사 (18) 워너와 아타리의 갈등 (1)
  4. 2014.02.27 콘솔게임의 역사 (17) 프로젝트 스텔라(STELLA)
  5. 2012.12.18 콘솔게임의 역사 (16) 아타리의 도전, 2세대 콘솔
  6. 2012.07.04 콘솔게임의 역사 (15) 2세대 시작, 페어차일드 채널 F (Fairchild Channel F) (1)
  7. 2012.06.28 콘솔게임의 역사 (14) 닌텐도 최초의 게임기, Color TV Game (5)
  8. 2012.06.26 콘솔게임의 역사 (13) 완구회사 닌텐도 (1)
  9. 2012.05.21 콘솔게임의 역사 (12) 닌텐도의 정체성 (5)
  10. 2012.04.13 콘솔게임의 역사 (11) 닌텐도의 탄생 (Nintendo) (4)
  11. 2012.04.03 콘솔게임의 역사 (10) LCD 액정을 입은 휴대용 게임기들 (2)
  12. 2012.03.28 콘솔게임의 역사 (9) 휴대용 게임기의 출현
  13. 2011.12.26 콘솔게임의 역사 (8) 가죽 공구사에서 전자게임 회사로, 콜레코 텔스타 (Coleco Telstar) (2)
  14. 2011.04.11 콘솔게임의 역사 (7) 퐁(PONG) (8)
  15. 2011.03.30 콘솔게임의 역사 (6) 아타리(ATARI)의 탄생 (6)
  16. 2011.03.18 콘솔게임의 역사 (5)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6)
  17. 2011.03.08 콘솔게임의 역사 (4) TV와 게임의 첫 만남, 브라운 박스(Brown Box) (6)
  18. 2011.02.25 콘솔게임의 역사 (3) 새시대의 서막을 알린 스페이스워(Spacewar!) (14)
  19. 2011.02.17 콘솔게임의 역사 (2) 최초의 비디오게임, Tennis for Two (4)
  20. 2011.02.14 콘솔게임의 역사 (1) 전자 게임의 기원 (5)
  21. 2011.02.12 콘솔게임의 역사 (0) 연재를 시작하면서 (6)

::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도심 곳곳에 붉은색 배경에 외계인 모양의 간판을 한 게임 센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978년 타이토가 출시한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일본 게임 역사에 성공 신화를 쓴 최초의 게임 기업이었다. 사진은 저자가 2013년에 오사카 여행 중 니혼바시 역앞에서 촬영한 타이토 스테이션 건물 전경 ::

(지난 시간에 이어서)

1978년 7월,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s)가 출시될 당시 일본의 시대 상황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선샤인60이 완공되고, 나리타 공항의 개항, 디스코가 유행하는 등 고도성장이 한창이던 시기였습니다. 게임 시장 역시 미국에서부터 들여온 아타리의 퐁(Pong) 시리즈와 이 게임의 영향을 받은 여러 카피캣 게임들이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었고 아직 아케이드 게임 센터는 백화점 옥상이나, 다방, 바(Bar) 같은 곳에 비치되어 있는 정도로 작은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 침략자(Invaders)가 일본의 게임 시장을 완전히 뒤집어놨습니다.

인베이더 신드롬 (Invaders Syndrome)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출시 후 일본과 미국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퐁(Pong) 이후로 잠시 정체되었던 아케이드 비디오 게임 시장은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맛보게 되었고 이 게임으로 인해 사회적인 신드롬 현상까지 발생합니다. 하루에 4억엔에 이르는 100엔짜리 동전이 사용되면서 동전 공급 부족 현상을 겪게 되고 '인베이더 하우스'라는 전용 게임센터가 생기지만, 질 나쁜 성인들과 청소년들이 모이면서 폭력과 절도 등의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등 게임센터의 이미지가 나빠졌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출입을 금하는 교칙이 추가되기도 했습니다.

:: 일본 전역에 스페이스 인베이더 전용의 '인베이더 하우스'가 활성화 되면서 본격적인 게임센터 시대가 열린다. ::

:: 1979년 성인과 청소년 모두 스페이스 인벤이더를 즐기는 모습 (출처 : 아사히 신문 발췌) ::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일본에서만 수십만대의 아케이드 기기가 판매되었고, 미국에서는 오늘날 미드웨이의(Midway Games) 전신인 Bally-Midway Manufacturing을 통해 1979년 한 해에만 6만대의 기기를 판매합니다. 미국의 경우, 1977년에 개봉된 스타워즈의 영향으로 우주 배경의 이야기와 상품들 소비가 급증하면서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어떤 게임이기에 이토록 사회적인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큰 인기를 얻을 수 있던 걸까요? 단순히 유행에 맞춰 우주 배경으로 게임을 만든 이유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게임은 게임 플레이부터 개발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80년대의 게임 들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슈팅 게임의 선구자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재밌던 이유는 기존의 게임 방식의 틀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게임은 자신이 플레이하는 객체 외에 다른 대상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레이싱 게임조차도 마치 고정되어 있는 듯한 장애물이나 자동차를 피해 다니는 정도였죠. 하지만 이 게임에 등장하는 외계의 침략자들은 플레이어를 직접 공격합니다. 내가 적을 공격할지언정, 적이 나를 공격하는 경우가 없었던 기존의 게임들을 빗대어 보면,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플레이 방식은 '혁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엔딩이 없는 것도 특징입니다.[각주:1] 결국 플레이어는 자신이 죽을 때 침략자들의 침범을 허용하고 맙니다. 게임기마다 플레이어가 얻은 스코어로 RANK를 기록하는 오늘날의 슈팅게임 형태도 바로 스페이스 인베이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에 없던 독특한 게임 방식으로 크게 성공하자 슈팅게임 장르가 새롭게 형성 되었고, 향후 남코의 갤럭시안과 갤러그가 연이어 성공하면서 슈팅게임의 전성기를 열게 됩니다.


:: 1978년 초기 버전의 스페이스 인베이더 플레이 영상 ::

1인 개발, 니시카도 토모히로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개발자 니시카도 토모히로(西角友宏)는 당시 타이토의 아케이드 게임 핵심 개발자였습니다. 배경음-효과음을 만드는 것 외에 전부 혼자서 이 게임을 개발해냅니다. 니시카도는 당시 일본의 마이크로컴퓨터 기술로 게임을 개발하는데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컬러와 사운드, 적의 속도 등을 구현하는데 성능이 뒷받쳐주지 못했죠. 아케이드 게임 기판(PCB)를 새롭게 구성해야만 했습니다.

CPU는 미국산 Intel 8080 채택하고 아날로그 써킷과 TI(Texas Instruments)社의 SN76477 칩을 조합해서 기판을 완성합니다. 게임은 CRT 모니터에 픽셀 단위로 래스터 그래픽을 제공한 오늘날의 2D 게임 형태를 갖췄고, 모노사운드를 제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판을 커스텀하게 구성한 이유였을까요? 니시카도는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게임을 프로그래밍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적들을 컬러로 구현하거나, 적들의 침략자들의 속도를 빨라지게 구현하는 부분이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하드웨어 문제 였습니다. 프로세서 성능상 디스플레이에 객체들이 적어야 빠른 속도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결국 게임을 새롭게 디자인해야 했습니다. 처음에 화면상의 적들 수가 많을 때는 속도를 천천히, 그리고 적들의 수가 줄어들 수록 점점 속도가 빨라지게 구현합니다. 마지막 한 마리가 남을 때 엄청난 속도를 보여주는 것도 하드웨어 리소스를 활용한 결과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1978년 최초 모델은 컬러 그래픽을 구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각주:2] 대신, 샐로판지를 붙여서 각 층마다 색깔이 달라지도록 보이는 가림수를 선택하는데요, 재치있는 방법이었습니다.

::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PCB ::

최초의 게임 음악?

게임 음악 역사 관점에서도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한 번의 혁신을 이룹니다. 효과음과 배경음이 구별되어 '동시에 들리는' 최초의 게임이었기 때문이죠.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플레이어는 자신이 이 외계 침략자들에게 발사하는 미사일 소리와 외계 생명체로부터 날라오는 포화 소리를 통해 게임에 몰입하는 동시에, 우주라는 공간의 긴장감을 살리고자 하고자 게임내내 계속해서 흐르는 배경음을 삽입합니다.

"사운드는 외주를 통해 만들었는데요, 저는 외계인이 다가오는 그 순간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심장 박동소리와 같은 형태로 배경음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또, 게임 중간 화면 상단에 빠르게 지나가는 빨간 UFO가 우주 저편에 있는 느낌이 전해지도록 효과음을 추가 했죠.[각주:3]" - 니시카도 토모히로

이 심장박동 배경음은 외계 침략자들이 점점 플레이어 앞에 다가올 수록 빨라지고 나머지 적이 하나만 남았을 경우에는 최고조에 달합니다. 코앞에 적이 다가온 긴장감을 음악으로 극대화 시킵니다. 이런 디테일과 치밀함이 게임을 즐기는 이들을 매료시켰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전세계를 순회하며 명작 게임 음악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여는 VIDEO GAME LIVE는 게임 음악의 역사를 시작한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상징하는 로고를 이용하고, 매 공연마다 청중을 초대해서 스페이스 인베이더 게임을 즐기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

최초의 써드파티(Third-Party) 게임, 킬러 타이틀(Killer App)의 시작

이제 비디오 게임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977년에 아타리는 워너 커뮤니케이션에 인수되어 1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개발 비용을 투자 받으면서 차세대 콘솔 게임기인 아타리 VCS(2600)를 출시하지만 1~2년간 시장의 냉담한 반응으로 난항을 겪었습니다. 워너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결국 사장인 놀란 부쉬넬은 자신이 창업한 회사를 나오게 되고, 아타리는 실패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18화 내용 참고)

하지만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위기에 빠진 아타리 VCS를 구원합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실적은 1978년 출시 후 한 해에 일본에서만 10만대의 기기가 설치되었고 6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하였고 2년뒤인 1980년이 되었을 때는 설치된 아케이드 기기가 30만대로 늘어난데다 미국에서도 6만대가 설치되었습니다. 1개 기기 당 연 평균 2~3천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하니, 설치만 하면 고수익을 보장하는 게임 기계였습니다.


:: 스웨덴의 아타리 2600 TVCF.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앞세워 소개하고 있다. ::


:: 연예인이 광고하는 아타리 VCS 전용 스페이스 인베이더 TVCF ::

이런 상황에서 아타리는 1980년 1월, 타이토와 함께 아타리 VCS 전용의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출시합니다. 다른 게임 회사의 타이틀을 출시하는 써드파티(Third-Party)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아타리는 1980년 한 해에만 200만대의 VCS 판매고를 달성하고 20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킬러 타이틀의 힘을 확인하게 됩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로 크게 성공하자, 써드파티 전략에 확신을 얻은 아타리는 VCS를 오픈해서 여러 게임 회사들을 초대합니다. 이제 아타리를 필두로 아케이드 게임과 비디오 게임은 몇년간 찬란한 황금기를(Golden Age)를 만끽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개발한 니시카도 토모히로 초상화로 만든 아트워크. (ⓒ Charis Tsevis. Powered by Bēhance Prosite) ::

[참고 자료]

http://nyamuko.cocolog-nifty.com/blog/2011/09/post-0280.html
http://spaceinvaders.jp/about.html
http://d.hatena.ne.jp/M_perrier/?of=30
http://en.wikipedia.org/wiki/Tomohiro_Nishikado
http://en.wikipedia.org/wiki/Space_Invaders
http://content.usatoday.com/communities/gamehunters/post/2009/05/66479041/1#.UzBCwVfH0tE
http://www.behance.net/gallery/Gadgets-Games-Robots-and-the-Digital-World/2665299
http://www.videogameslive.com/index.php?s=info


  1. 화면의 침략자들을 모두 소탕하면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구조다. [본문으로]
  2. 차기 버전의 아케이드 기기 부터는 컬러 게임으로 출시한다. [본문으로]
  3. 2009년 5월 6일 USA TODAY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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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8월 24일, 타이토(TAITO)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창립 60주년을 기념하는 축전을 게재한다. 오랜 역사를 지닌 게임 회사들이 그렇듯, 타이토 역시 처음에는 보드카를 일본에 수입하는 무역회사로 시작해 격동의 70년도에 게임회사로 전환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2005년 스퀘어에닉스에 인수되기까지 슈팅게임의 대명사로 게임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으며 1978년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큰 성공으로 향후 닌텐도 같은 일본 회사들이 미국 게임 시장으로 진출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미지 출처 : 타이토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

(지난 시간에 이어서)

1950년, 유대계 러시아인 사업가 미하일 코건(Michael Kogan)은 일본에 최초로 보드카를 수입하는 사업을 시작합니다. 최초 사명은 타이토양행(太東洋行). 3년 뒤인 1953년 타이토 무역주식회사(TAITO Trading Company)로 변경하고 보드카 증류 및 판매를 이어가는 동시에, 납품하는 주점(Bar)에 주크박스와 같은 오락기기를 수입하고 임대하는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확장해 갑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 이미 타이토는 일본 내에 보드카와 주크박스 사업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 주크박스 사업의 성공은 타이토가 향후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자연스럽게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은 1966년 타이토의 주크박스 카탈로그 지면 광고. (사진 출처 : 타이토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

아케이드 게임 사업 시작

타이토는 주크박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아케이드 게임 사업을 시작합니다. 오늘날 사명인 타이토 주식회사(TAITO Corporation)로 변경하는 1972년까지 크레인 뽑기 게임기, 핀볼 게임기, 축구, 배구 게임기 등 10년간 40여개의 기계식 아케이드 게임을 출시합니다. 일본 시장 뿐 아니라 미국, 브라질 등 해외 시장에 핀볼 사업을 확장하는 등, 1970년대에 이르러 타이토는 게임 회사로 완벽하게 변신했습니다.

특히 70년대 브라질 아케이드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 받는데요, 1972년에 타이토 브라질 지사를 출범할 당시 브라질 전역에 400여개의 핀볼 게임 기계가 설치되어 있는 아케이드 센터를 인수하면서 임대 사업을 확장했고, 더욱이 1975년도에는 도박 기계였던 핀볼이 순수 게임 기계로 인정 받게 되면서 여러  제약이 풀려 사업에 박차를 가합니다.

:: 타이토 브라질 지사의 수장은 창업자 미하일 코건의 아들, 아바 코건(Abba Kogan)이었다. 그는 항상 화려한 복장과 큰 목소리로 청중의 시선을 사로 잡는 스타일이었다고 전해진다. ::

일본 최초의 상업용 전자 게임 'Elepong'

핀볼 게임기 임대 사업을 이어가던 타이토는 1972년 미국 아타리가 퐁(Pong)으로 아케이드형 비디오 게임 시장을 개척했을 때 발 빠르게 전자 게임 개발을 시작합니다. 기계식 아케이드 게임만 개발하던 타이토에게 퐁(Pong)의 성공 신화는 비디오 게임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이듬해인 1973년에 일본 최초의 전자 게임인 'Elepong'을 시장에 출시합니다.

Elepong은 기존에 아타리의 퐁(Pong)과 아주 유사한 탁구 게임으로, 페들을 돌리며 조작하는 것부터 2인 대전하는 방식까지 같았기에 창의성 있는 게임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타이토가 오늘날의 비디오 게임 회사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출발점이 되어준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 일본 최초로 출시된 상업형 전자 게임 Elepong. (이미지 출처 : 타이토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

이후로 타이토는 매년 5~6개 이상의 아케이드형 비디오 게임을 개발합니다. 퐁(Pong)류의 스포츠 게임을 시작으로 Attack UFO와 같은 스틱형 슈팅 게임, 실제 자동차 휠로 구동하는 스피드 레이스(Speed Race) 등으로 일본 뿐 아니라 아타리가 지배하는 미국 시장에도 명성을 쌓아가게 되는데요, 1976년도까지 타이토가 4년간 출시한 아케이드형 비디오 게임만 총 20종이었고, 1977년 한 해에 출시한 게임만 23종에 이르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 1974년에 출시한 Basketball. 제한 시간 내에 점수를 많이 내는 사람이 승리하는 단순 게임이다. ::


:: 역시 1974년에 출시한 레이싱 게임 Speed Race. 실제 자동차휠로 조종했으며,
다른 차에 부딪히면 끝나기 때문에 레이싱 게임이라기 보다는 슈팅게임에 가깝다. ::

스타워즈(Star Wars) 신드롬

1977년 당시 타이토 비디오 게임 개발 수장이던 니시카도 토모히로(西角友宏)는 신작 게임의 프로토 타입을 제출하는데요, 플레이어가 전투기를 격추하는 슈팅 게임 장르였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하드웨어 성능의 한계로 이 비행 물체가 쉽게 예측 가능한 내에서 너무 부드럽게 움직이는 문제를 겪었습니다.[각주:1] 결국 전투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선회해서 격추하는 대상이 '사람'이 되도록 계획을 수정합니다. 하지만 타이토 경영진은 사람을 맞추는 비도덕적인 게임은 허가할 수 없다며 프로토타입을 기각시킵니다.

결국 니시카도는 다른 방향으로 게임을 새롭게 기획해야만 했습니다. 마침, 1977년 미국은 그 해 출시된 영화 스타워즈(Star Wars) 신드롬으로 우주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면서 우주 소재의 SF 소설책과 연관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SF의 영원한 고전인 H.G.웰스의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적을 디자인 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타이토의 신작 게임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 소설 우주전쟁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마치 오징어나 문어를 연상하는 모습이었다. 니시카도 토모히로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새롭게 적 캐릭터를 디자인한다.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

[참고 자료]
http://historiadosgames.wordpress.com/2010/09/15/%E2%80%9Cdo-atari-ao-zeebo-a-historia-dos-videogames-no-brasil%E2%80%9D-2/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Taito_games
http://en.wikipedia.org/wiki/Space_Invaders
https://www.facebook.com/TAITO.Eng
http://www.behance.net/gallery/Gadgets-Games-Robots-and-the-Digital-World/2665299
http://www.1up.com/features/ten-space-invaders


  1. 당시 프로토타입에 사용하던 프로세서는 인텔에서 생산한 8bit의 Intel 8080 칩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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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아타리는 차세대 콘솔인 VCS(VIDEO COMPUTER SYSTEM)을 출시한다. 오늘날 게임 업계에 전설로 알려져 있는 것과는 상반되게, 출시 직후 워너 커뮤니케이션의 경영 개입으로 아타리와의 관계가 악화된다. 결국 창업자 놀란 부쉬넬은 이듬해에 대표 자리에서 사퇴하게 이른다. (사진은 1980년에 출시된 4개 스위치 모델인 CX-2600A의 지면 광고) ::

(지난 시간에 이어서)

1977 : 250,000 Units

숫자로 보는 아타리의 차세대 콘솔 VCS(VIDEO COMPUTER SYSTEM)의 출시 1년차의 판매량은 처참했습니다. 1억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개발 비용이 투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퐁(Pong)이 출시되던 시절의 폭발적인 반응을 기대했던 워너 커뮤니케이션과 아타리로서는 시장의 냉혹한 반응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경쟁사인 페어차일드의 채널 F[각주:1]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00 후반대의 비싼 가격도 그렇지만, 그당시 이미 1세대 Pong(퐁)류의 카피캣 게임들이 헐값에 팔리고 있던 시기라 아직 시장은 비싼 금액을 들이면서 2세대를 구입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초창기에 출시된 9가지 게임들이 기존의 Pong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주 원인입니다.

VCS 출시 이후 워너와 아타리 사이에 골이 깊어져 갑니다. VCS의 판매 성적도 나빴지만 거기에 아케이드, 핀볼, 휴대용 게임기 등 다른 사업부까지 예상보다 좋은 실적을 얻지 못하게 되는데요, 결국 워너의 경영 개입까지 더해져 아타리는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시작합니다.


:: 1977년 아타리 VCS의 TV광고 ::


:: 아타리는 지난 Pong 시절과 마찬가지로 Sears사와 OEM 계약을 맺어
Sears Tele-Games 이름으로도 함께 출시한다. ::

계속되는 아타리와 워너 커뮤니케이션의 갈등

출시 후 이듬해인 1978년까지 계속되는 판매 부진은 아타리와 워너 케뮤니케이션의 경영진들 사이에 불화를 가중시켰습니다. 빨리 투자 금액을 회수하길 원하던 워너로부터 경영 개입이 깊어집니다. 사실, 워너의 아타리 인수 이후 놀란 부쉬넬과 워너의 관계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경영 효율과 성과 중심의 관료적인 워너와는 대조적으로 연구개발에 집중하는 아타리의 엔지니어 중심 경영 방침이 늘 충돌했는데요. 당시 워너의 부사장이던 Manny Gerard도 처음에 아타리의 연구개발에 집중하는 모습에 긍정적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불만을 토로하게 됩니다.

"아타리의 경영 전략에는 판매도, 광고도, 마케팅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연구개발(R&D)뿐이었죠."[각주:2] - Manny Gerard

그의 말처럼 아타리의 연구개발 중심의 경영 방침은 과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당시 아타리 개발자 들에게 업무 환경은 '천국'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하나의 게임을 개발하는데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완성될 때까지 개입하지 않고 개발자가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하니 대기업 워너 입장에서는 이런 부분 하나 하나 '비 효율'로 보였던 것이죠.

