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하는 글 673

  1. 2015.12.28 아이폰 가계부 어플, 벤토이(VENTOY) 3년 개발 경험담
  2. 2014.11.05 페이스북에서만 정보를 접하는 위험성
  3. 2014.03.27 콘솔게임의 역사 (20) 스페이스 인베이더
  4. 2014.03.21 콘솔게임의 역사 (19) 타이토(TAITO)
  5. 2014.03.06 콘솔게임의 역사 (18) 워너와 아타리의 갈등 (1)
  6. 2014.02.27 콘솔게임의 역사 (17) 프로젝트 스텔라(STELLA)
  7. 2013.12.25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는?
  8. 2013.10.20 그래비티(Gravity 2013), 청각에 집중하는 영화
  9. 2012.12.18 콘솔게임의 역사 (16) 아타리의 도전, 2세대 콘솔
  10. 2012.07.04 콘솔게임의 역사 (15) 2세대 시작, 페어차일드 채널 F (Fairchild Channel F) (1)
  11. 2012.06.28 콘솔게임의 역사 (14) 닌텐도 최초의 게임기, Color TV Game (5)
  12. 2012.06.26 콘솔게임의 역사 (13) 완구회사 닌텐도 (1)
  13. 2012.06.24 이룰 수 없는 꿈일지라도
  14. 2012.05.21 콘솔게임의 역사 (12) 닌텐도의 정체성 (5)
  15. 2012.04.13 콘솔게임의 역사 (11) 닌텐도의 탄생 (Nintendo) (4)
  16. 2012.04.03 콘솔게임의 역사 (10) LCD 액정을 입은 휴대용 게임기들 (2)
  17. 2012.03.28 콘솔게임의 역사 (9) 휴대용 게임기의 출현
  18. 2012.03.12 [넌센스2] 개성 만점의 좌충우돌 수녀원 이야기 (2)
  19. 2012.03.08 사랑받는 온라인 서비스를 만들기 위한 2가지 기본 조건? (2)
  20. 2011.12.31 진정한 부(富)란 무엇일까? [존 러스킨 -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3)
  21. 2011.12.26 콘솔게임의 역사 (8) 가죽 공구사에서 전자게임 회사로, 콜레코 텔스타 (Coleco Telstar) (2)
  22. 2011.10.06 Steve Jobs 1955-2011 (2)
  23. 2011.09.29 페이스북의 새로운 오픈그래프(New Open Graph)가 가져다 줄 변화 (2)
  24. 2011.09.26 페이스북의 새 프로필, 타임라인(Timeline)을 미리 만나봅시다. (적용 방법 및 기능 살펴보기) (8)
  25. 2011.07.14 [마당을 나온 암탉]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한국 애니메이션 (13)
  26. 2011.07.09 서래마을 프랑스 레스토랑 'July'
  27. 2011.06.29 게임의 룰 : 이번 여름방학, 우리 아이 게임 관리는 어떻게 하실건가요? (2)
  28. 2011.05.05 Apple iPad 2 (애플 아이패드2)
  29. 2011.04.25 [미소 - 춘향연가] 고전과 현대적 감성의 조화 (4)
  30. 2011.04.11 콘솔게임의 역사 (7) 퐁(PONG) (8)

:: 아이폰 전용 가계부 앱 VENTOY - 벤토이 가계부 ::

아이폰 앱스토어 : https://itunes.apple.com/kr/app/ventoy-bentoi-gagyebu/id1059378863

오랜만에 블로그 포스팅을 합니다. 핑계겠지만 지난 3년 반의 시간동안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어, 블로그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제 블로그를 통해 결실을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목부터 유난스럽게 개발 기간을 강조한 이유는, 개발에 ‘개’자도 모르는 생판 초짜들이 긴 시간과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결과물을 내놨기 때문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계신 개발자 여러분, 존경합니다.) 혹, SW 개발에 대한 목표나 꿈을 가지고 계신분들이 보시고 긍정적인 자극과 도전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큰 기쁨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저희 팀을 간단하게 소개해드리면, 디자이너(팀 대표)는 UI-디자인-프론트앤드 개발을 담당했고, 마케터는(본인) DB-서버-백앤드 개발을 분담해서 진행했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2000년대 초에 엔트리브(&손노리)의 MMORPG 트릭스터 온라인의 공식 팬사이트인 ‘트릭월드’ 라는 자체 커뮤니티 사이트를 만들어서 공동 운영해왔습니다.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게임을 굉장히 사랑하는 청춘들이었죠.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구요) 아쉽게도 이 게임은 서비스를 종료했고, 저희 커뮤니티도 운영을 종료하여 현재 방명록만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10년간 게임 커뮤니티 운영 경험을 통해 서비스 운영을 직-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었고, 이는 사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재미있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서 수익 실현도 동반하고 지속 성장이 가능한 서비스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의기투합 하였습니다. 여러가지 비즈니스 아이디어가 오가던 중에, 평소 돈관리와 가계부 작성에 관심이 많던 디자이너가 스마트폰용으로 재밌는 UI와 게임 요소를 가미해서 ‘가계부’ 앱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선택되어 본격적인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 기획 당시 UI 아이디어 노트 ::

우선 기존의 단순 셀 입력 방식에서 벗어나 계좌에서 돈이 이동하는 흐름을 (이체를 하거나 지출을 하거나 수입이 들어오는 등)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Drag UI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기획 당시엔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면서, 가계부에서도 터치를 이용해 재밌는 경험을 줄 수 있을거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기존 가계부들은 대부분 지출이나 이체 수입 등이 발생했을 때의 금액 기록에만 집중할 뿐, 무엇을(what) 사고 벌었는지에 대한 기록과 관리를 할 수 없어서 불편했습니다. 즉, 내가 그동안 커피를 얼마나 마셔왔고 담배를 얼마나 샀는지 가계부를 통해 알 수가 없던거죠. 이 점에 착안해서 나온 것이 ‘아이템’ 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게임을 좋아하는 두 사람의 경험에서 나올 수 있던 아이디어 였습니다.

사실 가계부라는 것이 써보신 분은 잘 알겠지만, 굉장히 번거롭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소까지 세분화해서 기록하게 되면 더 복잡해서 이용자들이 쉽게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죠.