거기다 놀란 부쉬넬은 VCS를 출시하자마자 차세대 게임 개발을 동시에 시작해야 한다고 워너의 경영자들에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기존의 레코드 음악 사업의 마인드로 비디오 게임 비즈니스에 접근하던 워너로서는 VCS는 업그레이드 없이 계속 생산해서 단가를 낮추고, 게임 소프트만 만들어서 팔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엔 VCS의 첫 해 판매량이 부진한 것도 한 몫 했습니다.

"VCS가 출시될 당시, 저는 곧바로 차세대 게임기를 위한 연구 개발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당시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고 우리는 나날이 발전하는 하드웨어에 맞춰 더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너의 경영진은 이 제안을 끔찍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45rpm 레코드(LP) 기계처럼 한 번 만들어두면 오랫동안 비즈니스를 유지할 수 있는 사업이었습니다. 비디오 게임은 이런 레코드 음반 산업과는 다르기 때문에 2~3년 이내로 새로운 하드웨어를 출시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워너의 향후 결정사항에 차세대 게임기 개발은 없었습니다. 훗날 아타리가 붕괴하는 1982년 말까지 말이죠."[각주:3] - 놀란 부쉬넬

이런 식으로 놀란 부쉬넬과의 경영 방침에 마찰이 있던 와중에 Manny Gerard는 1978년 초, 섬유 업계에 몸 담던 Ray Kassar (Raymond Edward Kassar)를 아타리의 소비자 사업부로 영입해 아타리의 경영에 참여시킵니다. 엔지니어링 밖에 모르던 아타리에 전문 경영자가 투입된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아타리에 오기 전까지 게임에 대해선 문외한이었습니다. 당연히 엔지니어 중심의 아타리에 융화되기 쉽지 않았습니다.

:: 놀란 부쉬넬에 이어 아타리의 두 번째 CEO가 되는 Ray Kassar. 그는 아타리에 오기 직전에 게임 산업과 관계 없는 섬유 업계에 있었다. 취임 후 엔지니어 위주의 아타리 사업부들을 뒤집어 놓았고 개발자들에게 양말왕(Sock King), 수건황제(towel czez)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그 역시 아타리 개발자들을 까칠한 프리마돈나(high-strung prima donnas)라고 인터뷰 상에서 언급할 정도로 아타리 직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

창업자 놀란 부쉬넬의 퇴사

앞서 말씀 드렸듯이 1978년, 아타리는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전년도 VCS 출시 후 판매 실적이 부진했고, 창고에는 4,000만달러에 이르는 게임기 재고가 쌓여있었습니다. 놀란 부쉬넬은 올해도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좋은 판매량을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워너는 새로운 경영자 Ray Kassar의 마케팅 계획이 좋은 성과를 얻을 거라 확신했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작합니다.

결국, 놀란 부쉬넬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그 시기에 출시된 스페이스 인베이더(Spcae Invaders)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 입어 게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거기에 Ray Kassar의 공격적인 TV 광고가 더해져 크리스마스 시즌 판매 호조를 이룹니다. 이런 아타리의 활약[각주:4]으로 1978-1979 년도 워너의 소비자 사업부는 2억달러의 영업 이익을 달성하게 됩니다.


:: 1978년 아타리 VCS의 TV광고 ::

놀란 부쉬넬은 워너의 아타리 인수 이후 첫 성과를 인정 받았고, 워너로부터 계속해서 아타리의 게임 사업부의 수장 자리를 이어가길 바랐지만 계속되는 경영 갈등으로 인해 사실상 회사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났다고 꺠닫습니다. 결국 1978년, 그는 비슷한 시기에 개업한 복합 문화 센터인 Chuck E. Cheese's Pizza Time Theatre가 향후 7년간 아타리와 경쟁 사업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아타리 대표 자리를 내려놓습니다. 이렇게 최초의 비디오 게임회사는 엔지니어 창업자와의 이별을 고하고,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아타리를 구원한 Ray Kassar 체재로 돌입합니다.

:: 놀란 부쉬넬이 창업한 Chuck E. Cheese's는 월트 디즈니의 놀이동산에 영감을 받아 피자를 먹으면서 게임과 여러 놀이 문화를 함께 즐기는 복합 공간을 만들었다. 생일 파티의 1등 장소가 될만큼 오늘날까지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아타리의 신임 수장, Sock King(양말 왕)[각주:5] Ray Kassar

아타리의 대표가 바뀌자마자 가장 먼저 조직 개편이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CEO는 그간 아타리가 불필요한 프로젝트가 너무나 많다고 느꼈습니다.[각주:6] 무엇보다 아타리의 핵심이었떤 R&D부서들을 없애거나 대폭 축소하게 되는데요, 그의 경영 방침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지금의 아타리는 이미 출시된 VCS가 당장 잘 팔리는데 집중해야지, 과도한 연구 개발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타리는 엔지니어의 천국이던 회사 업무 분위기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요, 금요일 파티를 폐지하고 드레스 코드를 재정하고 업무 시간을 엄격하게 정하고 회사 건물에 보안 설비와 담당자를 배치하는 등 점점 관료적인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이런 분위기만 봐서는 서서히 암운이 다가올 것 같은 아타리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부터 몇 년 간은 전례 없는 황금기를 맞이하게게 되는데요,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아케이드 게임을 이식하면서 비디오 게임 업계에 써드파티(Third-Party) 시대를 맞이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http://en.wikipedia.org/wiki/Atari_2600
http://en.wikipedia.org/wiki/Atari_2600_hardware
http://www.gamasutra.com/view/feature/132160/atari_the_golden_years__a_.php
http://www.gamasutra.com/view/feature/6364/the_replay_interviews_ray_kassar.php


  1. 재밌는 사실은, 두 경쟁 게임기 모두 1977년 판매량이 25만대였다. http://goo.gl/CwSPRj [본문으로]
  2. Zap: The Rise And Fall Of Atari By Scott Cohen. [본문으로]
  3. [Gamasutra] Atari: The Golden Years -- A History, 1978-1981 [본문으로]
  4. 1978년 아타리 VCS는 55만대의 판매량을 달성한다. 이는 전년도 25만대의 2배가 넘는 수치이다. [본문으로]
  5. 그가 아타리에 오기 전에 섬유 업계에 종사하던 이유로, 아타리 직원들의 비하가 담긴 별명이었다. [본문으로]
  6. 그는 처음 아타리에 입사할 당시 연구개발 중심의 회사 경영상태를 보고 재앙(Disaster)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본문으로]
  1. 익명
    2017.05.16 06:00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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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타리의 신형 게임기 프로젝트 코드명이었던 스텔라(Stella)는 당시 아타리의 엔지니어 Joe Decuir가 붙인 이름으로, 자신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 브랜드명이었다. 예상대로 그는 소위 말하는 '자덕'으로 자전거 광이었고 오늘날 링크드인 프로필 사진에서까지 그의 자전거 사랑을 쉽게 엿볼 수 있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워너 커뮤니케이션 산하에서 안정적인 투자를 받으며 신형 게임기 스텔라 프로젝트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아타리. 하지만 생각처럼 개발 과정은 수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정도 급박했고, 하드웨어 부품 단가 절감과 수율 문제 등 여러가지 고충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스텔라의 하드웨어 개발 과정을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아타리의 고군분투를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프로세서, MOS 6507

:: MOS 6507 ::

앞서 아타리는 스텔라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 MOS와 6502 프로세서 계약을 체결했다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물은 6502가 아니라 스텔라의 가격 효율성을 맞추기 위해 새롭게 고안한 소형 MOS 6507 이었습니다. 6507은 1.19Mhz 클럭으로 동작하며 메모리 어드레스 라인을 16핀에서 3핀을 줄인 13핀만으로 최대 8KB의 메모리에 접근합니다. 그리고 8핀는 데이터 용으로, 나머지 7핀은 전원과 대기 표시 등으로 사용되어 40핀에서 28핀으로 축소된 버전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타리는 이 축소형 프로세서를 통해 개당 $1 원가 절감에 성공하게 됩니다.

6507이 최대 8KB의 메모리를 수용할 수 있었지만, 아타리는 13핀의 메모리 어드레스 라인 중 1핀을 칩 셀렉트 용도로 사용하고 나머지 12핀의 4KB만을 게임 저장용으로 사용하도록 설계하는 실수아닌 실수(?)를 저지릅니다. 당시 하드웨어를 개발하던 엔지니어 Joe Decuir는 프로세서 개발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상합니다.

"스텔라를 개발하던 당시 하나의 게임을 구동하는데 2KB의 메모리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최초 모델은 4KB 까지 지원하도록 설계했죠.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메모리 부족 문제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추가로 32KB 메모리를 확장하는 뱅크 스위칭(Bank Switching) 기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게임기가 이렇게 오랜 기간 이용되고 게임 하나에 훨씬 많은 메모리가 필요할 날이 빨리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겁니다." - Joe Decuir

아타리의 독자적인 비디오/오디오 칩셋 TIA

아타리는 스텔라에 사용할 독자적인 비디오와 오디오 기능을 통합한 TIA(Television Interface Adaptor) 칩을 개발하게 됩니다. 앞서 소개한 MOS사와 같은 반도체 회사에서 아웃소싱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발해야 했던 이유는 당시 반도체 메모리 가격이 너무나 비쌌기 때문[각주:1]입니다. 게다가 MOS의 RAM은 불량률이 굉장히 높았다는 점도 앞서 페어차일드 채널 F 이야기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스텔라는 가능하면 모든 부분에서 RAM 사용을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하드웨어를 설계 해야만 했고, 상황이 이렇다보니 스텔라 프로젝트 성공의 열쇠는 TIA 칩 설계를 맡고 있던 제이 마이너(Jay Miner)가 손에 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TIA는 디스플레이 출력과 제어에 있어 RAM 사용을 최소화 하는데 집중한 노력의 결정체였습니다. 예로 192x160 해상도에서 1픽셀당 1bit의 메모리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프레임버퍼(framebuffer)[각주:2]를 저장하기 위해 3,840Bytes의 메모리로 관리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결국 스텔라 플렛폼이 목표로하는 $100 후반대의 가격에 맞출 수 없고 해상도를 줄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아타리는 기존 방식을 대체 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냅니다. 바로 라인(Line) 입니다. 전체 화면으로 구성하는 프레임버퍼 매핑 방식으로 디스플레이를 출력하는게 아니라, 2개의 스프라이트(8 픽셀 라인), 볼(픽셀 1개), 2개의 미사일(2개의 픽셀 라인) 5가지 단색 오브젝트들을 겹쳐서 하나의 라인(Line)에 그려내는 방식으로 구현 합니다. 스텔라의 해상도는 192x160 픽셀 이었기 때문에 총 160개의 수평 라인에 개별적으로 등록된 레지스터들을 제어하여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가 한 화면에서 구동되듯이 느끼도록 프로그래밍하는 기술을 요구하게 됩니다.

:: 스텔라의 핵심 부품 3가지. 위에서 부터 순서대로 Ram-I/O-Timer (RIOT) 칩셋, MOS 6507 프로세서, 그리고 가장 아래가 비디오/오디오 통합 칩셋인 TIA로, 차세대 게임기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 iFixit (License by Creative Commons BY-NC-SA)

결과적으로 TIA의 구현  방식은 메모리 효율성을 높이는데 성공하지만, 반대로 악명높은 프로그래밍 난이도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설명대로 한 라인에 동시 표현 가능한 오브젝트는 최대 5가지, 그리고 4 컬러 까지 동시 표현이 가능[각주:3]했는데요, 이 160개 라인을 한 화면에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실시간으로 제어하면서 사용자의 컨트롤과 AI 까지 고려하고 거기에 동시 표현 가능한 4가지 색상 배치까지... 출시 이후 스텔라의 개발 가이드를 처음 접하는 프로그래머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IA의 구현 방식은 극악의 난이도를 넘어 하드웨어의 유연한 확장성과 개방성 덕분에 호기심 넘치는 수많은 컴퓨터 광들의 참여를 일으켰고, 비디오게임 시장에도 누구나 공개 소스로 게임을 직접 만들고 가지고 노는 Homebrew 시대를 열게되어 30여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사랑받는 결정적인 계기[각주:4]가 됩니다.


:: 최근 아타리 2600 에뮬레이터로 만들어진 Homebrew 게임 "Duck Attack" (2010) ::

조이스틱(Joystick)과 다양한 컨트롤러

스텔라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게임 컨트롤러는 앞서 프로토타입 모델에서도 언급했던 아케이드 게임 'Tank'의 조종석 컨트롤러를 본 따 만든 버튼 하나짜리 조이스틱(Joystick) 입니다. 포트는 9핀(DE-9)짜리 D-Sub 단자로 되어는데요, 재밌는 사실은 향후 출시되는 9핀 단자의 게임 컨트롤러로도 구동이 됩니다. 아무튼 이 조이스틱은 겉보기엔 원형으로 부드럽게 돌아갈 것 같이 생겼지만 실제는 상하좌우 4방향(十자)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상당히 뻑뻑했습니다. 이 밖에도 기존의 퐁(Pong) 게임에서 사용하던 페들, 트랙볼, 12키 키보드 등 훗날 이 게임기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 아타리에서 제작한 컨트롤러 외에도 다양한 써드파티(Third-Party) 컨트롤러가 전용 게임들과 출시되기도 합니다.

:: 향후 써드파티를 통해 출시되는 아타리 2600의 다양한 컨트롤러들 © The Video Game Critic. ::

모든 준비를 끝 마치며

TIA 칩 개발과 디버깅이 순조롭게 마무리 되면서 아타리는 스텔라 출시를 코 앞에 두게 됩니다. 70년대 초반부터 진행해온 프로젝트 였지만 개발에 난항을 겪은데다 심각한 자금난을 맞아 결국 워너 커뮤니케이션에 회사를 매각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너무 비싼 RAM 가격 때문에 1bit 라도 메모리 사용을 최소화 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배경 아래 1977년 9월, 아타리 VCS(Video Computer System)[각주:5]는 기출시된 페어차일드 VES와 전면전을 앞에 두면서 2세대 콘솔 시장에 진입합니다. 차세대 게임기 개발에 들어간 비용은 총 1억 달러. 아타리는 이 기계 하나에 기업의 사활을 걸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en.wikipedia.org/wiki/Atari_2600#cite_note-2
http://en.wikipedia.org/wiki/Atari_2600_hardware
http://www.ifixit.com/Teardown/Atari+2600+Teardown/3541


  1. 1976~77년 당시 RAM 1MB 당 가격은 3만달러(한화 3500만원)가 넘었다. http://jcmit.com/memoryprice.htm [본문으로]
  2. 컴퓨터 그래픽에서 한 화면 분량의 화상 정보의 일시적 저장에 쓰이는 기억 장치. 디스플레이 해상도가 높아질 수록 많은 메모리 용량을 요구한다. [본문으로]
  3. TIA가 지원하는 색상 팔레트는 TV 방식에 따라 달랐는데 NTSC는 최대 128컬러, PAL은 104컬러, SECAM은 8컬러 팔레트였다. [본문으로]
  4. 여러 컴퓨터 괴물들이 참여해서 한 라인에 최대 15컬러 까지 표현하는데 성공하는 등 하드웨어의 한계를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http://youtu.be/fRr4kxZetYA) [본문으로]
  5. 초창기 모델명은 아타리 VCS 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타리 2600은 80년대에 이르러 변경된 모델명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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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타리는 기출시되던 슈퍼퐁, 울트라퐁을 비롯해 스턴 서클 등 10가지 게임들을 카트리지로 구성해서 첫 2세대 콘솔, 게임브레인(Game Brain)을 출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게임들은 당시 경쟁사인 페어차일드의 채널F에 비해 너무 구식이었기 때문에 출시가 취소되었고, 오늘날 몇몇 시제품만 남겨두고 있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아타리의 차세대 프로젝트, 스텔라(Stella)

아타리의 R&D 부서는 페어차일드가 최초의 2세대 게임기라고 부를 수 있는 ROM 카트리지 방식의 채널F를 출시하기 몇년 전부터 퐁(Pong)을 넘어설 차세대 게임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차세대 게임기의 목표는 하나의 기기에 여러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퐁의 개발을 선두지휘하던 앨런 알콘(Al Alcorn)은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그 시기엔 게임 개발하는데 비용적인 부담이 커지고 매 게임마다 변형된 칩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카트리지 기반의 시스템 개발은 더욱 그랬죠. 그래서 하나의 기기에 여러가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유연한 시스템 개발이 필요해졌습니다." - Al Alcorn [각주:1]

:: Steve Mayer ::

당시 인텔 8080이나 모토로라 6800과 같이 차세대 게임기 개발에 적합한 8비트 프로세서들은 단가가 $100~300에 이르는 고가였습니다. 소비자가를 맞추기 위해선 비용적인 부담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이 난관은 부쉬넬과 알콘이 Ampex에 재직하던 시절에 함께 일하던 스티브 메이어(Steve Mayer) 론 밀너(Ron Milner)사이언 엔지니어링(Cyan Engineering)팀이 아타리에 가담하면서 실마리를 얻게 됩니다.

:: Chuck Peddle ::

1975년 9월경, 스티브와 론의 사이언팀은 MOS 6502 프로세서를 만든 모토로라 출신의 엔지니어 척 페들(Chuck Peddle)을 찾아갑니다. 척은 모토로라 재직 당시 6800 보다 더 저렴한 양산형 프로세서 개발을 제안했지만 모토로라는 척의 제안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원하던 6800 기반의 프로세서를 개발하기 위해서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척을 기용한 MOS Technology는 MOS 65xx 시리즈를 완성하게 되는데요, 이 프로세서의 단가는 모토로라 6800 이나 인텔 8080 프로세서의 15%에 불과했습니다. 척을 만난 사이언 팀은 이틀에 걸쳐 아타리 차세대 콘솔 시스템에 대해 논의을 진행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MOS 6502 프로세서를 $8 단가에 구입하기로 합의합니다. 구상중인 차세대 콘솔 사양에 적합한데다, 기존의 동전투입방식의 게임기에도 최적화 시킬 수 있었습니다.

같은해 12월경, 아타리 R&D 부서에 유능한 엔지니어 Joe Decuir가 영입되면서 차세대 콘솔 프로젝트는 스텔라(Stella)[각주:2]라는 이름으로 첫 프로토타입을 완성합니다. 첫 번째 프로토타입은 MOS 6502 기반의 커스텀 보드와, 6V 전원장치, 컨트롤러는 Kee Games의 동전투입방식 아케이드 게임기 'Tank'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고안되었습니다.

:: 스텔라 프로젝트의 프로토타입. 컨트롤러는 아케이드용 탱크 게임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

아타리의 실수? 애플 컴퓨터와 스티브 잡스

돌아보면 MOS 6502 프로세서 만큼 반도체 역사에 큰 궤적을 남긴 프로세서도 드물겁니다. 당시 아타리의 앨런 알콘에게 MOS 6502를 기반으로 만든 개인용 컴퓨터 프로토타입을 들고 찾아온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스티브 잡스(Steve Jobs). 최근까지 아타리에 재직중이던 괴짜 히피족 청년이었습니다. 동시에 HP에서 근무하던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의 도움으로 아타리의 히트작 벽돌깨기(Breakout)을 단 사흘만에 완성해서 아타리 사내를 발칵 뒤집은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퐁(Pong)과 같은 페들을 돌리는 형태의 게임이 세간에서는 이미 인기가 한풀 꺾였다고 인식하던 시절, 놀란 부쉬넬과 Steve Bristow는 벽돌을 부수는 형태의 1인용 퐁(Pong)을 고안합니다. 개발 단계에 들어가면서 알콘은 때마침 재직중이던 스티브 잡스에게도 칩 50개 미만으로 이 프로그램을 완성하면 성과금 $750 를 지급하고, 줄어든 칩의 개수에 비례해서 $100의 보너스를 추가로 지급하는 조건을 제안합니다. 비록 잡스는 뛰어난 엔지니어가 아니었지만, 당시 아타리를 자주 놀러오던 잡스의 친구 워즈니악의 존재를 인식하고 제안한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잡스는 나흘만에 완성하겠다고 약속하고 곧바로 워즈니악에게 연락해, 성공시 받게 되는 성과금을 절반으로 나누자는 조건하에 아타리의 새 게임을 만들기 시작합니다.[각주:3] 당시 게임을 프로그래밍 하려면 두달 가까이 걸리는데 반해, 뛰어난 엔지니어였던 워즈니악은 고작 사흘 만에 칩 45개로 게임을 완성합니다. 역사적인 벽돌깨기(Breakout)는 그렇게 탄생하게 됩니다.

:: 아타리의 벽돌깨기 게임. 오른쪽은 차고에서 애플 컴퓨터를 창업한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

그 후 워즈니악은 HP에 근무하면서 MOS 6502 프로세서를 이용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냅니다. 키보드로 입력하면 화면에 글자가 출력되는 혁명적인 기계였습니다. 잡스는 워즈니악을 설득해 인쇄 회로 기판(PCB)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하자고 제안했지만, 워즈니악은 윤리적인 이유로 재직중인 HP에 먼저 고안물을 보여주게 됩니다. 하지만 HP는 자사의 사업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상품 개발을 거절하게 되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각자의 회사에서 나와 차고에서 사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제품을 납품해서 판매해줄 곳을 찾는 것이 생각만큼 녹록치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개인용 컴퓨터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워즈니악이 가입한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회원들 조차도 컴퓨터광의 취미로 만들어진 기계일 뿐 사업 아이템으로 바당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바이트 숍'이라는 컴퓨터 상점을 운영해온 '폴 테럴'은 이들의 제품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판매 계약을 맺게 되지만 다음 문제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부품 비용으로 $15,000 가까이 필요했습니다. 당장 현금이 없던 스티브 잡스는 부품이나 자금을 지원해줄 스폰서를 물색하게 됩니다. 그렇게 최근까지 재직하던 아타리의 앨런 알콘을 찾아오기에 이른 것입니다. 아타리도 때마침 같은 MOS 6502 프로세서를 차세대 콘솔 개발과 동전투인 방식의 아케이드 게임기에 적용하려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는 스티브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아타리에 재직하던 시절에 좋아하던 사원이었기 때문에, 다른 벤처 캐피탈리스트들을 소개해줬습니다."[각주:4] - Al Alcorn

아타리 역시 이들의 개인용 PC가 '컴퓨터광이 만든 훌륭한 기계'일 뿐 사업으로 확장 할만큼 비전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잡스가 현금으로 선불로 지급하지 않는 한, 부품 칩을 판매하거나 투자해줄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애플 컴퓨터는 개인용 PC 시장을 개척하게 되었고, 아타리로서는 몇년 뒤 가정용 PC 사업에도 뛰어들면서 그 때 자신에게 왔던 큰 기회를 놓쳐버린 것을 아쉬워하지 않았을까요?

::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그 때 아타리가 애플I 프로토타입을 보고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IT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

아타리,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 매각

가정용 퐁(Pong)의 폭발적인 인기로 아케이드 시장의 인기를 가정용 게임기 시장으로 이어간 아타리지만, 이듬해인 1976년에 General Instrument가 발매한 AY-3-8500 칩으로 Pong류의 게임을 쉽게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여러 회사들이 복제품들이 양산해 헐값에 팔아치우기 시작합니다. 아타리는 Pong Double, Super Pong, Quadra Pong등 여러가지 변형된 퐁 시리즈를 연이어 출시하지만 퐁의 판매 둔화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소비자들은 퐁을 넘어선 새로운 게임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아타리의 1975-1976 회계보고에 의하면 $350만 영업이익, $3,900만 매출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하던 모습의 이면에는 치고 올라오는 경쟁사들에 대한 부담이 컸습니다. 또한 스텔라 개발을 위한 투자 비용이 연간 $100,000에 달하며 개발비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차세대 게임기의 빠른 결과물이 나오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스텔라 완성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재정이 필요했니다. 놀란 부쉬넬은 벤처 캐피탈리스트 돈 벨런타인(Don Valentine)을 찾아가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한 자문을 요청했고, 그는 아타리를 구입해줄 회사를 찾아보라고 권유 합니다.

"급속히 성장하는 사업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자본을 잠식합니다. 월가는 우리 제품들이 반짝 뜨다 말게 될 사업일지, 장기적으로 전망이 좋은 사업일지 결정하는데 난항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본을 확보하기 굉장히 힘겨워졌고, 쉽게 변하는 소비자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탄탄한 자본력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각주:5] - Nolan Bushnell

1976년, 아타리는 워너 커뮤니케이션(Warner Communications)에 $2,800만 금액으로 매각됩니다. 지분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던 놀란 부쉬넬은 단숨에 $1,500만을 가진 억만장자가 되었고, 워너는 놀란 부쉬넬을 아타리의 CEO로 유지한채 스텔라 개발에 아낌없는 지원사격을 펼칩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자본 문제를 해결하면서 아타리는 스텔라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스티브 잡스(Steve Jobs) - 월터 아이작슨 저
http://classicgaming.gamespy.com/View.php?view=Articles.Detail&id=401
http://www.gamasutra.com/view/feature/2000/the_history_of_atari_19711977.php?page=13
http://en.wikipedia.org/wiki/Atari_2600


  1.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p.36) [본문으로]
  2. 스텔라(Stella)는 Joe Decuir가 타던 프랑스 자전거 브랜드 이름에서 따왔다. [본문으로]
  3. 하지만 잡스는 추가 보너스를 받는 사실을 숨기고 워즈니악에게 성과금의 일부만 전달했다고 한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 - 월터 아이작슨 저> [본문으로]
  4. 애플은 아타리의 소개로 벤처 캐피탈리스트 중 '돈 벨런타인'을 만나게되었고, 초대 회장 마이크 마큘라를 영입하게 된다. [본문으로]
  5. C/Net News.com “The return of King Pong” by David Becker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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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를 설립한 8인의 반역자(traitorous eight)들은 실리콘밸리의 전성기를 열며 저명한 기업가들로 성장한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트랜지스터 발명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의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는 1956년, 기존의 트랜지스터보다 빠르고 다루기 쉬운 4층의 다이오드 연구개발을 목적으로 우수한 공대생들을 영입합니다. 하지만 괴팍한 성격의 이 천재 물리학자는 과도하게 연구주제를 바꿔가며 직원들을 견습생처럼 괴롭혔다고 합니다. 결국 1년 만에 반기를 들고 회사를 퇴사한 8명은 미 동부의 군수업체인 Fairchild Camera and Instrument Corporation에 자금 원조를 받아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社를 설립하게되고 2년만에 최초의 실리콘 집적회로를 출시합니다. 훗날 8인의 반역자(Traitorous Eight)[각주:1]로 불리게 된 이들로부터 60여개에 이르는 벤쳐들이 탄생 되면서 실리콘밸리는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8명의 멤버 중에는 오늘날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인 인텔(Intel)의 공동 설립자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고든 무어(Gordon Moore)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페어차일드의 비디오 게임 사업부 탄생

:: 제리 라우슨 (1940~2011) ::


8인의 반역자가 회사를 설립하고 십수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970년 초에 한 흑인 엔지니어가 페어차일드에 입사합니다. 제리 라우슨(Gerald Anderson "Jerry" Lawson)[각주:2]은 어린시절부터 TV 상점들을 들락거리며 전자 기술에 관심과 열정을 키워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자 회사에 취업하면서 자연스럽게 컴퓨터 기술과 프로그램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1970년대 초에 페어차일드에 입사한 제리는 때마침 아타리가 아케이드용 퐁(Pong)을 출시하면서 미국 전역에 신드롬을 일으킬 때, 이에 자극을 받아 자신의 차고에서 Demolition Derby라는 아케이드 게임기를 직접 만들게 됩니다. 퐁과 같이 동전을 투입해서 즐기는 형태였습니다.

우연히 제리의 아케이드 게임기를 발견한 페어차일드는, 협력업체인 알팩스(Alpex)社가 Intel 8080 프로세서로 구동되는 게임기를 페어차일드의 F8 프로세서로 전환할 수 있도록 기술 자문을 비밀리에 요청하게 됩니다. F8 프로세서로 구동되는 프로토타입을 완성한 제리는 보고를 위해 예산안을 들고 페어차일드의 부사장을 만나러 코네티컷주로 향합니다. 그리고 제리의 프로토타입 게임기를 살펴본 이들은 새로운 사업 가능성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 프로토타입을 보니 가치 있는 결과물이 나올 것 같군요. 한 번 추진해봅시다."[각주:3]

이렇게해서 페어차일드의 비디오 게임 사업부가 신설 되었고 제리는 신 사업부의 엔지니어 겸 마케팅 수장을 역임하게 됩니다. 오늘날, 2세대 비디오 게임기 시장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콘솔 페어차일드 채널 F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최초의 ROM 카트리지 게임기

:: Fairchild F8 Processor ::

페어차일드는 1976년, 자사의 F8 프로세서[각주:4]를 탑재한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페어차일드 채널 F (Fairchild Channel F)[각주:5]를 출시합니다. 64byte 메모리에, 2Kb 비디오 메모리가 내장되어 있었으며, 본체에 3채널 스피커가 달려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채널F는 Pong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라인당 4 컬러의 그래픽 성능을 보여줬습니다.

채널F는 하드웨어 부품을 아웃소싱하는 과정에서 난항을 겪어야 했습니다. 게임기가 $169.95의 고가에 가격이 책정된 것도 하드웨어 단가가 높은 이유였습니다. 특히 그래픽 성능 향상을 위해 RAM 사용량이 늘어났는데요, 외주로 MOS Technology社의 RAM을 이용하면서 생긴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당시 페어차일드도 RAM 을 만들고 있었지만 생산 단가 때문에 MOS에서 생산된 RAM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MOS의 RAM은 불량률이 너무 높았기 떄문에 생산 단가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제리는 직접 빨간 수레와 박스 2개를 준비해서 MOS의 테스트 공정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테스트에 통과 못하고 버려진 불량품들을 박스에 담았습니다. 90% 정도가 채워졌을 때 공장 밖으로 나가서 길거리에 지나가는 MOS 직원들에게 공짜로 뿌리면서 RAM 제품의 품질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동 후로 페어차일드가 유닛당 $2로 가격 협상을 이끌었지만 제리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직접 인텔의 RAM 생산 부서를 방문해서 구해온 RAM 10개를 들고 부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이걸 좀 보십시오. 부사장님께서 대부분 사용 불가능한 (MOS의) 쓰레기를 개당 2달러씩 지불할 때, 저는 인텔에서 사용할 수 있는 1달러짜리 RAM을 10개나 구해 왔습니다."[각주:6]

:: 2개의 컨트롤러가 연결되고 게임 카트리지가 별도로 판매한 오늘날 콘솔 형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채널 F가 오늘날 콘솔 2세대를 시작한 게임기로 평가 받는 이유는, 최초로 ROM 카트리지(일명 게임팩)를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카트리지 형태는 마그나복스의 오디세이가 최초였지만 단순 점퍼 연결 방식이었습니다. 제리의 비디오 게임 사업부는 더이상 보드 안에 게임을 내장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하드웨어 부피가 너무 커져버리기 때문에 발열과 고장의 위험을 감수하기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결국 이런 욕구가 게임이 프로그래밍된 ROM 카트리지를 따로 만들어서 삽입하는 디자인을 고안하게 되었습니다.

채널F에는 하키와 테니스 게임 2개가 게임기 안에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었고 카트리지는 개당 $19.95에 판매되면서 게임기가 단종되기까지 총 27개의 카트리지가 출시되었습니다. 카트리지에는 하나 또는 두 개 이상의 게임이 내장되어 있었습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식의 비디오 게임기라는 점에서 시장에 큰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되었고 약 25만대의 판매고를 달성하면서 선전하게 됩니다.


:: 페어차일드 채널 F 의 TV광고 ::

카트리지를 채택한 2세대 콘솔 시장으로 진입

페어차일드 채널 F의 획기적인 시스템에 자극을 받은 아타리는 스텔라(Stella)라는 코드명의 카트리지 기반의 게임기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이듬해에 채널 F 보다 더 나은 그래픽과 사운드를 가진 아타리 2600가 출시하면서 새로운 경쟁 구도를 형성합니다. 이제부터 비디오 게임 시장은 카트리지를 채택한 2세대 시장으로 돌입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http://www.vintagecomputing.com/index.php/archives/545
http://en.wikipedia.org/wiki/Fairchild_Channel_F


  1. '8인의 반역자'라는 이름은, 쇼클리에 의해 붙여진 별명으로 전해진다. [본문으로]
  2. 흑인 컴퓨터 엔지니어로, 1970년대 실리콘밸리의 IT 수장들이 모여있는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의 일원이기도 했다. 훗날 애플을 설립한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도 클럽에 가입되어 함께 활동했다. [본문으로]
  3. VC&G의 제리 라우슨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 [본문으로]
  4. F8은 인텔을 설립한 로버트 노이스가 페어차일드를 퇴사하기 전에 개발 팀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프로세서는 출시 당시 가장 인기 있던 프로세서로 인텔의 8048 모델 개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본문으로]
  5. 이 콘솔은 초기에 페어차일드 VES (Video Entertainment System)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지만, 이듬해에 아타리가 VCS(Video Computer System)를 출시하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변경하게 된다. [본문으로]
  6. VC&G의 제리 라우슨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 [본문으로]
  1.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05.29 15:37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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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발발한 오일 쇼크 사태는 일본인에게 큰 불안을 안겨주었다. 갑작스런 물가 상승을 두려워한 나머지 시장 거리마다 생필품을 미리 사재기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사진은 1973년 11월 1일자 아사히 신문 보도 자료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위기 = 새로운 기회

완구 회사로 승승장구하던 닌텐도에게 오일 쇼크의 타격은 컸습니다. 갑작스런 물가상승을 두려워한 나머지 생필품을 사재기 하고, 과소비를 줄이는 등 일본 전역에 불안한 심리가 경제 활동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지갑문을 굳게 닫던 소비재가 바로 오락 산업이었던 만큼, 닌텐도가 야심차게 시작한 광선총 실내 사격장은 개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닌텐도는 창사이래 비즈니스 정체성을 두고 첫 번째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 내부적인 위기는 놀이 문화, 즉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사업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완구 사업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위기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오일 쇼크'라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빚어진 경제 불황 앞에서는 정체성을 지키기 힘겨웠던만큼 닌텐도가 사라질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닌텐도는 완구 사업을 축소하고 새로운 사업을 모색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닌텐도에게 운이 따라줬던 걸까요? 때마침 미국에서는 마그나복스의 오디세이아타리의 퐁이 출시되면서 TV에 연결해서 즐기는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가 인기몰이 중이었습니다. 야마우치 회장은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이 상용화 되면서 가정용 제품들이 출시되면 삶에 큰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고, 이 기술을 활용한 전자 게임 산업이 닌텐도의 정체성과 잘 맞아 떨어진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1974년에 닌텐도는 마그나복스로부터 오디세이의 일본 판매 계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비디오 게임 사업에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 1977년도에 출시된 닌텐도의 첫 비디오게임기 Color Tv Game 6. 총 4가지 모델로 출시 되었다. 특히 사진의 6S 화이트 모델은 C형 건전지만 사용 가능했던 초기 모델로, 소량으로만 판매되었기에 지금도 옥션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

Nintendo Color TV Game (任天堂 カラー テレビゲーム)

닌텐도는 마그나복스의 오디세이를 수입 판매하면서 직접 비디오 게임기를 만들기로 결심 합니다. 하지만 당시엔 게임기 개발 기술이 없었기에 기술 지원을 받아서 공동으로 제작할 전자 회사가 필요 했습니다. 광선총 개발의 주역인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미쓰비시와의 기술 제휴를 추진해서 본격적인 비디오 게임기 개발에 돌입합니다.

1977년 7월, 닌텐도의 첫 비디오게임기 Color TV Game (カラー テレビゲーム)이 출시됩니다. 닌텐도는 게임기에 내장된 숫자를 의미하는 Color TV Game 6Color Tv Game 15를 각각 출시합니다. 닌텐도의 이 게임기는 아직 카트리지 교환식이 아니라, 기판에 게임이 내장되어 레버로 모드를 전환해서 즐길 수 있었습니다.  6 시리즈에는 하키, 볼링, 테니스를 각각 2가지 모드로 총 6가지 게임이 내장(3x2)되어 있었고, 15 시리즈에는 여기에 6시리즈에 핑퐁 게임과 슈팅게임이 추가되어 총 15가지(7x2+1)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 게임 모드 설명서와 게임기 본체 중앙 레버들. 원하는 게임 모드에 맞게 조절해서 플레이 가능하다. ::

사실 6와 15 모델은 동일한 프로세서를 이용 했는데요, 닌텐도가 굳이 2가지 모델로 나눠서 출시한데에는 속 사정이 있었습니다. Color TV Game이 출시되기 2년전인 1975년에 이미 에폭(Epoch Co.)社가 일본 최초로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인 텔레비전 테니스(テレビテニス)를 출시한 상태였습니다. 가격은 19,500엔이었습니다. 후발주자 입장의 닌텐도가 선두주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제품을 출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판매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 에폭(Epoch)에서 출시한 일본 최초의 비디오 게임기, 텔레비전 테니스(テレビテニス) 마그나복스와 기술제휴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TV 화상에 스코어를 표현하는 기능이 없어서 점수판 다이얼이 기기 하단부에 달려 있다. ::

닌텐도는 6 모델은 9,800엔에, 15 모델은 15,000엔에 출시합니다. 10,000엔 미만의 게임기는 소비자들에게 심리적으로 구매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는데다 경쟁사의 제품의 반 값이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가격이 저렴한 6에 관심을 가지고 나면, 9개 모드를 더 즐길 수 있는 15 모델에 더 눈길이 가기 마련입니다. 닌텐도는 이런 소비자의 심리를 파악해서 2가지 모델로 판매하는 전략을 실행했고 소비자들은 5,000엔이나 더 비쌈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15 모델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제조업은 채산성을 높이며 이윤을 내는게 원칙입니다. 하지만 닌텐도는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채산성이 떨어지더라도 가격을 낮춰서 경쟁 업체과 가격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닌텐도의 이 판매 전략은 성공합니다.[각주:1] 6 모델과 15 모델 도합 100만대 가량 판매[각주:2]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에폭은 같은 해에 4인대전이 가능하고 사격게임도 즐길 수 있는 '시스템10'과 저가형 모델 'M2'를 잇달아 출시하지만 닌텐도 게임기가 워낙에 컴팩트하고 인기가 많아서 판세를 뒤집기 힘들었습니다.

:: Color TV Game 지면 광고 ::


:: Color TV Game TV 광고 ::

 

비디오 게임 회사 닌텐도(Nintendo)

Color TV Game은 6와 15모델 이후로도 1980년까지 Color TV Racing 112Color TV Game Block Breaker, Computer TV Game 등 출시했으며, 1978년도에는 아케이드용 Computer Othello를 출시하면서 아케이드 게임 사업에도 진출합니다. Color TV Game 의 성공으로 이제 닌텐도는 명실상부 비디오 게임 회사로 변신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첫번째 위기는 완구회사로, 두 번째 위기는 비디오 게임 회사로 변신하면서 극복한 셈입니다. 무엇보다 이 큰 변화에도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사업 정체성은 계속해서 지켜냈습니다. 이제 비디오 게임회사 닌텐도는 1980년에 뉴욕에 미국 지사(Nintendo of America)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나섭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 닌텐도의 아케이드 게임기 컴퓨터 오델로 (Computer Othello, 1978) ::

:: 한편, Color TV Game이 출시된 1977년에 한 젊은 공업디자이너가 닌텐도에 입사한다. 하지만 그가 활약하는건 몇 년 뒤의 일이다. ::

[참고 자료]

닌텐도 이야기 -김영환 저- <한국경제신문>
http://ajw.asahi.com/reliving_the_past/leaf/AJ2011110116049
http://blog.beforemario.com/


  1. 닌텐도는 이를 계기로 하드웨어 채산성이 떨어지더라도 소프트웨어로 이윤을 내는 판매 전략을 고수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비디오게임 산업의 정석이 된다. [본문으로]
  2. 6 모델은 약 30만대, 15모델은 70만대 정도로 추산. (위키 백과 기준)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lineni.com BlogIcon 리넨
    2012.06.28 18:01

    저는 몰랐던 시절의 이야기군요. :D 잘 읽었습니다.

  2. Favicon of http://archwin.net BlogIcon 아크몬드
    2012.08.03 09:06

    옛날 게임 이야기 재밌네요..

  3. Lee
    2012.10.22 20:31

    마야모토 시게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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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코이 군페이를 이야기 하지 않고 닌텐도의 역사를 논할 수 있을까? 그는 게임&와치부터 게임보이에 이르기까지 여러 게임기를 탄생시킨 디자이너이자 '요코이즘'으로 불리는 닌텐도의 DNA를 형성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진은 그의 평전.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울트라 핸드 (Ultra Hand)

전기 공학도생이던 요코이 군페이(横井軍平)는 1965년 닌텐도에 입사합니다. 입사 당시 그의 나이 24세, 닌텐도에서의 첫 업무는 기계 설비의 보수점검이었습니다. 평소 손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자기만의 장난감을 만들어서 만지작 거리는 취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야마우치 회장의 눈에 든 것도 그의 손재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업무 중에 장난감을 만지작 거리다 야마우치 회장에게 들키게 됩니다. 충분히 면책을 예상했겠지만 야마우치는 오히려 그의 비범한 손재주를 높이 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만든 장난감은 막대들을 격자로 이어 이음새 부분에 볼트로 조이고 끝 부분에 손잡이와 집게를 달아서 멀리 있는 것도 늘려서 집을 수 있는 재미난 도구였습니다. 야마우치는 회장은 시장성을 예견하고 바로 상품화를 지시하게 됩니다. 이 장난감은 1966년에 울트라 핸드(Ultra Hand)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고 폭풍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개당 800엔의 상대적인 고가품이었지만, 대중매체 광고가 나가면서 그해 크리스마스-연말 시즌까지 120만개의 판매량를 달성합니다. '오락(Entertainment)'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완구 업체로서 성공적인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 일본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울트라 핸드는 큰 인기를 얻는다. 사진은 잡지 광고와 제품 패키지 ::

닌텐도의 신 성장 동력원 '연구개발부'

울트라 핸드의 성공에 힘입어 야마우치 회장은 닌텐도에 연구개발부를 꾸려서 새로운 완구 사업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당시 총무부장이던 이마니시 히로시를 새 사업부의 수장으로 임명하고 요코이 군페이를 중축으로 장난감 개발을 시작합니다. 이 드림팀 사업부는 기대만큼 많은 히트 제품들을 만듭니다. 울트라 핸드가 출시된 이듬해인 1967년에는 울트라 머신(Ultra Machine)으로 실내 야구장을 가정용으로 옮겨서 어린이들이 집에서도 안전하게 배팅 놀이를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도에 출시된 울트라 시리즈의 세 번째 제품 울트라 스코프(Ultra Scope)는 1.2Kg에 이르는 무거운 무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아이들이 자기 키보다 높은 찬장 위나 골목의 담장 위를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 울트라 머신(Ultra Machine) ::


:: 울트라 스코프(Ultra Scope) ::

:: 닌텐도는 울트라 머신 (왼쪽)과 울트라 스코프로의 연이은 히트로 완벽하게 완구업체로 자리매김 한다. ::

닌텐도와 광선총 신드롬

울트라 시리즈를 선두로 러브 테스터(Love Tester)텐빌리온(Ten Billion)과 같은 장난감들을 연이어 출시하면서 완구회사로 발돋움한 닌텐도는 우에무라 마사유키(上村雅之)라는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면서 절정에 다다릅니다. 우에무라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쓰레기장에서 모은 부품을 뛰어난 손재주로 장난감을 만들어 놀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독학으로 산업대학에 들어가 전자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졸업 후 태양전지에 사용되는 감광 반도체를 제조하는 샤프(Sharp)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태양전지 영업을 위해 닌텐도 연구개발부를 찾아서 장난감에 전지를 사용할 것을 권합니다.