:: 인벤토리와 아이템 기획부터 실제 구현까지 ::

하지만, 가계부 만만치 않게 복잡하고 어려운 게임이 있지만 사람들이 몰입하고 빠져듭니다. 아이템을 모으는 재미나 목표설정, 성장에 대한 즉각적인 보상 등이 게임을 반복적으로 이용하고 즐기는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가계부의 세부 지출-수입 항목들을 ‘아이템’으로 만들어서 관리하도록 기획했습니다. 즉, 내가 실제로 지출한 담배와 초콜릿 등이 가계부 내에서 아이템이 되어 모으고 관리하게 되는거죠.

이렇게 여러가지 게임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어느정도 기획이 다듬어져 가니, 슬슬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단 디자이너가 웹페이지로 된 프로토타입을 만들었습니다. 원형으로 중앙에 선택된 계좌에서 각 지출 카테고리별로 드래그해서 입력 하도록 하고, 입력된 기록들은  다이어리처럼 날짜별로 분류해서 볼 수 있게 하는거죠.

:: 첫 프로토타입 제작 당시 ::

프로토타입도 마음에 들게 뽑힌 것 같은데, 뭔가 허전하더군요. 왜그런가 생각했더니 서비스의 심볼, 즉 마스코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스코트로 삼을 캐릭터를 추가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새 서비스의 마스코트 캐릭터 ‘로이(Roy)’가 완성되었습니다. 기획 초기엔 지금의 동물 보다는 몬스터 느낌으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 마스코트 캐릭터 ‘로이’ 디자인들 ::

서비스 및 브랜드 이름은 '내 인벤토리를 관리해주는 자산관리 친구(My Inventory toy)’라는 뜻에서 따와  VENTOY(벤토이)라고 지었습니다. 벤토이의 첫 서비스는 가계부 앱이 된 것이죠.

이렇게 1년 가까이 재밌게 기획을 하고 이제 실제로 만들 단계가 되었을 때 첫 번째 현실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개발자’의 부재입니다. 저희가 느낀 것 이상으로 앱 개발은 진입장벽이 높았습니다. 두 사람 다 웹사이트 제작 경험이 있었다 하더라도 앱은 전문 개발자가 없으면 시작조차도 할 수 없겠더군요. 다행히 마케터의 대학시절 친구 개발자를 권유한 뒤 본격적으로 3인의 앱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단 여기까지는,

둘 다 웹사이트를 제작한 경험이 있으니 앱 개발은 잘 몰라도 충분히 도와가며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서로 동기를 부여해주며 잘 해쳐 나가면 중간에 흐지부지되거나 개발자가 이탈하는 등의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엔 3명 모두 각자의 생업이 있었고 주말 파트타임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개발자 친구의 본업이 너무 바빴습니다. 프로젝트는 아무 진척 없이 무풍지대 망망대해에 멈춰 있었고, 결국 개발자는 프로젝트에서 탈락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굉장히 곤란스러웠죠. 기획을 1년 가까이나 했는데, 포기해야 하나 싶은게...

'아... 어떡하지...'

이제 남은 것은 다시 두 사람. 원점으로 돌아가니 현실적인 문제를 또 만났죠. 개발자 없는 지금, 이 프로젝트를 포기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여기서 디자이너 친구가 직접 공부해서 개발 하자는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개발이 싫어서 고민하던 저도 결국은 그 뜻에 동참하게 되었고, 이렇게 개발 초보 2명의 앱 개발 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2013년도 6월부터 본격적으로 개발을 공부하며 만들기 시작했으니, 앱이 출시된 올 2015년 12월 11일까지 개발에만 약 2년 반의 시간이 소요 되었네요.


:: 열심히 개발 중이던 여름 어느 날 ::

풀타임으로 전환해서 새 사무실에 입주하기 전까지 근 2년간은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코딩 했습니다. 어떤 카페에서는 커피 몇 잔 시켜놓고 너무 오래 앉아 있는다고 눈치를 주는 통에 쫓겨 나기도 하고, 새 보금자리를 발견하여 안도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앱이 완성되어 갔습니다. (이 글을 빌어 이수역 카페코헨에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그리고 역시 눈치 없이 작업하는데는 스타벅스가 최고입니다.)

이론으로만 배웠기에 피부로 와닿지 못하던 개념들, MVC가 무엇인지, 포인터는 어떻게 쓰는건지, 그리고 왜 삼각함수 같은 수학공식이 필요한지 체감하게 되는 등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돌아보면 다 뿌듯하고 즐거운 기억들만 남게되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협업에 있어서도 때로는 사소한 걸로 의견 대립이 발생하기도 했고, 개념파악이 안된 채 ‘개발자의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도 배울수 있던 귀중한 3년 반의 시간이었습니다.

:: 3년간 기획부터 개발, 출시까지 메인 디자인 변천사 ::

사실 모든 SW나 서비스 개발 과정이 그렇지만, 초반에 계획한 그대로 실행되는 것은 별로 없더군요. 만들다가 뒤엎고 잠시 잊고 지낸 옛날 아이디어를 다시 가져오는 등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드디어 앱을 완성했습니다. 앱스토어에 내가 만든 앱이 올라갔을 때의 그 감동이란... :-)

앱 출시에 대한 감동도 잠시, 이제야 겨우 서비스를 위한 ‘시작점’을 통과한 것이기에 앞으로 가야할 길이 험난하기만 합니다. (출시와 동시에 심각한 버그와 부족한 기능으로 숨가쁘게 업데이트를 해야 했구요) 출시 때 느낀 그 감동과 사명감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자 합니다.

:: 카드 지출 플로우차트 기획 노트 (정작 개발 시작하고나선 DFD는 거의 쓸 일이 없었지만...) ::

SW 개발을 시작하고 싶은 분들에게

혹, 이 글을 읽고 계씬 분들 중에 '나도 개발 공부를 시작하시고 싶다.'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제 경험을 토대로 드릴 수 있는 팁은 다음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정답은 아니니 '그랬구나' 정도로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1.이론적인 공부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일단 중요한 것은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무조건 시작하시고 실행하세요. 간단한 계산기 프로그램이라도 좋습니다. 제 경우에도 당장 앱 제작을 시작한 건 아니고, 예제로 가계부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가지 금액 입력, 계좌 생성 등 작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며 실력을 쌓아갔습니다.

2.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나았습니다. 함께 공부하고 진행할 파트너가 있으면 서로 꾸준하게 동기부여와 자극도 되고 지치지 않았습니다. 개발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뒤로는 단 한 번도 서로 포기하자는 말을 꺼낸 적도 없었구요.