우에무라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재능을 알아본 요코이 군페이는 함께 닌텐도에서 장난감을 만들어보자고 입사를 권유하게 됩니다. 어릴적부터 장난감을 좋아했던 그는 닌텐도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여 입사했고 태양전지를 이용한 새로운 장난감 개발에 착수합니다.

:: 우에무라 마사유키(사진 왼쪽)는 닌텐도 엔지니어로 입사 후 광선총으로 히트시키고 훗날 패미콤(NES)을 만들게 된다. 사진은 닌텐도의 마리오 25주년 '이와타 사장이 묻는다' 인터뷰 장면 ::

그가 개발한 광선총(光線銃)은 울트라 핸드에 이어 완구회사 닌텐도의 상징이 된 제품입니다. 적외선 레이저를 발사하는 장난감 총에 과녁이나 표적이 되는 센서에 맞추면 총에 맞는듯한 굉음과 함께 시각적인 효과가 표현되었습니다. 광선총은 일반 총부터 라이플까지 그리고 스코어 과녁과 건맨(Gun Man), 사자(Lion)등의 표적 과녁 등 다양한 패키지로 출시되었고 2,000~4,000엔에 이르는 고가 제품이었지만 1970년대 초반에 100만대 이상 판매한 닌텐도의 대박 상품이 되었습니다.

광선총의 성공으로 닌텐도는 경영 실적도 상승하면서 그당시 오사카 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되었고 주가도 급등하게 됩니다. 하지만 광선총이 일본 전역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코이 군페이는 그 당시 일본에서 스키트 사격장 붐이 일어나던 것을 광선총 제품과 응용해서 좀 더 대중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실내 사격장을 고안하게 됩니다.

:: 광선총 GunMan과 Lion 세트. 표적에는 레이저에 반응하는 작은 센서가 있다 ::

때마침 일본에 붐을 일던 볼링 거품이 빠지면서 볼링장이 하나 둘 씩 문을 닫던 시기였습니다. 야마우치 회장은 볼링장 레인 끝을 센서와 전광판 스코어로 개조해서 광선총 사격장으로 활용하는 사업 수완을 발휘합니다. 그렇게 1973년에 닌텐도의 광선총 장난감을 이용한 실내 사격장이 개장하면서 세간에 주목을 받게 되었고 볼링처럼 여럿이 함께 즐기는 대전 게임 요소를 갖추던 이 사격장은 심야까지 즐길 수 있는 오락시설로 인기몰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영상투사기법을 활용해서 스크린으로 반응하는 아케이드 게임 와일드 건맨(Wild Gunman)을 출시했고 광선총으로는 최초의 수출 제품이 되었습니다.


:: 와일드 건맨(Wild Gunman)은 화면의 적이 총을 쏘기 직전에 재빠르게 쏴서 맞춰야 이긴다. ::

다시 찾아온 위기, 오일 쇼크 (Oil Shock)

울트라 핸드와 광선총의 성공으로 완구회사로 승승장구 해나가던 중 1973년에 전 세계적으로 오일 쇼크(Oil Shock)가 터지면서 닌텐도에게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쳐옵니다. 불황이 오면 가장 먼저 지갑문을 닫는 분야가 바로 오락(Entertainment) 산업군인 만큼 닌텐도에게 큰 타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광선총 사격장에 과감한 자본을 투입했던만큼 부채를 상환하기 힘겨워졌고, 곧바로 경영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다시 찾아온 이 총체적 난국을 닌텐도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닌텐도 이야기 -김영환 저- <한국경제신문>
http://blog.beforemario.com/


  1. 익명
    2012.08.08 18:59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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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당골패(Nintendo Playing Card Company)라는 사명에서도 미루어볼 수 있듯, 그당시 닌텐도는 카드 제조사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 정체성은 어떤 계기로 인해 흔들리고 만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카드 사업의 신성장 동력을 얻은 닌텐도

닌텐도의 3대 회장 야마우치 히로시는 취임 후 인사 문제를 해결하고 미국을 방문합니다. 당시 미국은 전후 일본에 대한 경제 회복 계획의 일환으로 일본 기업들을 미국으로 초청해서 여러가지 사업 프로그램들을 진행했습니다. 야마우치 회장도 당시 동종 업계인 세계 최대 카드 제조사 United States Playing Card Company(이하 US플레잉)를 찾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카드 회사가 남루한 2층 건물과 창고에서 카드를 제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는데요, 일본보다 더 큰 시장을 소유한 US플레잉 조차도 작은 규모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카드 제조사로서 닌텐도의 한계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을 겁니다. 야마우치는 닌텐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순 카드 제조에만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미국 방문 후 닌텐도는 카드 사업을 재정비 합니다. 카드 재질을 종이에서 세려된 플라스틱으로 코팅으로 마무리해서 대량생산 체재로 들어갔으며, 특히 1959년부터 '캐릭터 라이센싱' 이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해냅니다. 월트 디즈니(Walt Disney)와의 제휴로 다양한 캐릭터 카드 상품을 출시하게 되는데요, 이 사업은 대중매체 광고에 힘입어 큰 성공을 거둡니다.[각주:1] 특히 이 분야에서 라이센싱 방식의 컨버전스 비즈니스가 흔하지 않던 시절인만큼 야마우치의 뛰어난 사업 수완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 닌텐도가 디즈니 캐릭터 라이센싱으로 출시한 카드게임 '101 Dalmatians Marching Game' ::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닌텐도

1963년, 닌텐도는 오사카 증권거래소 2부에 상장 됩니다. 그리고 사명을 '닌텐도주식회사(任天堂株式会社)'로 변경하며 새출발 합니다. 새 사명은 카드 회사라는 기존의 이름을 넘어[각주:2] 새로운 분야의 사업을 확장-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닌텐도의 사업 확장은 결과적으로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시절을 맞이합니다. 새롭게 시도하는 사업마다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면서 창사 후 첫 위기를 겪게 됩니다.

닌텐도의 주식 상장 후 첫 사업은 '즉석 쌀밥' 이었습니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바로 밥이 되는 간편한 방식으로 당시엔 획기적인 사업 아이템이었지만 본질적인 '밥 맛'을 살리지 못해서 실패합니다. 두 번째는 당시 도쿄에서 성행하던 '러브호텔' 사업 이었습니다. 하지만 닌텐도가 있던 교토(京都) 지역의 전통과 보수적인 문화적 차이를 간파하지 못해 러브호텔 사업 역시 실패 합니다. 세 번째 사업 아이템은 '택시' 였습니다. 관광 산업이 발달한 교토에서 대중교통의 이용량이 많을거라 예상하고 시장성을 확신하게 되었죠. 택시 사업은 앞서 소개한 두 사업에 비해 잘 운영되었습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질 수록 경영하는데 힘에 부치기 시작합니다. 택시 기사들의 계속되는 임금 인상과 복지 혜택 요구, 그로 인한 노사간의 갈등, 추가적인 인력 관리 등에 부딪히면서 결과적으로 택시사업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닌텐도는 택시 사업의 실패를 통해 적은 인력으로 최대희 효율을 낼 수 있는 사업을 지향하게 됩니다.

:: 거듭되는 실패에도 카드 사업은 닌텐도를 뒷받쳐주고 있었다. 사진은 1965년에 출시한 그림책 트럼프. ::

본질을 되찾기 시작한 닌텐도

상장 후 3~4년간 닌텐도는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인해 경영 위기를 맞이합니다. 상장 당시 980엔이던 주가는 100엔 미만으로 곤두박질 쳤으며 야마우치 회장의 지도력에도 위기가 닥쳐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기존의 카드 사업은 계속해서 큰 수익을 내며 닌텐도를 뒷받쳐 주고 있었습니다. 늘 닌텐도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온 야마우치 회장은 화투와 카드 사업으로 제한하면 닌텐도는 더이상 성장할 수 없기에 다양한 사업에 도전한 것이지만 결국 닌텐도가 가장 잘 하는 분야는 역시 '카드' 였습니다.

화투와 트럼프 카드의 본질. 닌텐도가 해오던 사업은 결국 '엔터테인먼트'의 한 분야을 깨닫게 되면서 닌텐도의 정체성에 대한 힌트를 얻습니다. 닌텐도 제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인먼트(오락) 도구, 이것이 바로 닌텐도 사업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당시 설비 점검을 맡던 한 명의 엔지니어가 재미 삼아 만들어 놀던 '장난감'의 계기로 실마리를 찾게됩니다.

완구 회사 닌텐도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 완구회사 닌텐도의 시작, 울트라 핸드(Ultra Hand) ::

참고 자료

닌텐도 이야기 -김영환 저- <한국경제신문>
http://www.ebay.com/itm/280837453206
http://blog.beforemario.com/


  1. 디즈니 캐릭터 카드가 출시된 첫해애 약 60만개의 판매량을 달성한다. [본문으로]
  2. 기존의 사명인 '닌텐도골패'에서 골패(骨牌)는 카드(カルタ)의 의미가 담겨있다. [본문으로]
  1. 노크
    2012.05.21 11:59

    그 한명의 엔지니어가 바로 훗날 게임의 신이라고 불리게되는 미야모토 시게루 님이였죠 ㅎㅎ

  2. DBDB
    2012.05.30 11:30

    감질나는 부분에서 끝나버렸네요. 재밌게 읽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2.06.01 19:19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이야기 흐름상 감질나게 끝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
      조만간 다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겠습니다.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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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게임 기업 닌텐도가 120년간 업계를 선두할 수 있던 것은 '놀이 문화'에 대한 기업 이념과 비전을 관철해온 결과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우리나라 전 국민의 90% 이상이 한 번쯤 접해보고 즐긴다는 '고스톱'은 48장의 화투(花鬪)를 가지고 만든 게임입니다. 이 화투는 19세기 조선 말기에 일본 쓰시마섬의 상인들로부터 넘어와 우리 식으로 변형되었다고 전해지는데요,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 일본의 야마우치 후사지로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이 화투가 오늘날 게임 산업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닌텐도(Nintendo)의 시작입니다. 

화투의 탄생, 야마우치 후사지로

:: 화투를 만드는 야마우치 후사지로 ::

19세기말 일본 메이지 시대, 교토에 살던 야마우치 후사지로(山内房治郎)는 평소 그림을 잘 그리고 손재주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개화 후 일본에 서양 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오면서 트럼프 카드 게임을 처음 접한 그는, 조개 껍데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본 풍속과 결합해서 스스로 독창적인 카드를 만듭니다. 1년 12달을 상징하는 카드마다 4장씩 엮어서 총 48장으로 표현한 놀이용 카드를 그렸는데요, 각 달마다 스토리를 담아냈고 카드마다 등급과 점수를 다르게 매겨서 다양한 형태의 게임을 표현할 수 있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화투의 기원인, 하나후다(花札, hanafuda)입니다. 반은 재미 삼아 만든 이 화투로 사업의 가능성을 걸어본 야마우치는 본격적으로 상점을 열어서 자신이 만든 카드를 생산-판매하기 시작합니다. 메이지 22년(1889년) 9월 23일, 자신의 사업을 하늘에 맡긴다는 뜻으로 '닌텐도 곳파이<任天堂骨牌(임천당골패)>'로 지은 카드 상점이 이렇게 시작 됩니다.

닌텐도를 창업한 아마우지는 본격적으로 화투 생산에 들어갑니다. 카드 한 장에 종이를 여러 장 겹쳐서 손에 쥘 만큼 두껍게 압축하고 외곽선을 강조하기 위해 꽃잎으로 추출한 물감들을 사용해서 화려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들의 첫 수공업 제품인 화투 '대통령(大統領)' 은 당시 놀이 문화라는 개념이 모호했던 교토 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삼삼오오 모여서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이 화투의 가장 큰 장점 이었습니다. 야마우치는 닌텐도 배 화투대회를 열어서 교토 인근지역에서 주목을 받을만큼 비즈니스 수완을 발휘합니다.

:: 닌텐도의 화투 대통령(大統領)은 나폴레옹 이미지로 패키지 되어 있다. ::

화투가 시작부터 일본 전역에 인기몰이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업 초기엔 교토와 인근 지역에만 판매를 하는 정도로 작은 규모로 시작했지만 폭력조직 야쿠자들이 화투를 도박에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닌텐도의 사업은 그야말로 '대박'이 터집니다. 전국에 기하급수적으로 야쿠자들의 도박판이 만들어지면서 화투의 수요가 급증합니다. 화투는 무엇보다 소모품이었기 때문에 금방 종이가 찢어지거나 너덜너덜해져서 자주 교환해야 했습니다. 결국 닌텐도는 넘치는 주문량을 감당할 수 없어서 전문적으로 도제를 육성해서 대량생산 체재로 돌입합니다. 화투의 첫 성공에 이어 야마우치는 1902년,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의 트럼프 카드를 생산하게 됩니다. 기존의 트럼프들은 재질이 나빴지만 야마우치는 화투를 제작하던 노하우를 발휘해서 고품질의 트럼프를 함께 만들어서 판매합니다. 화투와 마찬가지로 트럼프 역시 도박판에서 많이 사용하던 상품이라 날개 돋친듯 팔려나가기 시작합니다.

화투와 트럼프 카드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닌텐도였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교토와 오사카 인근 지역에만 직영판매하다보니 전국적인 수요를 감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19세기 말은 현대와 다르게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쉽게 갖춰지지 않던 때였습니다. 이런 닌텐도의 고민거리는 일본담배소금공사(일본전매공사)와의 협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담배와 소금은 일본에서 국가가 운영하던 독점 산업이라 전국적인 유통과 판매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투나 트럼프는 담배 한 갑 크기를 지닌데다, 담배 외판의 주 거래 업소 중에 하나가 도박장이었던 점에서 닌텐도의 상품과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유통망까지 갖춘 닌텐도는 이렇게 승승장구 하며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 닌텐도의 화투와 카드 광고판 ::

수성의 닌텐도, 야마우치 세키료

1929년, 야마우치 후사지로의 데릴 사위인 야마우치 세키료(山內積良)가 닌텐도의 차기 대표로 취임합니다. 당시 후계자가 없던 후사지로는 자신의 딸을 통해 데릴 사위로 세키료를 맞아들이게 되었고, 2대 야마우치는 기업을 좀 더 큰 규모로 일궈냅니다. 1933년에 '합명회사 야마우치 닌텐도(合名会社山内任天堂)'로 새출발하며 철근 콘크리트로 사옥을 짓고 제품의 업그레이드를 단행합니다. 수공업적인 생산 시스템도 공장과 기계로 인한 대량생산 체제를 갖췄고 종래의 일본전매공사와의 협력으로 진행된 위탁 판매 체재만으로로는 판매에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닌텐도 스스로 유통망을 갖추기로 결심합니다. 1947년에 닌텐도는 자사만의 전문 유통회사인 '주식회사 마루후쿠(丸福)'를 별도로 설립해서 전국적으로 직영 판매를 확대합니다.

화투의 품질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다양한 종류의 제품이 나온 것도 2대 야마우치 때였습니다. 당시 종이를 여러 장 붙이던 수공업 형태로는 생산 속도와 비용 측면에서 모두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공장에 의한 대량 생산 체재를 갖추면서 종이 사이에 석회 가루를 넣어서 굳히고 앞뒤로 디자인을 더욱 세련되게 하는 등 제품의 질을 향상 시킵니다. 무엇보다 석회 가루를 넣는 제조 방법에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져왔는데요, 오늘날처럼 화투를 칠 떄마다 특유의 경쾌한 탁! 탁! 소리가 나게 되면서 게임을 즐기는 재미가 더해졌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치다 보면 안에 석회가 터져 나와서 빈번하게 재구입해야 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화투는 비싼 제품이 아니고 소모품으로 인식되어서 재구입에 대한 반감도 적었던 점이 닌텐도에게 큰 이익을 안겨줬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도박 산업이 더욱 커지면서 닌텐도의 화투와 트럼프의 인기는 도무지 식지 않았습니다.

:: 일본에서 최초로 트럼프를 생산한 곳도 닌텐도였다. ::

격변의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 야마우치 히로시 ::

닌텐도의 야마우치 가문에는 아들 복이 없던 걸까요? 1대 야마우치에게 아들이 없어 데릴 사위가 가업을 승계해야 했던 것처럼 2대 야마우치에게도 후사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장녀 야마우치 키미를 통해 데릴사위로 들여온 사카노조가 닌텐도의 상속자가 됩니다. 그리고 1927년, 사카노조의 아들 야마우치 히로시(山内溥)가 태어나면서 야마우치 가문에 아들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히로시가 5살 쯤 될 무렵 차기 대표로 내정된 사카노조가 돌연 가출해 버립니다. 그의 아내 키미는 이 일을 부끄럽게 여겨 사카노조와 이혼 절차를 밟게 되고 2대 야마우치의 어린 손자인 히로시가 닌텐도의 상속자가 됩니다. 아직 전문 경영인 개념이 없던 20세기초 세습 경영은 기업의 존폐문제였던 시절인 만큼 기업의 후사 문제는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2대 야마우치는 이런 내부적인 위기와 문제를 사전에 종식시키고자 어린 시절부터 히로시를 상속자로 지명하고 철저한 후계자 교육을 시킵니다. 1947년에 닌텐도가 주식회사 마루후쿠를 설립했을 때 어린 야마우치 히로시가 대표로 취임한 것도 후계자 승계의 일환이었습니다.히로시는 어린시절부터 외조부인 2대 야마우치로부터 기업 경영을 위한 교육 부터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늘상 외조부에게 고집스럽고 반항적인 모습으로 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느덧 성인이 된 히로시가 와세다 대학 법학과에 입학할 무렵 외조부 2대 야마우치가 갑작스런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히로시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닌텐도의 대표가 됩니다.

이제 겨우 약관의 히로시가 기업을 이끌어가기엔 반대파가 많았던 탓이었을까요? 1949년, 히로시는 외조부로부터 닌텐도의 경영권을 승계하는 조건으로 야마우치가의 친척들을 모두 퇴사시키고 반대파를 하나씩 제거해 나갑니다. 회사 경영에 있어 야마우치 일가 친인척들의 간섭과 반대가 심한대다 지난 60여년간 기업 내에 팽배해있던 연공서열제와 관료주의가 닌텐도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히로시는 취임 후 자신의 경영 방침에 걸림돌이 될 많은 중역들을 정리해고 시켰고 이런 구조조정 과정에서 100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어린 경영자를 따를 수 없다면서 파업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대대적인 물갈이 작업을 마친 야마우치 히로시는 1951년, 사명을 '임천당골패 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새로 매입한 부지에 지은 신사옥으로 이전해 새출발 합니다. 수십년간 화투와 트럼프만 만들던 닌텐도에게 약관의 젊은 대표로부터 새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 야마우치 히로시가 지휘하던 초기의 닌텐도는 다양한 사업을 시도하며 '정체성' 찾기에 나선다. ::

참고 자료

닌텐도 이야기 -김영환 저- <한국경제신문>
http://www.nintendo.co.jp/n09/hana-kabu_games/index.html
http://ja.wikipedia.org/wiki/%E5%B1%B1%E5%86%85%E6%BA%A5
http://www.nintendo.co.jp/corporate/history/index.html

 

  1. ss
    2012.05.09 00:14

    다음편은 언제쯤 나오나요??

  2. Favicon of http://blackli.tistory.com BlogIcon 흑광
    2012.09.27 11:55

    닌텐도의 역사 잘 봤습니다.