3.스스로 코딩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초반에는 전문 개발자와 스터디를 구성해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위 영상처럼 저희도 개발 초기엔 다른 개발자 친구와 3~4명이서 스터디를 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배웠습니다.

4.오늘날은 정말 공짜로 개발을 배우기에 축복받은 환경입니다. 모르는 건 구글신이 검색하면 대부분 답해주니까요. 대신 영어로 검색하셔야 합니다. (특히 stackoverflow에서 많은 질문과 답변 게시물이 검색 됩니다.)

5.국내에도 개발 커뮤니티가 많이 있습니다. 아이폰 개발의 경우 국내 '맥부기'라는 네이버 카페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서버쪽 언어나 기본 개념은 생활코딩에서 시작하시면 큰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특히, 생활코딩은 페이스북 그룹도 존재하니, 질문을 올리시면 개발자분들이 친절하게 답변해 주시기도 합니다.

6.개발 초보는 선 구현, 후 최적화입니다. 만들면서 최적화 생각하면 개발 속도가 느려지더군요. 일단 어떻게든 돌아가게 만드시면, 그 쯤 실력이 올라가 있어서 최적화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초반엔 최적화 생각하면서 만들 짬도 안됐었지만...)

아, 무엇보다 개발을 하다보면 성취감에 대한 기쁨이 굉장히 크더군요. 특히, 막혀있던 것이 풀릴 때 그 쾌감이란...ㅋ 아무쪼록 개발에 관심이 있거나 막연하게 목표를 가지고 계신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시작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바로 이런 희열감을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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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ge Rank ::

페이스북의 엣지랭크(Edge Rank) 시스템은 여러 규칙을 담은 알고리즘에 의해 내 뉴스피드에 노출되는 친구 글의 우선순위를 결정합니다. 쉽게 말해, 지금 나에게 가장 친밀감이 높을 만한 친구(또는 페이지)의 콘텐츠를 뉴스피드에 우선 노출해주는 것이죠. (물론 최신순으로 보는 옵션이 별도로 있지만, 대부분 모르는 데다 잘 이용도 안 하니 이 글에선 논외 대상)

그런데 이 '친밀감'이라는 게 상대방의 콘텐츠에 반응하는 행동(좋아요, 공유, 댓글, 클릭 등)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페이스북에서 내가 자주 연락하고 반응하는 친구는 앞으로 뉴스피드에서 더 많이, 그리고 자주 보이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반대로 활동을 거의 안 하는 친구나, 내 관심에서 멀어지는 친구는 자연스럽게 페이스북 공간에서 잊혀져 갑니다. 눈에서 멀어지는 친구가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아무튼, 우리의 언행은 종교, 철학, 정치, 이념 등 평소 관철하는 개개인의 신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굉장히 다양하지만 대개 자신의 가치관에 반하는 것들은 무시하거나 잘 드러내려 하지 않게되죠.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활동하다 보면 내 성향과 비슷한 사람들과 주로 소통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는 결국 엣지랭크에 의해 뉴스피드가 호감 가는 성향의 정보 위주로 노출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연결이란 '끼리끼리'가 본질이겠죠)

그래서, 내가 정보를 접하는 경로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 '뿐'이라면, 꽤 위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순 사생활 교류나 문화 생활 등에 대한 정보라면 크게 문젯거리가 될 건 없겠지만, 나와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이 페이스북에 펼치는 이념과 철학, 종교, 정치 등이 얽힌 정보들 위주로 뉴스피드에 노출된 채 오랜 시간이 흐르면, 내 생각/가설에 일치하는 것만 강조하고 반대되는 건 무시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오류'에 빠질 위험이 커집니다. 한때 우리는 트위터에서 페이스북으로 이어지는 소셜미디어가 기성 미디어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여기며 환영했지만, 개개인의 연결로 이루어지는 소셜미디어가 도리어 나를 편협한 사람으로 만들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사고를 확증하기 위해서는, 반증의 수단으로 다양한 미디어 채널을 합께 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요즘은 내가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여러 미디어 채널들을 등록만하면 Feed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들이 많으니 이 점을 참고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한 오늘날, 우리는 네트워크의 홍수 속에서 다양한 경로로 미디어를 접하면서 과연 내가 접하는 도구들이 날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올바른 도구의 사용에 대해 고민하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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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도심 곳곳에 붉은색 배경에 외계인 모양의 간판을 한 게임 센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978년 타이토가 출시한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일본 게임 역사에 성공 신화를 쓴 최초의 게임 기업이었다. 사진은 저자가 2013년에 오사카 여행 중 니혼바시 역앞에서 촬영한 타이토 스테이션 건물 전경 ::

(지난 시간에 이어서)

1978년 7월,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s)가 출시될 당시 일본의 시대 상황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선샤인60이 완공되고, 나리타 공항의 개항, 디스코가 유행하는 등 고도성장이 한창이던 시기였습니다. 게임 시장 역시 미국에서부터 들여온 아타리의 퐁(Pong) 시리즈와 이 게임의 영향을 받은 여러 카피캣 게임들이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었고 아직 아케이드 게임 센터는 백화점 옥상이나, 다방, 바(Bar) 같은 곳에 비치되어 있는 정도로 작은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 침략자(Invaders)가 일본의 게임 시장을 완전히 뒤집어놨습니다.

인베이더 신드롬 (Invaders Syndrome)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출시 후 일본과 미국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퐁(Pong) 이후로 잠시 정체되었던 아케이드 비디오 게임 시장은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맛보게 되었고 이 게임으로 인해 사회적인 신드롬 현상까지 발생합니다. 하루에 4억엔에 이르는 100엔짜리 동전이 사용되면서 동전 공급 부족 현상을 겪게 되고 '인베이더 하우스'라는 전용 게임센터가 생기지만, 질 나쁜 성인들과 청소년들이 모이면서 폭력과 절도 등의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등 게임센터의 이미지가 나빠졌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출입을 금하는 교칙이 추가되기도 했습니다.

:: 일본 전역에 스페이스 인베이더 전용의 '인베이더 하우스'가 활성화 되면서 본격적인 게임센터 시대가 열린다. ::

:: 1979년 성인과 청소년 모두 스페이스 인벤이더를 즐기는 모습 (출처 : 아사히 신문 발췌) ::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일본에서만 수십만대의 아케이드 기기가 판매되었고, 미국에서는 오늘날 미드웨이의(Midway Games) 전신인 Bally-Midway Manufacturing을 통해 1979년 한 해에만 6만대의 기기를 판매합니다. 미국의 경우, 1977년에 개봉된 스타워즈의 영향으로 우주 배경의 이야기와 상품들 소비가 급증하면서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어떤 게임이기에 이토록 사회적인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큰 인기를 얻을 수 있던 걸까요? 단순히 유행에 맞춰 우주 배경으로 게임을 만든 이유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게임은 게임 플레이부터 개발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80년대의 게임 들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슈팅 게임의 선구자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재밌던 이유는 기존의 게임 방식의 틀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게임은 자신이 플레이하는 객체 외에 다른 대상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레이싱 게임조차도 마치 고정되어 있는 듯한 장애물이나 자동차를 피해 다니는 정도였죠. 하지만 이 게임에 등장하는 외계의 침략자들은 플레이어를 직접 공격합니다. 내가 적을 공격할지언정, 적이 나를 공격하는 경우가 없었던 기존의 게임들을 빗대어 보면,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플레이 방식은 '혁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엔딩이 없는 것도 특징입니다.[각주:1] 결국 플레이어는 자신이 죽을 때 침략자들의 침범을 허용하고 맙니다. 게임기마다 플레이어가 얻은 스코어로 RANK를 기록하는 오늘날의 슈팅게임 형태도 바로 스페이스 인베이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에 없던 독특한 게임 방식으로 크게 성공하자 슈팅게임 장르가 새롭게 형성 되었고, 향후 남코의 갤럭시안과 갤러그가 연이어 성공하면서 슈팅게임의 전성기를 열게 됩니다.


:: 1978년 초기 버전의 스페이스 인베이더 플레이 영상 ::

1인 개발, 니시카도 토모히로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개발자 니시카도 토모히로(西角友宏)는 당시 타이토의 아케이드 게임 핵심 개발자였습니다. 배경음-효과음을 만드는 것 외에 전부 혼자서 이 게임을 개발해냅니다. 니시카도는 당시 일본의 마이크로컴퓨터 기술로 게임을 개발하는데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컬러와 사운드, 적의 속도 등을 구현하는데 성능이 뒷받쳐주지 못했죠. 아케이드 게임 기판(PCB)를 새롭게 구성해야만 했습니다.

CPU는 미국산 Intel 8080 채택하고 아날로그 써킷과 TI(Texas Instruments)社의 SN76477 칩을 조합해서 기판을 완성합니다. 게임은 CRT 모니터에 픽셀 단위로 래스터 그래픽을 제공한 오늘날의 2D 게임 형태를 갖췄고, 모노사운드를 제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판을 커스텀하게 구성한 이유였을까요? 니시카도는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게임을 프로그래밍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적들을 컬러로 구현하거나, 적들의 침략자들의 속도를 빨라지게 구현하는 부분이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하드웨어 문제 였습니다. 프로세서 성능상 디스플레이에 객체들이 적어야 빠른 속도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결국 게임을 새롭게 디자인해야 했습니다. 처음에 화면상의 적들 수가 많을 때는 속도를 천천히, 그리고 적들의 수가 줄어들 수록 점점 속도가 빨라지게 구현합니다. 마지막 한 마리가 남을 때 엄청난 속도를 보여주는 것도 하드웨어 리소스를 활용한 결과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1978년 최초 모델은 컬러 그래픽을 구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각주:2] 대신, 샐로판지를 붙여서 각 층마다 색깔이 달라지도록 보이는 가림수를 선택하는데요, 재치있는 방법이었습니다.

::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PCB ::

최초의 게임 음악?

게임 음악 역사 관점에서도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한 번의 혁신을 이룹니다. 효과음과 배경음이 구별되어 '동시에 들리는' 최초의 게임이었기 때문이죠.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플레이어는 자신이 이 외계 침략자들에게 발사하는 미사일 소리와 외계 생명체로부터 날라오는 포화 소리를 통해 게임에 몰입하는 동시에, 우주라는 공간의 긴장감을 살리고자 하고자 게임내내 계속해서 흐르는 배경음을 삽입합니다.

"사운드는 외주를 통해 만들었는데요, 저는 외계인이 다가오는 그 순간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심장 박동소리와 같은 형태로 배경음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또, 게임 중간 화면 상단에 빠르게 지나가는 빨간 UFO가 우주 저편에 있는 느낌이 전해지도록 효과음을 추가 했죠.[각주:3]" - 니시카도 토모히로

이 심장박동 배경음은 외계 침략자들이 점점 플레이어 앞에 다가올 수록 빨라지고 나머지 적이 하나만 남았을 경우에는 최고조에 달합니다. 코앞에 적이 다가온 긴장감을 음악으로 극대화 시킵니다. 이런 디테일과 치밀함이 게임을 즐기는 이들을 매료시켰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전세계를 순회하며 명작 게임 음악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여는 VIDEO GAME LIVE는 게임 음악의 역사를 시작한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상징하는 로고를 이용하고, 매 공연마다 청중을 초대해서 스페이스 인베이더 게임을 즐기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

최초의 써드파티(Third-Party) 게임, 킬러 타이틀(Killer App)의 시작

이제 비디오 게임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977년에 아타리는 워너 커뮤니케이션에 인수되어 1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개발 비용을 투자 받으면서 차세대 콘솔 게임기인 아타리 VCS(2600)를 출시하지만 1~2년간 시장의 냉담한 반응으로 난항을 겪었습니다. 워너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결국 사장인 놀란 부쉬넬은 자신이 창업한 회사를 나오게 되고, 아타리는 실패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18화 내용 참고)

하지만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위기에 빠진 아타리 VCS를 구원합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실적은 1978년 출시 후 한 해에 일본에서만 10만대의 기기가 설치되었고 6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하였고 2년뒤인 1980년이 되었을 때는 설치된 아케이드 기기가 30만대로 늘어난데다 미국에서도 6만대가 설치되었습니다. 1개 기기 당 연 평균 2~3천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하니, 설치만 하면 고수익을 보장하는 게임 기계였습니다.