  3. Favicon of http://gamingpoint.org/2013/03/top-10-best-snes-games/ BlogIcon Top 10 SNES Games
    2013.03.23 19:31

    닌텐도 역사의 좋은 요약입니다. 나는 아직도 유럽 사람보다 일본어 게임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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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모노폴리'와 함께 보드게임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생게임(The Game of Life)은 1860년 밀튼 브레들리(Milton Bradley)라는 한 석판인쇄공으로 부터 만들어진다. 그후로 100여년이 지나고, 그의 이름으로 설립된 회사는 최초로 LCD 디스플레이를 채택한 휴대용게임기를 출시하게 된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 Milton Bradley (1836~1911) ::

때는 19세기의 미국, 1860년에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된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한창 미전역에 선거 유세를 펼치던 시절입니다. 그 당시 밀튼 브레들리(Milton Bradley)라는 석판 인쇄공은 링컨 후보의 초상화를 인쇄해서 판매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인쇄를 모두 마치고 판매를 시작했을 때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선거 유세중이던 링컨이 어느날 한 소녀로부터 받은 편지로 인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턱수염을 기르기 전의 맨 얼굴로 인쇄를 모두 마친 브래들리의 그림은 더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브레들리의 판화 인쇄물을 보면서 링컨이 아니라며 사기꾼으로 몰고갈 정도였으니 당시 링컨의 턱수염이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을지 짐작해볼 수 있을겁니다. 결국 브레들리는 자신이 찍어낸 링컨의 판화 그림 인쇄물들을 전부 소각해야만 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불운으로 첫 사업에 실패했지만, 브레들리는 곧바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모색하게 됩니다. 때마침 친구로부터 보드게임의 아이디어를 얻은 그는, 자신의 뛰어난 제도 기술을 잘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보드게임을 출시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날 보드게임의 선구자로 불리는 인생게임의 최초작 'The Checkered Game of Life' 입니다. 이 게임을 한 번이라도 즐겨보신 분은 잘 알겠지만 게임을 통해 '진실한 삶'과 '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훌륭한 게임성을 갖췄습니다. 인생게임은 결과적으로 미전역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곧바로 브레들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됩니다. 그 뒤, 이 창업자의 이름으로 세워진 밀튼 브레들리 기업(Milton Bradley Company)은 1984년 하스브로(Hasbro)에 인수된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보드게임부터 전자 게임 업계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교환식 카트리지와 LCD 스크린을 채택한 마이크로비전(Microvision)

1979년, 보드게임에만 집중해온 밀튼 브레들리도 전자게임 시장이 활성화 되면서 휴대용 게임 사업에 착수합니다. 그들의 첫 작품 마이크로비전(Microvision)은 휴대용 게임기 역사에 큰 이정표를 제시한 제품이었습니다. 휴대용 게임기 최초로 LCD 액정을 사용하고, 그 당시 비디오 게임 업계에 유행하던 교환식 게임 카트리지 시스템을 채택합니다.

마이크로비전은 엔지니어 Jay Smith[각주:1]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16x16 픽셀의 LCD 액정이 채택되었습니다. 컨트롤러는 패들과 여러개의 버튼들이며 카트리지마다 버튼이 부착되어 있어서 제각각 다른 기능을 하는 점이 특이사항입니다. 이 게임기는 초반에 Intel 8021과 TMS1100 프로세서를 동시에 채택했지만 비용과 전력소모 및 과열 문제[각주:2]로 인해 나중엔 TMS1100만 단독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이크로비전은 처녀작 답게 문제점이 많았습니다. 스크린이 쉽게 부패되는가하면 심각한 방전 문제가 발생했으며, 컨트롤러가 포함된 게임 카트리지가 게임기와 접촉하면서 버튼부가 쉽게 망가지는 등 여러 결함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으며, 1982년까지 꾸준하게 생산되며 사랑받아온 제품으로 오늘날 화자되고 있습니다.


VFD 휴대용 게임기의 영원한 베스트셀러, 토미 팩맨 (Tomy Pac Man)

1970~80년대에는 VFD(진공 형광 디스플레이) 액정으로 다양한 제품이 만들어지던 시기였던만큼, 휴대용 게임기도 하나 둘 씩 출시되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스플레이 표현력이 더 뛰어나고 전력소모가 적은 LCD에게 자리를 빼앗기지만, 게임을 구현하기가 더 쉽고 외부 온도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각주:3] 튼튼한 장점덕에 널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휴대용 게임기와 장난감을 만들던 완구회사 토미(TOMY)는 1980년에 아케이드용으로 출시되어 일본부터 미 전역에 인기몰이중이던 남코(Namco)팩맨(Pac Man)을 정식 라이센스를 얻어서 VFD 액정을 채택한 휴대용 게임기 팩맨(Pac Man)을 출시합니다.

게임기 디자인 부터가 워낙에 개성적이고 노란색 팩맨의 이미지와 딱 맞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남는 VFD 휴대용 게임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게임 자체는 허술한 점이 많았습니다. 액정이 심하게 깜빡거렸으며, 팩맨의 입이 왼쪽에만 달려 있어서 먹이를 먹으려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해야만 하는 시스템적인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내에서도 영실업이 정식 수입되어 판매했기 때문에 80년대 초중반에 많은 이들이 접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반다이와 코카콜라의 만남, Catch a Coke

1980년대에 이르러 게임 시장이 활성화 되면서 다양한 프로모션 제품이 출시됩니다, 1982년에 반다이가 코카콜라와의 제휴로 제작한 휴대용 코카콜라 게임기 Catch a Coke가 바로 그 예입니다. 완구 회사인 반다이도 당시 트랜드에 발 맞춰 휴대용 전자 게임기 사업에 뛰어들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게임기는 시중에 판매되지 않았고, 코카롤라에서 프로모션용으로만 고객들에게 증정되었습니다. 게임은 좌우 버튼으로 이동하면서 코카콜라 캔을 받아서 스코어를 얻는 단순한 미니 게임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반다이가 손목 시계 게임기로로 출시한 Monkey Business와 동일한 게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개념 휴대용 게임기, 넬소닉(Nelsonic)의 게임워치(Game Watch)

1980년대 초에 이르러 LCD가 보급화되면서 디지털 시계도 부흥하게 됩니다. 넬소닉(Nelsonic)은 그당시 시계 제조 업체였던 M.Z. Berger를 인수하자마자 자사의 완구 사업 아이템과 결합하여 아동층부터 젊은 층을 대상으로한 완구용 손목시계 사업을 시작합니다. 인기있던 바비인형 등의 캐릭터들을 삽입해서 아동층과 젊은 세대에게 큰 인기를 얻습니다.
 
넬소닉은 곧 이어 휴대용 게임 기능을 탑재한 신개념 손목시계 게임 워치(Game Watch)를 완성합니다. 넬소닉의 게임 워치 사업 모델이 탁월했던 것은 그 당시 인기있던 아케이드 게임 제작사와의 라이센스 계약을 채결해서 팩맨, Q*Bert, 등의 유명 게임을 축소판으로 손목시계에 담아낸 점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아타리가 게임기와 게임 개발사와의 써드파티(Third-Party) 개념을 완성시켜 게임들을 유통한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결국 게임 워치는 큰 성공을 이루이었고, 10년 넘게 장수하며 30여종 이상의 유명 게임들의 라이센스를 얻어 출시하면서 폭넓은 인기를 얻게 됩니다.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격변기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휴대용 게임시장은 대격변기를 거치게 됩니다. 이외에도 열거되지 않은 콜레코(Coleceo), 엔텍스(Entex), 밤비노(Bambino), 파커 브라더스(Parker Brothers), 타이거(Tiger) 등 많은 전자&완구 회사들이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 참여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시장에는 많은 기업들이 경쟁을 벌일지라도 늘 시장을 선도하는 1위 기업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격변기의 휴대용 게임기 시장은 곧 일본의 한 완구 회사에 의해 평정됩니다. 3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휴대용 게임을 비롯해서 비디오 게임 시장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들 중 하나로 인정받는 이들이 전자 게임 산업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문헌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www.handheldmuseum.com
http://thebiggamehunter.com/company-histories/milton-bradley/
http://en.wikipedia.org/wiki/Milton_Bradley


  1. Jay Smith는 몇년 뒤에, 비디오게임기 Vectrex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2. Intel 8021 프로세서는 9V 배터리 2개가 필요했지만, TMS1100은 절반인 1개만 필요했다. Intel 8021 칩은 전력소모가 많은 만큼 많은 열을 발생시켜서 과열 문제로 하드웨어 자체에도 큰 무리를 주게 되었다. [본문으로]
  3. LCD는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액정이 쉽게 망가지는 단점이 있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archvista.net BlogIcon 아크몬드
    2012.04.08 02:34

    재밌게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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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80년대에 이르러 인형/완구류 업체들은 하나 둘 씩 전자 게임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바비인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있던 마텔(Mattel) 역시 전자게임 시장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최초로 휴대용 게임 시장을 열었다. ::

 
 
 
마그나복스와 아타리가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시장을 열면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을 때, 휴대용 게임 시장 역시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아케이드 게임기를 보면서 집에서도 즐기고 싶던 욕구가 가정용 비디오 게임으로 이어졌다면, 다음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즐기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럽게 휴대용 전자 게임기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휴대용 게임기의 기원을 탐색하면서 의외였던 것은, 예상 외로 그 시기를 1950~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던 점입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잠망경 시뮬레이션 게임기 Electronic - Firing Range 이며, 두 번째는 삼목 게임기 Electro Tic-Tac-Toe 입니다.
 
 

 

Cragstan's Electronic Periscope - Firing Range (1960's)


1950-60년대 전후 미국 점령하의 일본에서는 양철 재료로 제조된 틴토이(일명 깡통로봇) 산업이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주개발 경쟁이 심화되었고, 어린이들에게는 우주를 소재로 하는 장난감이 큰 인기를 끌었죠. 지금부터 소개할 크랙스턴(Cragstan)사도 주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완구류 등을 미국에 수입해서 OEM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건전지를 넣고 자동으로 움직이며 총을 쏘는 틴토이 우주비행사(ASTRONAUT)로 인기몰이 중이었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이 회사는 휴대용 게임기의 기원이라고 불릴만한 장난감을 출시하게 되는데요, 잠수함에서 잠망경으로 적을 탐색하고 공격하는 컨셉의 잠망경 장난감 'Firing Range' 입니다. 이 장난감은 건전지를 전원으로 사용하며, 시작 버튼과 무기 발사 버튼이 양쪽에 달려 있었습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필름스트립 형태로 부착 되어있는 움직이는 화상에 빛이 들어오면서 배가 출현하고, 발사 버튼을 누르면 무기 효과음이 나오는 아주 단순한 형태의 장난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기는 스코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디스플레이가 필름이다보니 어떤 시각적인 효과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전자 게임기라고 볼 수 없겠지만, 베터리를 전원으로 사용하고 테이블 위에 삼각대를 놓고 양쪽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디스플레이를 잠망경으로 보듯이 즐길 수 있는 컨셉만으로도 게임의 경험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휴대용 게임기의 기원으로 불릴 만한 것 같습니다.
 

  

Waco's Electro Tic-Tac-Toe (1972)

 
시간이 흘러 1972년, 미국의 장난감 재조사인 WACO에서 전자 게임기를 출시하게 됩니다. Electro Tic-Tac-Toe는 두 명의 플레이어가 녹색과 빨간색 레버를 바꿔가며 게임기에 부착된 9개의 버튼을 순서대로 누르면 해당 불빛이 들어오면서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게임이 끝나는 신호가 없기 때문에 수동으로 CLEAN 레버를 내려야 불이 꺼지고 다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이 게임기는 전자식 보다는 기계식[각주:1]에 가까운 게임기였습니다.

위 두 게임기는 아직 디스플레이 부분에서 전자 게임기의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초창기의 휴대용 전자 게임기는 주로 LED나 VFD(진공 형광 디스플레이), 또는 LCD를 사용한 디스플레이어와 컨틀롤러가 같이 붙어있는 하나의 게임기에 하나의 게임만 내장된 형태[각주:2]였으며, 손으로 들고 다니는 게 가능할 정도로 작거나, 테이블 위에 놓고 즐길 수 있는 정도의 크기까지 포함되었습니다. WACO의 삼목 게임기가 출시되고 4년 후인 1976년에 이르러, 드디어 최초의 전자식 휴대용 게임기가 탄생하게 됩니다.
 
 

 

바비인형의 마텔(Mattel), 휴대용 전자 게임시장을 열다.

 
마텔(Mattel)사는 인형의 집과 바비 인형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던 완구 회사입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마그나복스와 아타리가 가정용 비디오 게임 시장을 열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곧바로 가정용 비디오 게임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들은 휴대용(handheld) 게임기라는 또 다른 분야의 시장을 찾아 사업 가능성을 확신하면서 마텔전자(Mattel Electronics)를 출범하게 됩니다.
  
마텔이 최초로 만든 휴대용 게임기는 Missile Attack 이었습니다. LED 디스플레이를 채택해서 계기판에 삽입된 다수의 LED 조명이 들어오면, 레버와 버튼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전자 게임의 조건을 모두 갖췄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기는 미사일로 공격한다는 게임 컨셉 때문에 시장에 출시하지 못한 채 곧바로 단종시켜야 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소련과의 냉전(Cold War)으로 사회적인 긴장감이 팽배하던 시기라 전쟁을 상징하는 게임 컨셉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게임기 내에 디스플레이 밑면에 그려져있는 도시 그림은 사실상 뉴욕시의 외관과 비슷했기 때문에 NBC에서는 CF 방송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마텔은 곧바로 게임의 방향성을 전환했습니다. 첫번째 실패가 좋은 경험이 되었을까요? 두 번째는 건전한 스포츠로 게임 소재를 전환했습니다. 그렇게 레이싱 게임기 Auto Race(1976)가 탄생했습니다. 이 게임기는 4개의 기어를 변속하면서 속도를 높이거나 줄일 수 있고, 게임이 시작되면 숫자 카운트가 올라가면서 디스플레이에 있는 각종 장애물을 피하면서 최대한 부딪히지 않고 오랫동안 주행해야 하는 게임입니다. 게다가 오른쪽의 핸들로(휠이 아니라 레버 형태지만) 차선 변경이 가능했습니다.
  
 
이듬해에 출시된 Football(1977)은 미국내 NFL(미식축구)의 인기와 함께 마텔에게 큰 성공을 안겨줍니다. Football은 출시 된 첫 해에 시어스를 통해 판매되었지만, 제품의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한 첫해에는 10만개 미만으로 생산되었고 반년 넘게 생산이 중단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의 인기가 미전역을 뒤흔들면서 시어스가 자기들의 판단이 틀렸음을 알게되면서 1978년에 재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재생산된 1978년 2월 중순, 한 주에 50만대를 판매하는 진기록을 달성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Football의 성공에 힘 입은 마텔은 이후로 야구, 농구 등 다양한 스포츠 게임을 잇달아 출시하게 되었고 널리 사랑받게 됩니다.
  

:: 2000년 12월, 홀리데이 시즌을 맞아 마텔은 23년 만에 Football과 Baseball을 재출시하기도 했다. ::

 
Football을 통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마텔은 휴대용 전자 게임 시장을 연 선구자로서 게임 시장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었고 이어서 비디오 게임 시장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당시, 마텔에서 마케팅 디렉터로 있던 마이클 카츠(Michael Katz)[각주:3]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우리의 큰 성공은 첫 휴대용 게임기 아이디어를 개념화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디자인 그룹에 계산기 크기 만한 전자 게임기의 구상을 요청했죠.[각주:4]" - 마이클 카츠
 
마텔의 혁신으로인해 수많은 완구류 업체들도 휴대용 게임기 시장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제 휴대용 게임기 산업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면서 4억달러 규모로 전환 되었고, 마텔을 시작으로 콜레코(Coleco), 엔텍스(Entex), 반다이(Bandai), 토미(Tomy) 파커 브라더스(Parker Brothers), 넬소닉(Nelsonic) 등 많은 업체들이 시장에 참여합니다.
 
 
  
  
  
  
참고문헌
  
The Ultimate History of Video Games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www.handheldmuseum.com/
http://en.wikipedia.org/wiki/Handheld_game_console#cite_note-ultimate_history-13
 


  1. 버튼에 들어오는 불빛은 LED 가 아니라, 각 초록색과 빨간색 타일에 전구 불빛을 비추는 형태였다. [본문으로]
  2. 이 형태는 1980년대 말에 닌텐도가 카트리지 형태의 게임보이(Game Boy)를 출시하기 까지 유지된다. [본문으로]
  3. 마이클 카츠는 마텔과 콜레코를 거쳐 세가(Sega of America) 미국 지사의 수장을 맡게된다. [본문으로]
  4. Kent, Steven (2001). The Ultimate History of Video Games. Prima Publishing. p. 2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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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 위치한 트리니티 대학은 모교에 350만달러를 기증한 졸업생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종교-사회 분야의 연구 센터를 그의 이름으로 변경해서 기념한다. 그 주인공 레오나드 그린버그(Leonard E. Greenburg)는 가죽 공구사에서 전자 게임회사로 거듭난 콜레코(Coleco Industry Inc.)에서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연 기업인이자 박애주의자로 오늘날까지 사회 공익활동에 기여하고 있다. ::

 
  
 
 
1932년. 러시아 이민자 출신의 유태인 모리스 그린버그(Maurice Greenberg)는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Connecticut Leather Company(코네티컷 가죽회사)를 설립합니다. 이 회사는 초기에 구두 수선에 필요한 용품을 제작해서 구두 공방이나 가게에 납품하는 사업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몇년 뒤에 그린버그 사장의 아들 레오나드 그린버그(Leonard Greenberg)가 다양한 가죽 공구 제품들을 만들기 시작하는데요, 그중에 모카신 키트는 아주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회사는 50년대에 이르러서 플라스틱 재질의 완구류 사업을 확장하게 됩니다. 특히 유아용 소형 풀장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1962년, 코네티컷 가죽회사는 자사의 가죽 용품 사업 지분을 매각하고 콜레코(Coleco Industries Inc.)라는 사명으로 변경합니다. 그 무렵, 그린버그의 또 다른 아들 아놀드 그린버그(Arnold Greenburg)는 재직중이던 법무사 사무소를 나와 콜레코의 경영 일선에 참여[각주:1]하게 되면서 콜레코의 완구류 사업은 크게 성장합니다. 이듬해인 1968년, 콜레코 테이블용 하키 게임을 만들던 캐나다의 완구 회사 Eagle Toys를 인수해서 '콜레코 케나다'로 사업을 확장합니다.
 
 

:: 그린버그 부자와 초창기 Connecticut Leather Company 건물 모습. 우측사진은 1971년 5월 25일, 뉴욕증권거래소 상장후 첫번째 주식 거래 기념 사진 ::


콜레코는 창업주와 그의 두 아들, 그린버그 부자들의 삼두정치로 운영 되었습니다. 아버지 모리스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사업을 추진해나가는 리더십을, 레오나드는 제조와 엔지니어링에 재능을, 그리고 아놀드는 재무와 마케팅에 뛰어난 성과를 발휘하면서 회사는 성장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콜레코는 1971년에는 NYSE(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고, 포츈 500 기업에 선정되며 승승장구 했고 이후 1976년,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텔스타(Telstar)를 출시하면서 전자 게임 산업에 진출합니다.
 
  

텔스타(Telstar)로 전자 게임 산업에 출사표를 던진 콜레코

 
콜레코가 게임 사업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단순했습니다. 자사의 제품들이 너무 봄-여름 시즌에 치중되어 있다보니 콜레코 공장의 제조 라인이 1년간 잘 가동되어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야외 활동이 줄어드는 늦가을-겨울 시즌에도 판매할 제품이 필요했습니다. 그당시 아놀드 그린버그는 텔스타를 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동기를 밝힙니다.
  
"우리는 공장 운영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적합한 제품을 반드시 찾아야만 했습니다. 이당시 전자 게임 사업만큼 매력적이고 콜레코와 잘 어울리는 비즈니스는 없었죠.[각주:2]"
 

:: 텔스타는 초기버전과 가격을 낮춘 클래식 버전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첫 해에 100만대 이상의 판매량은 달성한다. ::

 
텔스타는 최초로 GI(General Instruments)AY-3-8500 싱글칩을 이용한[각주:3] 게임기로, 테니스, 하키, 핸드볼 3가지 게임이 내장되어 있었습니다. GI의 칩을 이용하게 된 계기는 당시 콜레코의 수석 전자 디자이너인 에릭 브롬리(Eric Bromley)는 그린버그의 지시대로 제작단가를 $100 아래로 낮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합니다. GI의 프로세서는 기판 당 $8~10에 이르는 가격면에서 큰 매리트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텔스타는 초기 모델을 $69.95에, 같은 해에 출시한 텔스타 클래식(Telstar Classic)은 $50에 판매하면서 가격경쟁력을 얻는데 성공했고, 내장된 세 게임마다 3단계의 레벨(Level)이 존재하는 차별성을 둬 소비자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콜레코는 그해 텔스타를 100만대 이상 판매하면서 마그나복스와 아타리가 주름잡던 가정용 비디오게임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했습니다.
 