:: 스웨덴의 아타리 2600 TVCF.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앞세워 소개하고 있다. ::


:: 연예인이 광고하는 아타리 VCS 전용 스페이스 인베이더 TVCF ::

이런 상황에서 아타리는 1980년 1월, 타이토와 함께 아타리 VCS 전용의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출시합니다. 다른 게임 회사의 타이틀을 출시하는 써드파티(Third-Party)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아타리는 1980년 한 해에만 200만대의 VCS 판매고를 달성하고 20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킬러 타이틀의 힘을 확인하게 됩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로 크게 성공하자, 써드파티 전략에 확신을 얻은 아타리는 VCS를 오픈해서 여러 게임 회사들을 초대합니다. 이제 아타리를 필두로 아케이드 게임과 비디오 게임은 몇년간 찬란한 황금기를(Golden Age)를 만끽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개발한 니시카도 토모히로 초상화로 만든 아트워크. (ⓒ Charis Tsevis. Powered by Bēhance Prosite) ::

[참고 자료]

http://nyamuko.cocolog-nifty.com/blog/2011/09/post-0280.html
http://spaceinvaders.jp/about.html
http://d.hatena.ne.jp/M_perrier/?of=30
http://en.wikipedia.org/wiki/Tomohiro_Nishikado
http://en.wikipedia.org/wiki/Space_Invaders
http://content.usatoday.com/communities/gamehunters/post/2009/05/66479041/1#.UzBCwVfH0tE
http://www.behance.net/gallery/Gadgets-Games-Robots-and-the-Digital-World/2665299
http://www.videogameslive.com/index.php?s=info


  1. 화면의 침략자들을 모두 소탕하면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구조다. [본문으로]
  2. 차기 버전의 아케이드 기기 부터는 컬러 게임으로 출시한다. [본문으로]
  3. 2009년 5월 6일 USA TODAY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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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8월 24일, 타이토(TAITO)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창립 60주년을 기념하는 축전을 게재한다. 오랜 역사를 지닌 게임 회사들이 그렇듯, 타이토 역시 처음에는 보드카를 일본에 수입하는 무역회사로 시작해 격동의 70년도에 게임회사로 전환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2005년 스퀘어에닉스에 인수되기까지 슈팅게임의 대명사로 게임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으며 1978년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큰 성공으로 향후 닌텐도 같은 일본 회사들이 미국 게임 시장으로 진출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미지 출처 : 타이토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

(지난 시간에 이어서)

1950년, 유대계 러시아인 사업가 미하일 코건(Michael Kogan)은 일본에 최초로 보드카를 수입하는 사업을 시작합니다. 최초 사명은 타이토양행(太東洋行). 3년 뒤인 1953년 타이토 무역주식회사(TAITO Trading Company)로 변경하고 보드카 증류 및 판매를 이어가는 동시에, 납품하는 주점(Bar)에 주크박스와 같은 오락기기를 수입하고 임대하는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확장해 갑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 이미 타이토는 일본 내에 보드카와 주크박스 사업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 주크박스 사업의 성공은 타이토가 향후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자연스럽게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은 1966년 타이토의 주크박스 카탈로그 지면 광고. (사진 출처 : 타이토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

아케이드 게임 사업 시작

타이토는 주크박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아케이드 게임 사업을 시작합니다. 오늘날 사명인 타이토 주식회사(TAITO Corporation)로 변경하는 1972년까지 크레인 뽑기 게임기, 핀볼 게임기, 축구, 배구 게임기 등 10년간 40여개의 기계식 아케이드 게임을 출시합니다. 일본 시장 뿐 아니라 미국, 브라질 등 해외 시장에 핀볼 사업을 확장하는 등, 1970년대에 이르러 타이토는 게임 회사로 완벽하게 변신했습니다.

특히 70년대 브라질 아케이드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 받는데요, 1972년에 타이토 브라질 지사를 출범할 당시 브라질 전역에 400여개의 핀볼 게임 기계가 설치되어 있는 아케이드 센터를 인수하면서 임대 사업을 확장했고, 더욱이 1975년도에는 도박 기계였던 핀볼이 순수 게임 기계로 인정 받게 되면서 여러  제약이 풀려 사업에 박차를 가합니다.

:: 타이토 브라질 지사의 수장은 창업자 미하일 코건의 아들, 아바 코건(Abba Kogan)이었다. 그는 항상 화려한 복장과 큰 목소리로 청중의 시선을 사로 잡는 스타일이었다고 전해진다. ::

일본 최초의 상업용 전자 게임 'Elepong'

핀볼 게임기 임대 사업을 이어가던 타이토는 1972년 미국 아타리가 퐁(Pong)으로 아케이드형 비디오 게임 시장을 개척했을 때 발 빠르게 전자 게임 개발을 시작합니다. 기계식 아케이드 게임만 개발하던 타이토에게 퐁(Pong)의 성공 신화는 비디오 게임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이듬해인 1973년에 일본 최초의 전자 게임인 'Elepong'을 시장에 출시합니다.

Elepong은 기존에 아타리의 퐁(Pong)과 아주 유사한 탁구 게임으로, 페들을 돌리며 조작하는 것부터 2인 대전하는 방식까지 같았기에 창의성 있는 게임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타이토가 오늘날의 비디오 게임 회사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출발점이 되어준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 일본 최초로 출시된 상업형 전자 게임 Elepong. (이미지 출처 : 타이토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

이후로 타이토는 매년 5~6개 이상의 아케이드형 비디오 게임을 개발합니다. 퐁(Pong)류의 스포츠 게임을 시작으로 Attack UFO와 같은 스틱형 슈팅 게임, 실제 자동차 휠로 구동하는 스피드 레이스(Speed Race) 등으로 일본 뿐 아니라 아타리가 지배하는 미국 시장에도 명성을 쌓아가게 되는데요, 1976년도까지 타이토가 4년간 출시한 아케이드형 비디오 게임만 총 20종이었고, 1977년 한 해에 출시한 게임만 23종에 이르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 1974년에 출시한 Basketball. 제한 시간 내에 점수를 많이 내는 사람이 승리하는 단순 게임이다. ::


:: 역시 1974년에 출시한 레이싱 게임 Speed Race. 실제 자동차휠로 조종했으며,
다른 차에 부딪히면 끝나기 때문에 레이싱 게임이라기 보다는 슈팅게임에 가깝다. ::

스타워즈(Star Wars) 신드롬

1977년 당시 타이토 비디오 게임 개발 수장이던 니시카도 토모히로(西角友宏)는 신작 게임의 프로토 타입을 제출하는데요, 플레이어가 전투기를 격추하는 슈팅 게임 장르였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하드웨어 성능의 한계로 이 비행 물체가 쉽게 예측 가능한 내에서 너무 부드럽게 움직이는 문제를 겪었습니다.[각주:1] 결국 전투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선회해서 격추하는 대상이 '사람'이 되도록 계획을 수정합니다. 하지만 타이토 경영진은 사람을 맞추는 비도덕적인 게임은 허가할 수 없다며 프로토타입을 기각시킵니다.

결국 니시카도는 다른 방향으로 게임을 새롭게 기획해야만 했습니다. 마침, 1977년 미국은 그 해 출시된 영화 스타워즈(Star Wars) 신드롬으로 우주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면서 우주 소재의 SF 소설책과 연관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SF의 영원한 고전인 H.G.웰스의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적을 디자인 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타이토의 신작 게임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 소설 우주전쟁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마치 오징어나 문어를 연상하는 모습이었다. 니시카도 토모히로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새롭게 적 캐릭터를 디자인한다.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

[참고 자료]
http://historiadosgames.wordpress.com/2010/09/15/%E2%80%9Cdo-atari-ao-zeebo-a-historia-dos-videogames-no-brasil%E2%80%9D-2/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Taito_games
http://en.wikipedia.org/wiki/Space_Invaders
https://www.facebook.com/TAITO.Eng
http://www.behance.net/gallery/Gadgets-Games-Robots-and-the-Digital-World/2665299
http://www.1up.com/features/ten-space-invaders


  1. 당시 프로토타입에 사용하던 프로세서는 인텔에서 생산한 8bit의 Intel 8080 칩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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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아타리는 차세대 콘솔인 VCS(VIDEO COMPUTER SYSTEM)을 출시한다. 오늘날 게임 업계에 전설로 알려져 있는 것과는 상반되게, 출시 직후 워너 커뮤니케이션의 경영 개입으로 아타리와의 관계가 악화된다. 결국 창업자 놀란 부쉬넬은 이듬해에 대표 자리에서 사퇴하게 이른다. (사진은 1980년에 출시된 4개 스위치 모델인 CX-2600A의 지면 광고) ::

(지난 시간에 이어서)

1977 : 250,000 Units

숫자로 보는 아타리의 차세대 콘솔 VCS(VIDEO COMPUTER SYSTEM)의 출시 1년차의 판매량은 처참했습니다. 1억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개발 비용이 투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퐁(Pong)이 출시되던 시절의 폭발적인 반응을 기대했던 워너 커뮤니케이션과 아타리로서는 시장의 냉혹한 반응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경쟁사인 페어차일드의 채널 F[각주:1]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00 후반대의 비싼 가격도 그렇지만, 그당시 이미 1세대 Pong(퐁)류의 카피캣 게임들이 헐값에 팔리고 있던 시기라 아직 시장은 비싼 금액을 들이면서 2세대를 구입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초창기에 출시된 9가지 게임들이 기존의 Pong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주 원인입니다.

VCS 출시 이후 워너와 아타리 사이에 골이 깊어져 갑니다. VCS의 판매 성적도 나빴지만 거기에 아케이드, 핀볼, 휴대용 게임기 등 다른 사업부까지 예상보다 좋은 실적을 얻지 못하게 되는데요, 결국 워너의 경영 개입까지 더해져 아타리는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시작합니다.


:: 1977년 아타리 VCS의 TV광고 ::


:: 아타리는 지난 Pong 시절과 마찬가지로 Sears사와 OEM 계약을 맺어
Sears Tele-Games 이름으로도 함께 출시한다. ::

계속되는 아타리와 워너 커뮤니케이션의 갈등

출시 후 이듬해인 1978년까지 계속되는 판매 부진은 아타리와 워너 케뮤니케이션의 경영진들 사이에 불화를 가중시켰습니다. 빨리 투자 금액을 회수하길 원하던 워너로부터 경영 개입이 깊어집니다. 사실, 워너의 아타리 인수 이후 놀란 부쉬넬과 워너의 관계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경영 효율과 성과 중심의 관료적인 워너와는 대조적으로 연구개발에 집중하는 아타리의 엔지니어 중심 경영 방침이 늘 충돌했는데요. 당시 워너의 부사장이던 Manny Gerard도 처음에 아타리의 연구개발에 집중하는 모습에 긍정적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불만을 토로하게 됩니다.

"아타리의 경영 전략에는 판매도, 광고도, 마케팅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연구개발(R&D)뿐이었죠."[각주:2] - Manny Gerard

그의 말처럼 아타리의 연구개발 중심의 경영 방침은 과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당시 아타리 개발자 들에게 업무 환경은 '천국'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하나의 게임을 개발하는데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완성될 때까지 개입하지 않고 개발자가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하니 대기업 워너 입장에서는 이런 부분 하나 하나 '비 효율'로 보였던 것이죠.

거기다 놀란 부쉬넬은 VCS를 출시하자마자 차세대 게임 개발을 동시에 시작해야 한다고 워너의 경영자들에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기존의 레코드 음악 사업의 마인드로 비디오 게임 비즈니스에 접근하던 워너로서는 VCS는 업그레이드 없이 계속 생산해서 단가를 낮추고, 게임 소프트만 만들어서 팔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엔 VCS의 첫 해 판매량이 부진한 것도 한 몫 했습니다.

"VCS가 출시될 당시, 저는 곧바로 차세대 게임기를 위한 연구 개발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당시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고 우리는 나날이 발전하는 하드웨어에 맞춰 더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너의 경영진은 이 제안을 끔찍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45rpm 레코드(LP) 기계처럼 한 번 만들어두면 오랫동안 비즈니스를 유지할 수 있는 사업이었습니다. 비디오 게임은 이런 레코드 음반 산업과는 다르기 때문에 2~3년 이내로 새로운 하드웨어를 출시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워너의 향후 결정사항에 차세대 게임기 개발은 없었습니다. 훗날 아타리가 붕괴하는 1982년 말까지 말이죠."[각주:3] - 놀란 부쉬넬

이런 식으로 놀란 부쉬넬과의 경영 방침에 마찰이 있던 와중에 Manny Gerard는 1978년 초, 섬유 업계에 몸 담던 Ray Kassar (Raymond Edward Kassar)를 아타리의 소비자 사업부로 영입해 아타리의 경영에 참여시킵니다. 엔지니어링 밖에 모르던 아타리에 전문 경영자가 투입된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아타리에 오기 전까지 게임에 대해선 문외한이었습니다. 당연히 엔지니어 중심의 아타리에 융화되기 쉽지 않았습니다.