  
 
텔스타 개발에 대한 재미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요, 최초의 가정용 비디오 게임 오디세이를 만든 랄프 베어(Ralph H. Baer)의 협력을 통해 완성했다는 점입니다. 출시 초기에 콜레코는 텔스타 시제품의 FCC(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미국 연방 통신 위원회)의 RFI(Radio Frequency Interference: 고주파 잡음 방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마침 아놀드 그린버그는 오디세이를 만든 랄프 베어를 기억했고, 그가 소속되어있는 Sanders Association 연구실로 협력을 요청해서 텔스타 RFI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하게 됩니다.
 
더욱이 이듬해인 1977년, 콜레코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임기로 알려져 있는 텔스타 아케이드(Telstar Arcade) 역시 랄프 베어가 Sanders에서 유능한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을 모아 팀을 결성해 특이한 삼각형 모양의 기판을 디자인하는데 기술적으로 큰 도움을 줍니다.[각주:4] 텔스타 아케이드는 퐁 페달, 슈팅건, 레이싱 휠의 3가지 모드의 컨트롤러를 3면에 하나씩 갖췄고 4개의 게임 카트리지를 $25에 별도로 판매[각주:5] 했습니다. 삼각형 모양의 게임 카트리지는 은색의 알루미늄 재질로 외관을 코팅했는데요, 에릭 브롬리의 설명에 의하면 발열과 RFI(고주파 잡응 방해) 때문에 카트리지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한 결과였다고 합니다.
 

:: 참신한 게임기로 알려진 텔스타 아케이드(Telstar Arcade)는 게임 카트리지와 하드웨어가 모두 삼각형 모양이다. ::


콜레코의 계속되는 도전, 휴대용 게임기 일렉트로닉 쿼터백(Electronic Quarterback)


콜레코는 창사 이래 텔스타로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지난 30여년간 늘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하지만 위기 때마다 즉각적인 회복으로 회사를 유지해왔습니다. 1977년 Mattel이 휴대용 미식축구 게임기 Mattel's Football을 출시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아놀드는 마텔의 풋볼 게임에서 휴대용 게임기 사업의 큰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듬해에 콜레코는 마텔의 제품보다 더 기능적으로 향상된 휴대용 미식축구 게임기 일렉트로닉 쿼터백(Electronic Quarterback)을 출시하게 됩니다.
  

:: 콜레코는 비디오게임 성공적인 진출에 이어, 휴대용 미식축구 게임기 시장에도 진출하게 된다. 좌측은 마텔의 미식축구 게임 ::


콜레코는 마텔을 쫓는 후발주자였지만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밝은 미래를 확신한 아놀드의 마케팅 감각이 빛을 발휘하게 됩니다. 일렉트로닉 쿼터백의 TV 광고를 마텔 제품과 콜레코 제품의 인형옷을 입은 두 배우가 자신의 제품이 더 뛰어남을 강조하며 경쟁하는 내용으로 구성하면서 출시 초반부터 '마텔의 풋볼 게임의 경쟁자 = 콜레코 일렌트로닉 쿼터백'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CF는 향후 인텔리비전 vs. 아타리 2600 경쟁구도의 CF보다 몇년 더 앞선 게임업계 최초의 경쟁형태의 광고로 의미가 깊습니다. CF 광고에 힘입어 인기몰이에 성공한 콜레코는 일렉트로닉 쿼터백을 300만대 이상 판매하면서 휴대용 게임 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또한 Sears사에 라이센스 계약를 체결해서 로열티를 받는 등 다방면에서 판매 전략을 확대합니다.
 


이제 게임 시장은 아케이드 및 가정형 비디오게임을 시작으로 휴대용 게임에 이르기까지 분야가 다양해지고 많은 업체들이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사업에 뒤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 기술의 발전과 함께 게임 산업도 더욱 풍성해지게 됩니다.




참고 문헌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www.trincoll.edu/Academics/centers/GreenbergCenter/Pages/LGreenberg.aspx
http://www.pong-story.com/coleco_telstar.htm
http://www.colecovisionzone.com/page/coleco%20industries/coleco%20history.html
http://en.wikipedia.org/wiki/Coleco_Telstar
http://www.gooddealgames.com/articles/Home%20Video%20Game%20History.html
http://www.handheldmuseum.com/Coleco/EQB.htm
 

  1. 훗날 아놀드는 콜레코의 대표이사로 취임하게 된다. [본문으로]
  2.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p.32) [본문으로]
  3. http://en.wikipedia.org/wiki/AY-3-8500 [본문으로]
  4. 랄프 베어와 콜레코의 관계에 대해서는 데이비트 윈터가 제공한 랄프 베어의 편지에 수록되어 있다. http://www.pong-story.com/coleco_telstar.htm [본문으로]
  5. 텔스타 아케이드에는 1번부터 4번까지 4개의 카트리지가 존재했는데, 카트리지 마다 3개의 게임이 내장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onionmixer.net BlogIcon onion
    2012.01.09 13:46

    에헤헤.. 좋은글 잘봤습니다.
    역시 revolution은... 예측조차 되지 않는곳에서 일어나는거군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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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9가지 전자 제품 중에 하나로 아케이드 버전 퐁(PONG)의 프로토타입 모델을 꼽았다. 사실 그는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아타리에서 잠깐 일하면서 불후의 명작 벽돌깨기(Breakout) 게임을 완성시킨 장본인이었다. (사진 출처 - Gizmodo) ::

  
  
단골손님 한 명이 스크린 안에 공이 진공 상태에 있는 듯한 모습의 PONG(퐁) 게임기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한 친구가 그에게 플레이를 권하자 그 둘은 기계앞에 섰다. 설명서에는 '높은 점수를 얻으려면 공을 놓치지 마세요.'라는 안내가 적혀있었다. 동전을 넣고 기계에서 경적이 울리며 게임이 시작 되자 그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스크린에 있는 공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만 숨죽여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스크린 상단의 스코어가 변했다. 3-3. 첫 번째 플레이어는 손잡이를 돌려보기로 한다. 화면 안의 페들이 스크린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스코어는 5-4. 그의 의도 대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스크린 끝으로 공을 튕기며 나는 PONG의 효과음이 바 안에 울려퍼지며 아름다운 잔향을 남기고 있었다. 점수차는 6-4로 조금 벌어지고 8-4의 더블스코어가 되자 그제서야 두 번째 플레이어는 어떻게 게임을 해야하는지 겨우 눈치챈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게임은 끝나가고 있었으니, 그들의 첫번째 대전은 11-5로 종료되었다.
 
 
  
이미 7 쿼터가 지났지만, 그들은 지치는 기색 없이 게임을 이어갔다. 가게 안에 계속해서 울려퍼지는 PONG의 효과음이 가게의 다른 손님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킬 만큼 매력적이었다. PONG이 가게에 들어온 첫 날, 영업시간이 종료될 때까지 가게 안의 모든 손님들이 게임을 즐겼다. 다음날 아침 10시. 많은 손님들이 PONG을 하기 위해 Andy Capps앞에 줄지어 모여들었다. 영업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흘러 밤10시가 되자 불현듯 기계 멈춰버렸다. 동전이 통 안에 꽉 차서 작동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한 것. 동전통을 비우고 나서야 다시 기계가 돌아갔다.
 
Scott Cohen이 쓴 아타리의 역사에 관한 책, 'Zap: The Rise and Fall of Atari'를 살펴보면 1972년 PONG(퐁)을 처음만난 미국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위 글은 미국의 Andy Capp's Cavern 이라는 핀볼바(Bar)에서 PONG의 프로토타입이 최초로 설치되었을 때의 내용을 일부 발췌했습니다. 프로토타입을 통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아타리는 2개의 검은색 손잡이 다이얼이 달린 노란색 캐비넷 모양의 PONG을 미국 전역에 출시했고 전국적으로 엄청난 신드롬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시 핀볼게임기계의 경우 1주일에 $40 이상의 수익을 올리면 많이 번다고 할 수 있었는데 PONG은 1주일에 $200 이상을 벌게 해주면서 너도 나도 PONG을 구입해서 영업소에 들여놓기 시작합니다.
  

:: PONG의 프로토타입 모델 ::

PONG이 출시된 후 펼쳐진 미국 거리의 풍경은 오늘날 '신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PONG이 설치된 가게, 주점, 음식점들마다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동전통이 금방 차버려서 하루에도 여러번 동전통을 비워줘야 했으며, 아타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기계가 고장난 줄로 착각한 업주들들로부터 하루에도 수차례 항의 전화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하루에도 매일같이 은행에 수많은 동전을 들고 찾아가는 업주들 때문에 은행이 동전을 교환하느라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집니다. 다소 과장이 섞여 있을지 모르지만 PONG의 인기는 그만큼 대단했습니다.
  
  

:: PONG을 만든 앨런 알콘(Al Alcorn)과 여러 버전의 기판들 ::

PONG의 개발을 전담한 앨런 알콘은 7400버전의 TTL IC(직접회로)들을 이용해 기판을 만들었는데요, 그는 칩 하나 당 평균 25~50센트에 이르는 다양한 가격의 IC를 75개 가량 조합해서 기판을 완성합니다. 그는 기판의 오작동률을 1~2%로 떨어질 때까지 고장률을 낮추고, 놀란 부쉬넬이 컴퓨터 스페이스를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제작 단가를 낮추는데 집중했습니다.
  
PONG의 개발 비화 중에 가장 재밌는 부분은 바로 '효과음' 입니다. 비디오게임에서 음향 및 사운드가 주는 중요한 위치를 처음으로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됩니다.(마그나복스 오디세이는 효과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PONG을 즐기면서 페들이 공을 튕겼을 때 나는 효과음에 가장 먼저 매료되었는데, 놀란 부쉬넬이 앨런 알콘에게 이 부분에 주변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하면서 진짜 공을 치는 듯한 좋아지는 효과음을 특별히 주문하게 됩니다. 일설에 또 다른 창업자인 테드 데브니(Ted Dabney)는 '피우~[Boo]'나 '쉿[Hiss]' 소리 느낌이 나는 효과음을 넣고 싶었다고 합니다. =)
  
하지만 앨런이 훗날 고백하기를 놀란 부쉬넬이 사운드 효과를 요구할 시점에 이미 예산을 초과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또 부품을 구입해 추가할 수 없었떤 그는 어쩔 수 없이 완성된 기판을 다시 분해해서 사운드톤을 가지고 있는 회로를 찾아 되집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PONG 비디오게임 산업 최초로 아타리와 마그나복스의 법정공방이 이루어졌다. ::

게임 산업 최초의 법정 공방

 
한편, PONG이 출시된 지 2주 후, 마그나복스는 PONG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고 자사가 만든 컨트롤러와 게임 형태에 대한 특허 사용권을 지불하지 않고 출시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974년에는 아타리와 마그나복스와가 특허권을 놓고 법정공방이 펼쳐졌습니다. 콘솔 게임업계 최초의 지적재산권 분쟁이었습니다. 마그나복스의 변호사가 1972년 5월에 켈리포니아 버링게임에서 열린 오디세이 시연회에 놀란 부쉬넬이 Ping-pong 게임을 시연한 것을 목격한 증인을 찾아내면서 마그나복스가 승소하게 되었고, 아타리는 $700,000의 벌금을 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PONG 시리즈의 생산이 모두 끝난 1977년의 일이었고, 그들이 PONG으로 닦은 기반과 성공에 비하면 약소한 수준이었습니다.
  
PONG은 출시 후 1973년 3월까지 8,000~10,000대 가량의 아케이드 기계 판매량을 달성하면서 크게 성공합니다. 아타리는 PONG 기계마다 시리얼번호를 적용했는데 최초 ZZ-001 부터 ZZ-999까지, 다음은 AA-001 부터 AA-999, 그다음은 YY → BB 순으로 1000개 단위로 생산해서 판매량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약 38,000대에 이르는  PONG 시리즈 기계들을 생산했다 하니, 콘솔도 아닌 아케이드 기기로서는 얼마나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ONG은 출시 뒤에도 많은 후속작들이 등장했는데요, 같은 해에 4명이서 즐기는 PONG DOUBLES 을 비롯해서 QUADRA PONG, PIN PONG, DOCTOR PONG 등을 출시했습니다. 하지만, 오디세이와 마찬가지로 폭발적인 인기만큼 수 많은 불법 복제품이 양산되면서 골머리를 썩히기도 했습니다.
  
아케이드용 PONG의 성공에 힘입어 1975년, 시어스(Sears)와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퐁(Pong)의 15만대 판매 독점 계약을 맺어 출시합니다. 전량 매진 되면서 아케이드 시장에서와 같은 큰 인기[각주:1]를 누리게 되면서 마그나복스와의 전면전이 시작됩니다. 이제 '1세대 비디오게임'이라는 새로운 산업의 경쟁구도가 완성됩니다.
  
  
  
  
  
  

  
  
  
참고 문헌

Zap: The Rise and Fall of AtarI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www.pong-story.com/arcade.htm
http://www.ieeeghn.org/wiki/index.php/First-Hand:The_Development_of_Pong:_Early_Days_of_Atari_and_the_Video_Game_Industry#Atari_enters_the_home_computer_market
http://www.pong-story.com/atpong1.htm
http://www.gizmodo.com.au/2010/12/steve-wozniak%E2%80%99s-9-favourite-gadgets/
  
  


  1. 당시 퐁을 즐기던 가정집에서는 텔레비전의 형광체가 타서 자국이 남거나 패들이 마모되어 교체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곤 했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madmaiz.blog.me BlogIcon 마이즈
    2011.04.11 09:39

    저희 집에도 TV에 연결하는 가정용 버젼 Pong이 있었지요 >_<

  2. Favicon of http://lineni.com BlogIcon 리넨
    2011.04.11 09:55

    우와~ 퐁이다. 굉장히 유명한데 전 해본적은 없네요 -3-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04.11 11:07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사실, 연배가 높은 분들이 아니면 오리지널을 직접 플레이해보긴 어렵죠.

      저도 닌텐도 세대라 직접 만져보지 못했는데 한 번 해보고 싶네요.ㅋ

  3. Favicon of http://wiinemo.tistory.com BlogIcon WiiNemo
    2011.04.11 22:14

    오리지널 퐁의 등장이군요!
    저도 오리지널은 해본적이 없어서 좀 아쉽네요 ~

  4. Favicon of http://osten.co.kr BlogIcon osten
    2011.04.16 14:06

    드디어 퐁이군요.
    스페이스워는 여러가지 변종들을 찾아서 할 정도로 좋아했는데; 정작 전 퐁은 별로 재미는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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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비디오게임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타리(ATARI)의 창시자 놀란 부쉬넬 ::

 
 
 
 
  

놀란 부쉬넬(Nolan K. Bushnell, born February 4, 1943)
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1960년대 중반, 그가 전자공학도로 공부중이던 유타 대학교의 캠퍼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 대학가를 휩쓸던 컴퓨터 게임 스페이스워!(Spacewar!)와의 첫 만남이 게임 산업에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을테니까요.
  
"저는 스페이스워를 처음 보자마자 단번에 매료 되었습니다. 이 게임이 재밌을 뿐 아니라 여기서 비즈니스 기회를 찾았기 때문이었죠. 게임기를 하나 만들어서 시장에 출시하면 얼마나 벌 수 있을까 계산해봤지만 바로 생각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당시 IBM 7900과 같은 컴퓨터가 너무나 비싸다는게 문제였습니다."
 
대학에 졸업한 뒤 놀란 부쉬넬은 1969년에 전자회사 Ampex에 입사하게 됩니다. 스탠포드 AI 연구실에서 일하는 지인을 통해 스페이스워를 함께 즐기면서 이 게임이 어떤 원리로 구동되는지 자세하게 듣게 되면서 숨어있던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전자 게임의 비즈니스 잠재력이 명확하고 성공할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스페이스워'와 같은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Ampex에서 함께 일하던 Ted Dabney와 함께 프로젝트에 착수합니다. 프로젝트 초반에는 당시 미니컴퓨터로 유명하던 Data General을 이용해서 5개 이상의 합본 게임으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게임을 구현하면서 이를 위한 생산 단가를 맞추는데 상당히 곤욕을 겪었습니다.[각주:1] 오늘날은 하드웨어 생산 초기에 마진을 거의 남기지 않거나 적자를 내면서까지 가격을 책정하더라도 게임소프트 판매를 통해 이를 커버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드웨어 생산단가가 낮아질때까지 가격을 유지할 수 있지만, 콘솔게임 산업 태동기에는 게임의 수가 거의 없다보니 하드웨어 하나 당 소프트웨어 장착률이 거의 희박한 수준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만들고 있는 것은 일체형 아케이드 게임기였죠. 복수의 게임을 모두 담기엔 하드웨어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높았습니다.
  
Data General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한 놀란 부쉬넬은, 대신에 $4,000 비용의 하드웨어를 조합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결국 게임은 하나로 줄었고, 2인용이 아닌 1인용 게임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스페이스워와 같이 로켓을 조종해서 미사일을 쏘고 피하고 슈팅게임, '컴퓨터 스페이스(Computer Space)'의 프로토타입이 완성되었습니다. 좌우로 움직임을 전환하는 버튼과 미사일을 발사하는 버튼 2개로 컨트롤할 수 있었고 효과음도 지원하고 있었죠.
  

:: 놀란 부쉬넬은 1971년에 동전 투입형 아케이드 게임 'Computer Space'를 출시한다. ::
 
컴퓨터 스페이스는 1971년 11월, 전자회사 Nutting Associates를 통해 출시됩니다. 놀란 부쉬넬이 평소 들리는 치과 담당의사를 통해 Nutting Associates의 관계자와 연결된 것은 상당히 재미난 일화로 남고 있는데요, 비슷한 시기에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1년 넘게 스폰서를 찾아 고생하던 랄프 베어의 브라운 박스를 생각해본다면 시작부터 행운이 따라준 것 같습니다. =)
  
컴퓨터 스페이스는 최초의 동전 투입형 아케이드 게임이라는 점에서 아케이드 게임계에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최초의 게임' 타이틀을 가지고 가늠하는게 사실상 무의미 하지만 상업용 게임 자체로만 본다면 놀란 부쉬넬이 랄프 베어의 오디세이보다 1년 더 앞선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시와 함께 큰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했지만 컴퓨터 스페이스는 1,500대 판매량에 30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한게 고작이었습니다. 분명 획기적이고 재미있는 게임기였지만 대중적으로 즐기기엔 조작법도(2버튼) 게임도 다소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후에 출시한 퐁(PONG)의 폭발적인 인기를 감안한다면, 2인용이 아니라 혼자 즐기는 1인용이라는 점도 옥의 티가 아니었을까 예상하게 됩니다.
  

:: 컴퓨터 스페이스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Soylent Green (1973) ::

비록 자신의 첫 게임기는 실패했지만 놀란 부쉬넬은 이를 계기로 소중한 경험을 쌓게 됩니다. Nutting Associates는 마케팅에 소홀했던 점을 생각하면서 차기 게임기는 보다 더 큰 제조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는 동시에, 자신이 직접 회사를 창업해야 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바둑 애호가였던 놀란 부쉬넬은 회사명을 바둑에서 단수(單手)의 일본어인 아타리(ATARI)라는 이름으로 Ted Dabney와 함께 창업합니다. 그들의 첫 창립멤버는 Ampex시절부터 함께 일하던 앨런 알콘(Allan Alcorn)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스타트업한 그들은 초반에는 라스베가스의 슬롯 머신 등을 만들던 Bally Technology와 첫계약을 맺습니다.
  

 
차기 비디오 게임에 대해 고민하던 그들에게 1972년 5월,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켈리포니아 버링게임에서 마그나복스의 오디세이 시연회에 참석한 놀란 부쉬넬과 앨런 알콘은 오디세이의 핑퐁(Ping-Pong)게임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고, 아케이드 게임 퐁(PONG)의 개발에 착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당시 놀란 부쉬넬은 이 퐁(PONG)이 게임사에 큰 족적을 남긴 만큼, 수년간 특허 소송으로 로열티 문제에 시달리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사명으로 결정할만큼, 놀란 부쉬넬에게 바둑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

 
  
[참고 문헌]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www.bmigaming.com/videogamehistory.htm
http://www.arcade-museum.com/game_detail.php?game_id=7381
http://www.cedmagic.com/history/computer-space.html
  


  1. 프로젝트 진행당시, 생산 단가를 맞추는 과정에서 놀란 부쉬넬은 그 당시 심정은 정말 지옥같았다(Hell)고 밝히기도 했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madmaiz.blog.me BlogIcon 마이즈
    2011.03.30 10:02

    으아니!! 이 걸 동영상으로 보게 될 줄이야!! ㄷㄷㄷㄷ >_<
    그나저나 태현님 블로그가 게기모(현업 온라인 게임기획자 모임)에 소개되었더군요.
    왠지 방문자가 늘어날지도?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03.30 11:25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사실 저 영상은 에뮬레이터로 구현한 영상이구요...^^;
      찾아보니 게임기로 직접 플레이하는 실기 영상이 몇개 있긴한데, 게임 플레이를 제대로 살펴보기가 힘들더라구요...ㅠㅠ

  2. Favicon of http://wiinemo.tistory.com BlogIcon WiiNemo
    2011.04.01 09:09

    드디어 아타리의 등장!
    저때부터 아타리 쇼크 전까지 정말 아타리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3. Favicon of https://chaeunwoo.tistory.com BlogIcon 차3
    2011.04.04 16:52 신고

    아직도 아타리의 게임은 인기가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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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복스(Magnavox)는 1917년에 설립되어 1974년에 필립스(Philips)에 인수되기까지 한 시대를 풍미해온 전자 회사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랄프 베어의 브라운박스가 여러 전자 회사들에게 외면을 받아왔지만, 마그나복스에 의해 극적으로 라인선스 계약을 체결하게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랄프베어의 브라운 박스와 마그나복스와의 첫 인연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72년 5월에 첫 결실을 맺게 됩니다. 전국의 마그나복스 딜러들이 새로운 기계를 보기 위해 포트웨인으로 모여듭니다. 브라운박스는 이제 '오디세이(Odyssey)'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출사표를 던지면서 비디오게임 산업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로 3달 뒤인 8월, 미국 전역에 마그나복스 오디세이가 정식으로 출시됩니다. 비디오게임 하드웨어의 정식 가격은 $75로 하드웨어 시스템, 2개의 컨트롤러, 케이블, 3개의 카트리지와 액세서리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오디세이의 하드웨어는 순수한 아날로그 회로로, 40개의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콘덴서, 저항기 등의 개별 소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아직 음성은 물론, 하드웨어 효과음 조차 지원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최초의 비디오 게임기는 완벽한 디지털 방식이 아니라 아날로그 방식이 혼합된 형태였는데요, 훗날 랄프 베어는 오디세이 개발 당시에 디지털과 아날로그 방식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동봉된 6종의 게임 카트리지에 게임들이 담겨져 있었고, 이후에 추가로 출시된 게임들은 별도로 구매하는 형태였습니다. 이제 겨우 콘솔 산업 초창기다보니 소프트를 동봉해서 판매되는 게 보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물가로 $75은 상당히 고가였을 테니까요.
  