:: 놀란 부쉬넬에 이어 아타리의 두 번째 CEO가 되는 Ray Kassar. 그는 아타리에 오기 직전에 게임 산업과 관계 없는 섬유 업계에 있었다. 취임 후 엔지니어 위주의 아타리 사업부들을 뒤집어 놓았고 개발자들에게 양말왕(Sock King), 수건황제(towel czez)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그 역시 아타리 개발자들을 까칠한 프리마돈나(high-strung prima donnas)라고 인터뷰 상에서 언급할 정도로 아타리 직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

창업자 놀란 부쉬넬의 퇴사

앞서 말씀 드렸듯이 1978년, 아타리는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전년도 VCS 출시 후 판매 실적이 부진했고, 창고에는 4,000만달러에 이르는 게임기 재고가 쌓여있었습니다. 놀란 부쉬넬은 올해도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좋은 판매량을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워너는 새로운 경영자 Ray Kassar의 마케팅 계획이 좋은 성과를 얻을 거라 확신했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작합니다.

결국, 놀란 부쉬넬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그 시기에 출시된 스페이스 인베이더(Spcae Invaders)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 입어 게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거기에 Ray Kassar의 공격적인 TV 광고가 더해져 크리스마스 시즌 판매 호조를 이룹니다. 이런 아타리의 활약[각주:4]으로 1978-1979 년도 워너의 소비자 사업부는 2억달러의 영업 이익을 달성하게 됩니다.


:: 1978년 아타리 VCS의 TV광고 ::

놀란 부쉬넬은 워너의 아타리 인수 이후 첫 성과를 인정 받았고, 워너로부터 계속해서 아타리의 게임 사업부의 수장 자리를 이어가길 바랐지만 계속되는 경영 갈등으로 인해 사실상 회사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났다고 꺠닫습니다. 결국 1978년, 그는 비슷한 시기에 개업한 복합 문화 센터인 Chuck E. Cheese's Pizza Time Theatre가 향후 7년간 아타리와 경쟁 사업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아타리 대표 자리를 내려놓습니다. 이렇게 최초의 비디오 게임회사는 엔지니어 창업자와의 이별을 고하고,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아타리를 구원한 Ray Kassar 체재로 돌입합니다.

:: 놀란 부쉬넬이 창업한 Chuck E. Cheese's는 월트 디즈니의 놀이동산에 영감을 받아 피자를 먹으면서 게임과 여러 놀이 문화를 함께 즐기는 복합 공간을 만들었다. 생일 파티의 1등 장소가 될만큼 오늘날까지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아타리의 신임 수장, Sock King(양말 왕)[각주:5] Ray Kassar

아타리의 대표가 바뀌자마자 가장 먼저 조직 개편이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CEO는 그간 아타리가 불필요한 프로젝트가 너무나 많다고 느꼈습니다.[각주:6] 무엇보다 아타리의 핵심이었떤 R&D부서들을 없애거나 대폭 축소하게 되는데요, 그의 경영 방침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지금의 아타리는 이미 출시된 VCS가 당장 잘 팔리는데 집중해야지, 과도한 연구 개발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타리는 엔지니어의 천국이던 회사 업무 분위기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요, 금요일 파티를 폐지하고 드레스 코드를 재정하고 업무 시간을 엄격하게 정하고 회사 건물에 보안 설비와 담당자를 배치하는 등 점점 관료적인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이런 분위기만 봐서는 서서히 암운이 다가올 것 같은 아타리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부터 몇 년 간은 전례 없는 황금기를 맞이하게게 되는데요,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아케이드 게임을 이식하면서 비디오 게임 업계에 써드파티(Third-Party) 시대를 맞이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http://en.wikipedia.org/wiki/Atari_2600
http://en.wikipedia.org/wiki/Atari_2600_hardware
http://www.gamasutra.com/view/feature/132160/atari_the_golden_years__a_.php
http://www.gamasutra.com/view/feature/6364/the_replay_interviews_ray_kassar.php


  1. 재밌는 사실은, 두 경쟁 게임기 모두 1977년 판매량이 25만대였다. http://goo.gl/CwSPRj [본문으로]
  2. Zap: The Rise And Fall Of Atari By Scott Cohen. [본문으로]
  3. [Gamasutra] Atari: The Golden Years -- A History, 1978-1981 [본문으로]
  4. 1978년 아타리 VCS는 55만대의 판매량을 달성한다. 이는 전년도 25만대의 2배가 넘는 수치이다. [본문으로]
  5. 그가 아타리에 오기 전에 섬유 업계에 종사하던 이유로, 아타리 직원들의 비하가 담긴 별명이었다. [본문으로]
  6. 그는 처음 아타리에 입사할 당시 연구개발 중심의 회사 경영상태를 보고 재앙(Disaster)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본문으로]
  1. 익명
    2017.05.16 06:00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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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타리의 신형 게임기 프로젝트 코드명이었던 스텔라(Stella)는 당시 아타리의 엔지니어 Joe Decuir가 붙인 이름으로, 자신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 브랜드명이었다. 예상대로 그는 소위 말하는 '자덕'으로 자전거 광이었고 오늘날 링크드인 프로필 사진에서까지 그의 자전거 사랑을 쉽게 엿볼 수 있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워너 커뮤니케이션 산하에서 안정적인 투자를 받으며 신형 게임기 스텔라 프로젝트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아타리. 하지만 생각처럼 개발 과정은 수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정도 급박했고, 하드웨어 부품 단가 절감과 수율 문제 등 여러가지 고충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스텔라의 하드웨어 개발 과정을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아타리의 고군분투를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프로세서, MOS 6507

:: MOS 6507 ::

앞서 아타리는 스텔라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 MOS와 6502 프로세서 계약을 체결했다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물은 6502가 아니라 스텔라의 가격 효율성을 맞추기 위해 새롭게 고안한 소형 MOS 6507 이었습니다. 6507은 1.19Mhz 클럭으로 동작하며 메모리 어드레스 라인을 16핀에서 3핀을 줄인 13핀만으로 최대 8KB의 메모리에 접근합니다. 그리고 8핀는 데이터 용으로, 나머지 7핀은 전원과 대기 표시 등으로 사용되어 40핀에서 28핀으로 축소된 버전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타리는 이 축소형 프로세서를 통해 개당 $1 원가 절감에 성공하게 됩니다.