 
오디세이에서 가장 재미난 점은 바로 '스크린 오버레이(Screen Overlays)'라는 반투명한 필름이 아닐까 싶은데요, 박스에 게임 카트리지와 함께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오디세이는 3개의 스팟(spot)을 출력해서 컨트롤하고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아주 단순한 구조였기 때문에 그래픽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버레이를 부착하면 게임의 몰입도가 더욱 배가되었던 것이죠. 당시 광고 영상을 보시면 단번에 그 용도를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
  

:: 출시 당시의 오디세이 TV 광고 ::
 
  
  

:: 주변기기였던 라이플과 슈팅 갤러리 세트 ::

:: 슈팅 갤러리용 오버레이들. 총 4개의 게임이 존재 했다 ::

오디세이는 주변기기도 함께 판매했습니다. 초창기 프로토타입인 브라운 박스 시절에 만든 라이트 건(Light Gun)을 개량한 라이플(riftle)을 동봉해 SHOOTING GALLERY 팩을 출시했습니다. 화면상에 스팟이 나타나면 스크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서 맞추는 아주 단순한 구조의 슈팅 게임이었죠. 표적을 조준하는 기능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볼 때 굉장히 허술한 주변기기였지만 당시에는 이 자체만으로도 게임을 즐기는데 큰 만족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
  
  

:: 슈팅 갤러리 시연 영상 (고전 콘솔게임 리뷰들이 AVGN 컨셉을 많이 이용하네...) ::
 
  
마그나복스는 오디세이를 출시하면서 마케팅과 광고에도 집중합니다. 실제로 발표 후 미국 전역에 출시되기까지 3개월의 기간이 소요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 준비 기간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청만을 목적으로 하던 TV가, 사용자와 인터렉티브하게 즐기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심어지면서 미국 전역과 전국민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렇게 최초의 비디오게임 오디세이는 괄목할만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발매된 1972년 첫해에만 10만대 이상을 판매[각주:1]했고 주변기기 슈팅 갤러리 팩은 2만개 이상의 판매고를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산된 1975년도까지 약 35만대의 총판매량을 달성하게 됩니다.
  
::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광고지 ::::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광고지 ::
하지만 마그나복스는 한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게임기와 동시에 TV를 만드는 전자회사임을 잊고 있었던 것이죠. 많은 소비자들이 오디세이가 마그나복스 TV 전용의 게임기로 혼동하게 되었습니다. 마그나복스가 아닌 다른 회사의 TV를 가지고 있던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자신의 TV와 호환되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구매결정을 피하기도 했습니다.[각주:2] 그당시에 광고를 하면서 마그나복스의 TV 뿐 아니라, 모든 TV에서도 이용 가능함을 강조했었더라면 더 큰 판매량을 달성했을 것이고 선구자로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오디세이의 전세계 특허 목록. 리스트에는 없지만 싱가폴에도 수출(모델명 YE7100BK13)했다. ::

:: 더욱 정감있는 오디세이의 독일 패키지. ::

또한, 마그나복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유럽과 전 세계 해외시장에 수출하게 되지만 그만큼 많은 '짝퉁'들을 양산하기도 했습니다. 선구자답게 최초의 비디오게임기인 동시에 게임산업 최초로 전세계에 특허를 냈으며, 게임산업 최초로 법정 소송을 겪기도 했습니다.
  
  

마그나복스에게는 도박과도 같던 오디세이는 이제 비디오게임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됩니다. 랄프 베어가 그의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정이 드디어 큰 결실을 맺게 되었죠. 그리고 그는 오늘날 비디오 게임의 선구자로서 생애에 정점을 찍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랄프 베어는 마그나복스를 나와서 계속해서 여러 게임기를 발명했습니다. 게임에 대한 그의 열정이 어떤지 확인할 수 있는데요, 특히, 패턴 맞추기용 전자 게임 시몬(Simon)역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게 됩니다.



:: 랄프 베어의 또 다른 발명품, 게임기 시몬(Simon) ::
 
 

이미 역사는 시작되었다.

 
마그나복스가 1975년까지 승승장구 하고 있을 때, 이미 한 명의 사업가는 동전 투입 방식의 아케이드용 게임기를 비슷한 시기에 발명해서 미국 전역을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마그나복스는 알고 있었을까요? 자신들이 만든 오디세이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멋진 산업을 열었는지. 이제부터 수 많은 후발주자들이 게임산업에 뛰어들면서 무한 경쟁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오늘날, 오디세이는 미국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 최초의 비디오 게임기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 It's my Turn! ::

 
[참고 문헌]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www.ralphbaer.com/video_game_history.htm
http://www.pong-story.com/odyssey.htm#P7
http://www.giantbomb.com/ralph-baer/72-89698/
http://www.old-computers.com/museum/photos.asp?t=1&c=883&st=2
http://www.computercloset.org/MagnavoxOdyssey.htm



  1. 첫 해 판매량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대략 10~13만대 사이로 측정된다. [본문으로]
  2. 덕분에 3년 뒤에 아타리(ATARI)가 가정용 게임기 PONG을 출시하면서 전세계모든 흑백TV와 호환됨을 강조하는 계기가 된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moneyamoneya.tistory.com BlogIcon 머니야
    2011.03.21 08:29

    국내출시된 최초의 비됴겜은 오트론 였던것 같아요~ 제가 초딩3년때니깐..35년전 같군요..^^ 좋은글 잘보구 갑니당^^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03.21 09:20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말씀하신 오트론은 'PONG'류의 게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세계 각지에 비슷한 게임기가 다른 이름으로 많이 출시되어서 특허문제가 가시화 되기도 했었구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

  2. sweet
    2011.03.29 01:18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게임 역사에 대해 조사하던 중에 좋은 글을 만났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3. Favicon of http://wiinemo.tistory.com BlogIcon WiiNemo
    2011.03.30 01:47

    앗 오디세이군요. 드디어 게임계의 유명인사(?)들이 등장한 것 같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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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랄프 베어는 TV와 게임기를 연결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

 
 
 
 
 
미국의 유능한 발명가이자 엔지니어인 랄프 베어(Ralph H. Baer)는 TV와 게임이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확신했으며 근 미래에 사업 가능성을 내다 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선견과 확신이 오늘날 '비디오 게임의 선구자'로 있게 해주었습니다. 랄프 베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TV 엔지니어 기술자 자격증을 취득했는데요, TV 수신기를 구축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미국의 전자 회사 'Loral'에 근무하던 1951년 당시부터, 여러 민간 군수 기업들을 전전하면서 TV 엔지니어로서 기술을 인정받아왔지만, 일찍부터 TV를 다른 형태로 활용하는데 가장 관심이 컸습니다. 이미 1950년대 초부터 게임과 TV를 연결해서 즐기는 방향에 대해서 구상해왔다고 합니다.
  
제가 그 시기에 TV를 이용한 게임기 형태를 구상하고 제안할 때마다 주위에서는 늘 비관적인 반응만 보였습니다. 결국 이야기를 꺼내면 그걸로 끝이었죠.
 
그렇게 15년이 지나고 또 다른 민간 군수 기업으로 회사를 옮긴 랄프 베어는, 자신의 업무가 점점 TV 엔지니어 기술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을 실감하며 많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비디오 게임기에 대한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는 결국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1966년 9월 1일, 뉴욕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평상시 처럼 노트를 끄적이던 그는 작정하고 4페이지에 이르는 TV 게임 설계도를 도안하기 시작했고, 5일 만에 평소 구상해오던 아이디어의 개략도와 함께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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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스템의 첫번째 과제는 영상 신호를 디스플레이에 출력 하는 것이었습니다. 랄프 베어는 3번 또는 4번 채널의 안테나 입력 단자를 선택하게 되는데요, 그의 이 결정은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안 비디오게임기에서 통용되는 표준 방식과도 같이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부서의 기술자로 있던 Bob Tremblay가 참여해 진공관을 이용한 디바이스를 만들었고, 스크린상에 두개의 점(spot)을 움직일 수 있게 구현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 초창기에 2개로 구현한 스팟은 3개로 늘어났고, 컨트롤러도 3개까지 쓸 수 있게끔 확장됐다. 사진은 3번째 컨트롤러 'light gun'이 포함된 그들의 비디오게임 시스템 '브라운 박스' 현재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

이 위대한 첫 걸음을 통해 쫓고 도망가는 'chase' 형태의 게임을 구현하게 됩니다. Fox and Hound 로 불리는 그의 첫 chase 게임은, 하나의 스팟을 사냥의 대상인 여우로 정하고, 다른 하나의 스팟을 사냥개나 사냥꾼으로 플레이해서 목표물을 사냥하거나 도망다니는 게임으로 구현합니다. 무척 단순했지만 그 당시엔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웠다고 합니다. =)
  
랄프 베어의 이 최초 프로토타입 게임기는 사내에서 비공개로 끝났지만, 이후로도 프로젝트를 이어가며 규모를 확장하게 됩니다. 이듬해인 1967년에는 Sanders Associates사에서 만난 Bill HarrisonBill Rusch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스팟을 3개로 구현하는 Ping-Pong 게임을 구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3년 뒤인 1969년, 이들은 비디오게임 하드웨어와 함께 2~3개의 게임 데모를 완성하게 됩니다.
  

:: 1969년, 랄프 베어와 빌 헤리슨이 핑퐁 게임을 직접 시연하는 영상. ::
 
랄프 베어는 이 프로토타입 게임 시스템에 '브라운박스(Brown Box)'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되는데요, '브라운관'으로 불리는 TV에 걸맞는 친근한 이름이었습니다. 브라운 박스에 여러 TV들을 연결해서 테스트 및 시연에 성공하게 되는데, RCA, GE, Zenith, Sylvania, Magnavox, Warwick 등 미국에 출시된 대부분의 TV 회사 제품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랄프 베어는 이제 브라운 박스의 상용화를 앞두고 각 TV 회사들과 라이선스 계약을 채결하기 위해 여러 전자 회사를 전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1969년 봄까지는 오직 RCA만이 이 재미난 갈색 상자에 관심을 보였고 라이선스 체결까지 이야기가 진행됐지만 결국 취소되었습니다. 최초의 TV 게임기가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아직 랄프 베어에게는 기회가 남아있었습니다.
  
우리는 운이 좋았습니다. RCA의 일원이던 Bill Enders가 퇴사하고, 같은 TV 회사인 마그나복스(Magnavox)사의 뉴욕지점 마케팅 부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죠. 그는 RCA 시절부터 우리 게임기에 감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 지금은 필립스에 흡수됐지만, 한시대를 풍미한 TV회사였다. ::

랄프 베어는 빌 엔더스(Bill Enders)의 추천으로 인디아나주 포트웨인에 있는 마그나복스의 본사에서 브라운 박스를 시연하게 됩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그의 말에 따르면 넓은 방에 마그나복스의 경영진들이 모두 모여서 브라운 박스 시연을 보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별 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큰 의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마케팅 총괄 부사장 제리 마틴(Jerry Martin)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브라운 박스에 큰 감명을 받게 되었고 사업 가능성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브라운 박스와 함께 가겠습니다.
 
때는 1970년 7월 17일, 포트웨인의 한 사무실에서 비디오게임(콘솔) 산업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 Brown Box's Light Gun ::

 
[참고 문헌]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www.ralphbaer.com/video_game_history.htm
http://www.giantbomb.com/ralph-baer/72-89698/
 
  1. Favicon of http://lineni.com BlogIcon 리넨
    2011.03.08 21:47

    역시 새로운 것은 처음엔 거절당하는군요 ㅜ_ㅜ;

  2. Favicon of http://osten.co.kr BlogIcon osten
    2011.03.09 20:02

    드디어 첫번째 비디오 게임기가 나왔군요.

  3. Favicon of http://wiinemo.tistory.com BlogIcon WiiNemo
    2011.03.10 00:49

    핑.퐁.핑.퐁~
    이제 본격적인 비디오 게임 시장의 시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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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게임의 역사를 연 컴퓨터, PDP-1 ::

 
  
  
지난 시간에 최초의 비디오게임으로 소개한 테니스 포 투(Tennis for Two)는 사실상 게임산업이 이미 성숙기에 접어든 1980년대에 뒤늦게 발견되면서 재조명 받게 된 케이스였습니다. 오늘날 테니스 포 투가 최초의 비디오게임으로서 인정 받고 있다지만[각주:1] 게임산업이 일어나는데 그닥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점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반면에 지금부터 소개할 이 게임은 게임산업을 일으킨 선구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이들에게 끼친 영향력 때문에 최초의 게임이라 불리는데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 Steve "Slug" Russell ::

1962년
, 미국의 MIT 공대에 최신 컴퓨터 PDP-1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 PDP-1은 당시에 종이 테이프나 천공카드로 입출력 하던 방식에서 오늘날의 모습과 흡사한 모니터와 키보드가 입출력을 담당하는 혁신적인 컴퓨터인 동시에 전자 게임과 해커의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당시 MIT에 있던 스티브 러셀(Steve "Slug" Russell)과 그의 동료들은 이 흥미로운 PDP-1 기계를 가지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의욕에 불타 오르게 되었음은 두 말의 여지가 없었겠죠.
  
이들은 디스플레이에 그래픽을 표현하는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되었는데요, 이 당시 우주비행사 존 글렌이 최초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데 성공한 해이며,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진출과 경쟁이 심화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자연스럽게 우주 공간에서의 전투를 다루는 미래형 게임을 구상하게 됩니다. 소설가 E. E. SmithThe LensmanSkylark 시리즈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이 게임은 '테니스 포 투'와 마찬가지로  2인이 대전하는 방식의 게임이었 습니다. 플레이어는 Needle(바늘)과 Wedge(쐐기)라는 이름을 붙인 두 로켓들[각주:2]을 조종해서 미사일을 발사해 상대방을 먼저 맞추면 게임에서 승리하는 형태였죠.
  
  
 
  

:: Needle 과 Wedge의 대결 ::

그렇게 탄생한 스페이스워(Spacewar!)의 초기버전은 배경음도 없고, 로켓이 폭발할 때는 별다른 그래픽 효과 조차 없이 간단했기에 지금 시대에 겉보기 만으로는 조악하기 짝이 없는 게임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상당히 혁신적으로 게임을 디자인하고 프로그래밍 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이 게임에 '현실성(realistic)'에 대한 개발자들의 고찰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스티브 러셀이 처음에 우주의 배경표현을 할 때 단순한 도트의 랜덤 나열로 했지만, 한 동료가 마음에 들지 않다며 작은 은하계를 표현[각주:3]하도록 다시 프로그래밍 하게 됩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다른 동료에 의해 중력 센서가 추가되고, 시스템 영역을 벗어날 때를 대비한 경보장치와 랜덤한 공간 이동과 시스템을 추가하는 등 수시로 게임을 업데이트 하게 됩니다.
  
현실성에 대한 고민이 담긴 만큼, 스페이스워는 컨트롤하기 꽤 힘든 게임이었습니다. 우주공간이기 때문에 한쪽으로 가속을 주면 관성으로 인해 역추진하기 전까지는 절대 로켓이 멈추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을 맞추는게 쉬운 일이 아니었죠. 이는 화면 중앙에 배치된 큰 별을 중심으로 중력이 작용해서 미사일이 휘는 등 프로그래밍 되었습니다.
 
50여년전부터 이정도로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한데요, 그당시 스티브 러셀과 함께 개발에 참여한 J.M. Graetz가 1981년에 Creative Computing Magazine에 기고했던 내용[각주:4]에 따르면 그들이 스페이스워를 개발하면서 어떤 개발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 지 확인할 수 있으며, 오늘날의 게임 디자이너들에게도 큰 교훈을 줄 것입니다.
 
  1. 시스템의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잘 이끌어 낼 것.
  2. 일관된 프레임워크(뼈대)안에서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야하고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어야 함.
  3. 대중에게 친근해야 하며 즐거움을 주는 게임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컴퓨터는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두운 과거와 함께 시작했기 때문에, 당시 컴퓨터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에게는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는 악마의 기계가 아니라 인간에게 가깝고 친근한 기계임을 입증해야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스페이스워는 MIT에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게 됩니다. 게다가 PDP-1을 보유하고 있는 전국의 대학가로 퍼지면서 크게 유명세를 타기에 이르죠. 이 게임은 최초의 소스로부터 수년간에 걸쳐 여러 개발자들의 참여를 통해 살을 입히고 오늘날까지도 자유소프트웨어 진영에서 다양한 형태의 게임들이 나오고 있는 걸 보면 그 영향력이 어떤 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50년이 다되어가는 오늘날까지도 스페이스워는 진행형이다. 영상은 'KSpaceDuel' ::

전자 게임 역사에 큰 이정표를 남긴 스페이스워는 그당시 한 젊은이에게 게임을 통한 사업의 비전을 심어주게 됩니다. 그는 오늘날 '비디오게임의 아버지'이자 아타리(ATARI)를 창시한 '놀란 부쉬넬(Nolan Bushnell )'이었습니다. 그가 대학가에서 발견한 '스페이스워'는 게임 산업의 서막을 알리는 새로운 신호탄이었습니다.
  
60년대말 아니면 70년대초 였을까. 스탠포드 대학 학생 회관을 돌아다니고 있었을 때, SF소설에서나 등장할 법 같은 기계를 발견했다. 이는 핀볼 게임 기계가 아니라 바로 전자 게임이었다. 외관상 TV 스크린에 단추 몇 개만 달렸있던 그 게임기는 사실, 스페이스워(Spacewar!)였다. 초기 모델의 레버 대신 버튼으로 바껴 있었고, 태양의 유무를 설정하는 옵션이나, 중력에 관한 옵션등 여러 기능이 추가되어 있었다. 내가 여름 초에 친구 스티븐과 주변의 방해 없이 이 게임을 즐길 수 있었지만,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는 기계 주변에 무려 6겹의 많은 구경꾼들로 몰렸고, 여러 위성 모니터를 연결해서 플레이 하는 모습을 함께 구경하곤 했다.

이따금씩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유타 대학교에서 '놀란 부쉬넬'이 스페이스워를 처음 보자마자 게임사업의 비전을 발견한 것을 나 역시 함께 발견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어있을까? 이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이정표였던 셈이다.[각주:5]

-러셀 드마리아(RDM)
 
  
  
  
  

 
  
[참고 문헌]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en.wikipedia.org/wiki/Spacewar!
  
  1. 사실 이 부분은 현재까지도 의견이 분분한 이유는 테니스 포 투의 디스플레이가 CRT가 아닌 오실로스코프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뚱뚱한 시가 모양처럼 생겼다고 Wedge 라는 이름을 붙이고, 바늘처럼 얇은 튜브 모양이라고 Needle 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본문으로]
  3. 스티브 러셀과 동료들은 게임의 배경을 다시 프로그래밍 하고 나서 농담 삼아 '비싼 천문관'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당시 이 컴퓨터는 가격이 $120,000로 엄청난 고가의 기계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p12) [본문으로]
  5.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p13)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lineni.com BlogIcon 리넨
    2011.02.25 22:14

    오홋, 이런 것이 있었다니;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02.26 00:48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만일 우리가 저 시대에 살았더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당시에는 전자게임이 엄청난 쇼크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2. Favicon of http://wiinemo.tistory.com BlogIcon WiiNemo
    2011.02.25 22:14

    태현님 오늘도 글 잘 보았습니다~
    하나하나 밝혀지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의 진실,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02.26 00:47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부족한 글인데 늘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이제부터 비디오게임 1세대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저도 너무나 기대됩니다!

  3. DMD
    2011.02.27 12:15

    오호... 글 잘 봤습니다~

  4. 슬픈물새
    2011.02.28 00:01

    좋은글 잘보고갑니다 ㅎㅎ
    다음편 기대되네요 :)

  5. Favicon of http://madmaiz.blog.me BlogIcon 마이즈
    2011.02.28 09:53

    이제 게임이 세상밖으로 나올 차례!

  6. Favicon of http://osten.co.kr BlogIcon osten
    2011.03.01 20:08

    스페이스워는 정말 초기의 컴퓨터 게임이라는 칭호를 넘어서 시대를 초월한 명작입니다.

  7. Favicon of http://jong10.com BlogIcon 종텐
    2011.03.02 12:14

    스페이스워.. 그동안 생각하던 것 보다 게임 퀄리티가 높네요. 게다가 디스플레이가 동글동글 ㅎㅎ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03.04 16:12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이당시까지는 아직 디스플레이가 원형이네요.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까지는 군용으로 사용한 레이더 시스템의 디스플레이에 영향을 계속 받아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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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비디오게임으로 평가 받는 Tennis for Two ::

 
  
  
  
  

윌리엄 히긴보텀(William A. Higinbotham :: 1910.10.25 ~ 1994.11.10)2차 세계대전 당시 맨해튼 계획[각주:1]에도 참여한 이력이 있는 물리학자로, 미국 뉴욕에 위치한 원자핵 물리학 연구소인 BLM(Brookhaven National Labotary)에서 기계설비 부문 책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연구소는 매년 가을이오면 일반인에게도 연구소를 개방하는 '방문자의 날'을 열어 연구소의 안정성을 보여주고자 했었습니다.
  
하지만 연구소를 찾는 방문객들은 그곳에서 삽화 자료나 기계 설비 따위를 보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쉽게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1950년대에도 여전히 컴퓨터나 기계가 전쟁의 도구로 쓰이는 악마의 물건이라는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이 팽배하던 시절이었죠.
  
히긴보텀 박사는 물리학자인 동시에 컴퓨터 과학자이기도 했었는데요, 방문자의 날이 삽화 자료나 복잡한 기계장치 따위나 구경하는 지루한 연례행사임을 간파하고는 대안을 찾게 됩니다. 오늘날 최초의 비디오게임으로 불리는 테니스 포 투 (Tennis for Two)는 이러한 동기로 탄생하게 됩니다.
  

저는 그동안 연구소를 찾은 방문객들이 보기만 하는 평범한 전시 일정에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죠. 그후로 몇년 뒤에 직접 플레이 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용 테니스 게임을 만들어서 선보였습니다.
 
히긴보텀 박사는 연구실에 있던 Systron Donner SD-3300 아날로그 진공관 컴퓨터를 이용했는데요, 사실 이 컴퓨터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핵폭탄 발사를 위해 탄도 거리를 측정하는데 쓰이던 군사용 목적의 컴퓨터 였습니다. 거기에 5인치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 디스플레이를 부착해서 출력하고 게임 전용 입력장치 컨트롤러를 고안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대부분 최초의 게임들이 전쟁용으로만 쓰이던 컴퓨터를 개조해서 탄생시킨 점은 상당히 의외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 같습니다.
  
  

:: 연구소 오픈하우스에는 이렇게 관련 설비들을 전시하고 게임도 시연할 수 있도록 마련했다. (확대는 Tennis for Two의 오실로스코프 디스플레이와 컨트롤러 2개) ::

 
수많은 기계들과 방사능 탐지기 등으로 복잡한 시설 속에서 히긴보텀 박사가 2주만에 게임 개발을 마칠 수 있던 것은 Robert V. Dvorak 이라는 또 다른 공동 개발자[각주:2]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완성한 뒤에 이들은 Tennis for Two 라는 이름을 지었고, 제목 그대로 최초로 2인 대전이 가능한 비디오게임이었습니다. 게임은 완성 되었고 드디어 1958년 10월 18일, 그 해 연구소 방문자의 날에 Tennis for Two가 대중들에게 최초로 공개됩니다.
  
  
 
이 초창기 테니스 게임의 모습은 오실리스코프 디스플레이 수평선산에 가로 방향의 코트로, 가운데 작은 수직 라인을 네트 경계선으로 표현해서 공을 치고 받는 형태였습니다. 특별히 공이 네트에 걸리면 공의 각도가 불규칙하게 변하는 기능도 구현이 되었었는데요, 컨트롤러에서 돌리는 다이얼로 공을 치는 각도를 변경하고 버튼으로 공을 치게끔 구현되어 있어 상대방이 예측하기 힘든 대전 플레이가 가능했습니다. (다만 공이 네트 안쪽의 내 코트 영역에 들어 올때만 언제든 자유롭게 칠 수 있죠)
  
히긴보텀 박사가 기억하는 Tennis for Two는 이렇게 전해집니다.
  
Tennis for Two는 아주 단순한 디자인이었습니다. 그 당시(1950년대) 아날로그 컴퓨터는 디지털 컴퓨터와 같은 정밀함도 없고 오작동이 심한데다 조잡하기 짝이 없었죠. 하지만 (제가 만든) TV게임에는 정밀도를 요구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Tennis for Two는 1958년에 첫 공개되었고 이듬해인 1959년, 그리고 1961년을 마지막으로 BNL 방문자의 날에서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획기적이고 기념비적인 게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극소수에게만 공개 되었기 때문에, 세간에 주목을 받지 못한 체 잊혀지게 됩니다. 결국 SD-3300과 오실리스코프는 분해되어 각기 다른 목적으로 쓰이게 됩니다. 히긴보텀 박사는 자신이 만든 이 게임이 다음 세기에 거대한 산업군으로 성장하리라는 것을 일찍 간파했더라면 지금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해 있었을까요?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한 매체[각주:3]로부터 Tennis for Two가 비디오게임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어서 가장 오래된 비디오게임임을 입증받게 되면서 개발자인 히긴보텀 박사도 세간에 주목을 받게 됩니다. 1983년에 그는 앞으로도 자신이 만든 이 세기의 발명품에 대한 아무런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는데요,[각주:4] Tennis for Two가 특허를 주장할만큼 가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특허를 신청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 되었다면, 자신이 아니라 미국 정부가 소유하게 했을 것이라며 남다른 애국심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히긴보텀 박사의 이런 결정 덕분에 이후 핑퐁 형태의 스포츠 게임들이 자유롭게 출시될 수 있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
  

:: BNL에서는 Tennis for Two가 공개된 50주년을 맞아 개발자 두 사람의 아들들과 함께 기념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

그로부터 50년이지나고 2008년 10월 24일에 BNL은 Tennis for Two가 공개된 지 50주년을 맞아 기념 행사를 열었습니다. 그 당시처럼 약 200여명의 일반인을 초청해 연구소를 개방하는 '방문자의 날' 행사였지만 아쉽게도 개발자 두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었기에 특별히 2세들을 초청해 최초의 게임에 대한 업적을 기념했습니다.
 
이 날 방문자들은 그 당시와 비슷한 형태로 재구현 된 Tennis for Two 게임기를 시연할 수 있었는데요, 당시의 컨트롤러 모습은 물론, 아날로그 컴퓨터라서 25초마다 세팅을 다시 해줘야 하는 등 번거로움 까지도 완벽하게 재현하게 됩니다. =)
  
컴퓨터가 오로지 전쟁을 위해 사용하는 악마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에게 유익하고 이로운 기계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즐거움까지 더해주는 엔터테인먼트 도구로서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전자 게임은 이렇게 선구자들의 손을 거쳐 점점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 재구현된 Tennis for Two의 전용 컨트롤러 ::

[참고 문헌]
http://pongmuseum.com/history/WillyHiginbotham-PaleolithicPong.php
http://www.bnl.gov/today/story.asp?ITEM_NO=964
http://www.evilmadscientist.com/article.php/tennis
http://www.bnl.gov/bnlweb/history/higinbotham4.asp

  1.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 ::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미국이 영국과 캐나다의 협조아래 수행한 인류 최초의 핵무기 개발 계획의 암호명이다. [본문으로]
  2. 윌리엄은 설계도를 그리고(기획/디자인) 로버트는 설계도를 받아서 패치보드를 만들었다.(하드웨어 제작) [본문으로]
  3. Creative Computing [본문으로]
  4. 특허와 소송의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에서 이는 대단한 결정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wiinemo.tistory.com BlogIcon WiiNemo
    2011.02.17 13:13

    오오 Tennis for two가 드디어 등장하는군요 +_+

  2. Favicon of http://madmaiz.blog.me BlogIcon 마이즈
    2011.02.18 10:23

    아아.. 저는 이름을 '윌리 비긴보섬'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제대로된 이름이 아니었네요 >_<
    게임의 역사는 볼때마다 항상 두근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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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 게임의 역사는 곧 컴퓨터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진은 1951년 10월 6일, 독일의 Berlin Industrial Show에 공개 되어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최초의 컴퓨터 게임, NIMROD ::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비디오게임의 용어 정리를 가볍게 해보면, TV나 모니터 같이 래스터그래픽으로 구현된 디스플레이로 즐기는 전자 게임을 이야기 하는데요, 디스플레이와 기계장치, 그리고 입력장치로 조합되는 콘솔(Console) 게임으로 불리는 점도 이런 이유에서 있겠습니다. 사실상 PC게임이나 비디오게임이나 구조상으로는 차이가 없지만 게임 시장이 형성되면서 각각 플랫폼을 시장으로 구분하게 되다보니 상징적인 의미로 나눠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자 게임'은 결국 PC게임과 비디오게임의 기원이 한 줄기라는 점으로 인식하시길 바랍시다.
  
사실 최초의 (전자)게임은 딱 잘라서 '이거다.' 라고 하기에는 업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다 이에 대한 담론이 오늘날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만 딱 집어서 '이 것이 최초의 게임'이라고 하기보다는 1972년에 상용화 된 첫 게임기가 출시되기까지 토대를 마련해준 선구자들을 '전자 게임의 기원'과 '최초의 게임들'로 소개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
  
 

:: 1940년대 CRT ::

전자 게임의 기원은 1947년에 TV기술의 개척자로 불리는 Thomas T. Goldsmith Jr.가 브라운관(음극선관-CRT) 디스플레이에 출력해서 만든 Cathode Ray Tube Amusement Device('브라운관 오락기'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에서 그 시작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기계는 8개의 진공관을 이용해서 만들었는데요, 목표물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단순한 게임의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CRT 모니터를 이용한 레이더 시스템에 영감을 받아 진공관에 디스플레이를 연결해서 이 게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게임은 미사일의 속도와 각도를 조절하는 몇개의 손잡이를 돌리면서 컨트롤 하는 형태입니다. 하지만 초창기 아날로그 방식이다보니 비디오 신호를 래스터 주사(raster scan)로 출력하지 못해서 목표물이 겹쳐 보이고 잔상이 계속 남는 등 전자 게임의 조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CRT 스크린에 출력하는 전자 게임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선구자로 불리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 무려 480개 가량의 진공관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슈퍼컴퓨터 NIMROD ::

시간이 흘러 1951년 5월 5일, 영국에서 열린 Festival of Britain 박람회에서 최초의 컴퓨터 게임이 공개 되었습니다. Ferranti사(社)에서 만들어진 이 컴퓨터는, 20세기 초에 하버드 대학의 수학자 Charles L. Button이 제창한 수학 이론 게임, NIM을 전자 게임 형태로 구현한 것입니다. 480개의 진공관으로 구성된 거대한 컴퓨터가 연산 처리해서 플레이어와 1:1로 게임을 진행하게 되었는데요, 최초의 디지털 게임이라는 점에서 볼 때 디지털 로직을 조명하는데 크게 공헌한 기념비적인 게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CRT 디스플레이로 출력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 전면 유리 패널들의 점멸상태로 게임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비디오 게임'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 당시 독일연방국의 수상이자 경제장관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도 게임을 시연해서 이슈가 되었다. ::

이 NIMROD는 같은 해 10월 6일, 독일의 Berlin Industrial Show에도 공개되어 최고의 인기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의 로직을 이해하지 못한 도전자들이 컴퓨터와의 대결에서 번번히 패하고 말았죠. 당시 독일 연방공화국의 경제학자이자 경제장관과 수상을 역임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NIMROD 컴퓨터와 이벤트 매치가 벌이기도 했지만 3전 3패의 수모를 겪은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
 
  

:: Nimatron ::

사실 NIMROD는 공개될 당시보다 10년 더 앞선 1939년, 미국의 물리학자 Edward Uhler Condon가 자신의 연구원들과 함께 만든  Nimatron이라는 또 다른 NIM게임 자동 계산기가 모델이었습니다. 이 기계는 당시 뉴욕에서 열린 The New York World's Fair[각주:1] 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는데요, 전시장 방문객들이 이 기계를 만지고 난 뒤에 '나는 미래를 봤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Nimatron은 당시 기준으론 크기도 소형이었기 때문에 미국 가정에서 보급해서 엔터테인먼트 기계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장미빛 미래를 점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컴퓨터가 '전쟁에 쓰이는 악마의 도구'로 인식되는 등 미국과 유럽 사회 전역에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하게 되었고 Nimatron은 사람들로부터 거부감을 느끼는 기계로 자연스럽게 기억에서 잊혀지게 됩니다.
  
   

NIMROD가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2년에는 최초로 축적 프로그램이 가능한 진공관 컴퓨터, EDSAC(Electronic Delay Storage Automatic Calculator)를 이용한 게임이 탄생했습니다. Alexander S.Douglas 라는 컴퓨터 공학 박사가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과정에서 Tic-Tac-Toe(우리가 즐기는 오목과 비슷한 삼목 게임) 게임을 하나 개발 했습니다.
 
OXO 또는 Noughts and Crosses 로 불리는 이 게임은, 35x16px의 해상도를 지닌 CRT 모니터에 출력해서 즐길 수 있는 게임이었습니다. 당시 캠브리지 대학에서는 이 게임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EDSAC 컴퓨터에 설치가 불가능했고 제한적으로만 이용 가능했다고 합니다.
  

:: EDSAC으로 만든 OXO ::

이 게임기에서 가장 재밌는 점은 구형 전화기 다이얼을 컨트롤러 삼아서 명령을 입력했는데요, 0 또는 1번 다이얼을 돌려서 PC와 나의 게임 시작 순서를 정하고 1번부터 9번까지 다이얼을 선택해서 돌리면 삼목 게임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컴퓨터와의 대결만 가능한 1인용 게임인데다 칸이 적어서 비기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이용한 최초의 게임이 될 것 같습니다. 현재 이 게임은 EDSAC Simulator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접해보실 수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다운로드해서 즐겨보시길 바랍니다. =) 
 
 
  
지옥 같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고 컴퓨터 선구자들에 의해 전자 게임들이 발명되고 있었지만, 핵 무기 개발에 쓰인 컴퓨터에 대한 공포와 사회 전역에 팽배한 부정적인 인식은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컴퓨터 과학자들은 컴퓨터가 악마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실용성 있는 기계임을 증명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컴퓨터가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엔터테인먼트 도구로써 '게임'이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오늘날 최초의 비디오게임으로 평가 받는 컴퓨터가 미국의 원자핵 물리학 연구소의 한 젊은 과학자의 손에서 탄생하게 됩니다.
 
 
  
 
[참고 문헌]
http://www.webbox.org/cgi/1951%20The%20worlds%20first%20computer%20game.html
http://www.bmigaming.com/videogamehistory.htm
http://media.daum.net/digital/view.html?cateid=100031&newsid=20101221151417113&p=etimesi
http://www.pong-story.com/intro.htm
http://en.wikipedia.org/wiki/First_video_game
  1. 당시 월트 디즈니라는 사람이 이 박람회에서 영감을 받고 '디즈니랜드'라는 테마 파크를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madmaiz.blog.me BlogIcon 마이즈
    2011.02.14 10:03

    오.. 드디어 윌리 박사님 등장?!

  2. Favicon of http://wiinemo.tistory.com BlogIcon WiiNemo
    2011.02.14 11:45

    예전에 전자 게임의 역사를 배울때,
    시초가 Tennis for two라는 것을 배웠었는데
    알고보니 더 오래된 시초가 있었군요 +_+;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02.14 17:5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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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연산-제어 / 출력이라는 세가지 조건이 맞아야 전자 게임의 조건을 갖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 부분에서 해석하는 견해가 제각각인 것 같습니다.

      저도 당연히 Tennis for Two가 최초인줄로 알고 있었는데, 훨씬 전부터 파고들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Nimatron과 같은 기계식 컴퓨터에 대한 정보도 한번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3. DHL
    2013.04.25 10:19

    오,

    퍼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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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디 게임이 추구하던 방향은, 유희를 통한 가정의 화목 도모가 아니었을까? ::

컴퓨터 게임(PC, 비디오 플랫폼 모두를 포함해서)산업이 시작된지도 어느덧 40년[각주:1]이라는 세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으로 따지면 불혹의 중년기에 접어들게 되는 셈이죠. 가격만 수십억원대에 이르는 커다란 진공관-트랜지스터 덩어리의 메인프레임 컴퓨터 시절부터, 점-선-면으로밖에 그래픽 표현이 불가능해서 TV에 배경 그림이 그려진 오버레이 반투명 용지를 붙여서 플레이하던 시절의 초창기 비디오 게임까지 생각해보면 오늘날 최첨단 그래픽과 퍼포먼스를 자랑하는 엔터테인먼트 도구가 되리라고 100%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어느 수준 이상의 문명의 혜택을 받고 살아가는 현대인들[각주:2]에게 있어서 게임이 시장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끼친 영향이 지대함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년시절에 첫만남을 가진 게임기와의 인연이 현재의 게임 블로거 활동으로 이어지면서 그토록 좋아하고 사랑하는 비디오게임의 역사를 정리해보고 싶었지만 관련 지식의 부족을 핑계로 미루고 미뤄왔던 그동안의 시간들을 반성(?)삼아, 내년이면 40주년을 맞게되는 비디오게임 역사를 연재하는 계획을 세워봤습니다. 이 작업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 올 해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블로그 활동을 이어가는 한 꾸준히 진행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게임의 역사 속을 살아가고 있을테니까요. =)
  
이제부터 우리는 전자 게임의 형태를 지닌 최초의 게임들을 살펴본 뒤에, 랄프 베어(Ralph Baer)라는 사람이 40개의 트랜지스터로 구성된 프로토타입 게임기 '브라운 박스'를 만드는 것을 계기로, 게임기를 최초로 상용화해서 판매한 1972년부터 TV 또는 디스플레이에 연결해서 플레이하는 비디오게임(콘솔)을 기준으로 1세대 부터 현재까지 (2011년 기준 7세대) 나누는 북미 방식을 기준으로 역사를 살펴보게 됩니다.
   
  

:: 최초의 상업용 게임기의 프로토타입, 브라운박스(Brown box) ::

'게임기'라는 하드웨어를 기준으로 포스팅하지만 그 시절에 산업의 판도를 뒤 엎은 경제, 비즈니스, 사회적 현상이나 유명한 게임들과 브랜드를 가미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게임 산업을 일으킨 '아타리'가 어떻게 무너졌으며 화투나 장난감등을 만들어 팔던 완구 회사 '닌텐도'가 어떻게 오늘날 멋진 게임회사로 거듭나게 되었는지 확인하실 수 있게 됩니다.
 
사실 게임의 역사는 게임 기업 뿐 아니라 동시에 IT 기업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소니, 구글, 페이스북 등 세계 굴지의 IT업체들 중에 '게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기업이 몇이나 될까요? MS는 이미 Xbox360으로 비디오 게임 산업의 큰 손이 되었고 오늘날 IT업계의 아이콘이자 신화를 창조한 애플 역시 한 때 비디오게임기를 만들었다가 고배를 마신 에피소드 등 여러 기업들이 실패와 재기로 반복 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실 겁니다.
  
늘상 강조드리는 부분이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아마츄어 게임 블로거입니다. 게다가 게임과는 전혀 무관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보니 연재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이기도 솔직히 민망하긴 합니다. 따라서 제 글에 부족한 부분도 많고, 잘못된 정보도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런 부분이 보이시면 꼭 지적해주셔서 포스팅을 함께 완성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이야기를 위해 지금으로부터 약 65년전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볼까요? =) 
 
 
 
  

:: 이 기계는 뭐에 쓰는 물건인고? ::

  
  1. Ralph Baer가 최초로 게임기 비즈니스를 시작한 1972년, 마그나복스의 오디세이를 기준으로 한다. [본문으로]
  2. 어차피 게임은 영화나 연극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산업군에 포함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생활 수준이 낮은 곳에서는 게임 산업이 일어나기가 힘들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lineni.com BlogIcon 리넨
    2011.02.12 16:35

    오옷, 기대기대+_+

  2. Favicon of http://wiinemo.tistory.com BlogIcon WiiNemo
    2011.02.13 10:28

    이거 정말 게이머로서 필독해야 할 글인데요
    태현님 글 기대하겠습니다 +_+

  3. Favicon of https://helloprogrm.tistory.com BlogIcon Mailo
    2012.07.05 13:57 신고

    늦게 발견한게 아쉬운 글입니다ㅠㅠ 게임 블로그를 가볍게 운영하고 있는데요. 이런 지식은 어디서 습득하시는지 궁금하네요. 그릭 연재 글 잘 읽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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