6507이 최대 8KB의 메모리를 수용할 수 있었지만, 아타리는 13핀의 메모리 어드레스 라인 중 1핀을 칩 셀렉트 용도로 사용하고 나머지 12핀의 4KB만을 게임 저장용으로 사용하도록 설계하는 실수아닌 실수(?)를 저지릅니다. 당시 하드웨어를 개발하던 엔지니어 Joe Decuir는 프로세서 개발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상합니다.

"스텔라를 개발하던 당시 하나의 게임을 구동하는데 2KB의 메모리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최초 모델은 4KB 까지 지원하도록 설계했죠.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메모리 부족 문제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추가로 32KB 메모리를 확장하는 뱅크 스위칭(Bank Switching) 기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게임기가 이렇게 오랜 기간 이용되고 게임 하나에 훨씬 많은 메모리가 필요할 날이 빨리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겁니다." - Joe Decuir

아타리의 독자적인 비디오/오디오 칩셋 TIA

아타리는 스텔라에 사용할 독자적인 비디오와 오디오 기능을 통합한 TIA(Television Interface Adaptor) 칩을 개발하게 됩니다. 앞서 소개한 MOS사와 같은 반도체 회사에서 아웃소싱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발해야 했던 이유는 당시 반도체 메모리 가격이 너무나 비쌌기 때문[각주:1]입니다. 게다가 MOS의 RAM은 불량률이 굉장히 높았다는 점도 앞서 페어차일드 채널 F 이야기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스텔라는 가능하면 모든 부분에서 RAM 사용을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하드웨어를 설계 해야만 했고, 상황이 이렇다보니 스텔라 프로젝트 성공의 열쇠는 TIA 칩 설계를 맡고 있던 제이 마이너(Jay Miner)가 손에 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TIA는 디스플레이 출력과 제어에 있어 RAM 사용을 최소화 하는데 집중한 노력의 결정체였습니다. 예로 192x160 해상도에서 1픽셀당 1bit의 메모리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프레임버퍼(framebuffer)[각주:2]를 저장하기 위해 3,840Bytes의 메모리로 관리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결국 스텔라 플렛폼이 목표로하는 $100 후반대의 가격에 맞출 수 없고 해상도를 줄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아타리는 기존 방식을 대체 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냅니다. 바로 라인(Line) 입니다. 전체 화면으로 구성하는 프레임버퍼 매핑 방식으로 디스플레이를 출력하는게 아니라, 2개의 스프라이트(8 픽셀 라인), 볼(픽셀 1개), 2개의 미사일(2개의 픽셀 라인) 5가지 단색 오브젝트들을 겹쳐서 하나의 라인(Line)에 그려내는 방식으로 구현 합니다. 스텔라의 해상도는 192x160 픽셀 이었기 때문에 총 160개의 수평 라인에 개별적으로 등록된 레지스터들을 제어하여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가 한 화면에서 구동되듯이 느끼도록 프로그래밍하는 기술을 요구하게 됩니다.

:: 스텔라의 핵심 부품 3가지. 위에서 부터 순서대로 Ram-I/O-Timer (RIOT) 칩셋, MOS 6507 프로세서, 그리고 가장 아래가 비디오/오디오 통합 칩셋인 TIA로, 차세대 게임기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 iFixit (License by Creative Commons BY-NC-SA)

결과적으로 TIA의 구현  방식은 메모리 효율성을 높이는데 성공하지만, 반대로 악명높은 프로그래밍 난이도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설명대로 한 라인에 동시 표현 가능한 오브젝트는 최대 5가지, 그리고 4 컬러 까지 동시 표현이 가능[각주:3]했는데요, 이 160개 라인을 한 화면에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실시간으로 제어하면서 사용자의 컨트롤과 AI 까지 고려하고 거기에 동시 표현 가능한 4가지 색상 배치까지... 출시 이후 스텔라의 개발 가이드를 처음 접하는 프로그래머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IA의 구현 방식은 극악의 난이도를 넘어 하드웨어의 유연한 확장성과 개방성 덕분에 호기심 넘치는 수많은 컴퓨터 광들의 참여를 일으켰고, 비디오게임 시장에도 누구나 공개 소스로 게임을 직접 만들고 가지고 노는 Homebrew 시대를 열게되어 30여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사랑받는 결정적인 계기[각주:4]가 됩니다.


:: 최근 아타리 2600 에뮬레이터로 만들어진 Homebrew 게임 "Duck Attack" (2010) ::

조이스틱(Joystick)과 다양한 컨트롤러

스텔라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게임 컨트롤러는 앞서 프로토타입 모델에서도 언급했던 아케이드 게임 'Tank'의 조종석 컨트롤러를 본 따 만든 버튼 하나짜리 조이스틱(Joystick) 입니다. 포트는 9핀(DE-9)짜리 D-Sub 단자로 되어는데요, 재밌는 사실은 향후 출시되는 9핀 단자의 게임 컨트롤러로도 구동이 됩니다. 아무튼 이 조이스틱은 겉보기엔 원형으로 부드럽게 돌아갈 것 같이 생겼지만 실제는 상하좌우 4방향(十자)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상당히 뻑뻑했습니다. 이 밖에도 기존의 퐁(Pong) 게임에서 사용하던 페들, 트랙볼, 12키 키보드 등 훗날 이 게임기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 아타리에서 제작한 컨트롤러 외에도 다양한 써드파티(Third-Party) 컨트롤러가 전용 게임들과 출시되기도 합니다.

:: 향후 써드파티를 통해 출시되는 아타리 2600의 다양한 컨트롤러들 © The Video Game Critic. ::

모든 준비를 끝 마치며

TIA 칩 개발과 디버깅이 순조롭게 마무리 되면서 아타리는 스텔라 출시를 코 앞에 두게 됩니다. 70년대 초반부터 진행해온 프로젝트 였지만 개발에 난항을 겪은데다 심각한 자금난을 맞아 결국 워너 커뮤니케이션에 회사를 매각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너무 비싼 RAM 가격 때문에 1bit 라도 메모리 사용을 최소화 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배경 아래 1977년 9월, 아타리 VCS(Video Computer System)[각주:5]는 기출시된 페어차일드 VES와 전면전을 앞에 두면서 2세대 콘솔 시장에 진입합니다. 차세대 게임기 개발에 들어간 비용은 총 1억 달러. 아타리는 이 기계 하나에 기업의 사활을 걸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en.wikipedia.org/wiki/Atari_2600#cite_note-2
http://en.wikipedia.org/wiki/Atari_2600_hardware
http://www.ifixit.com/Teardown/Atari+2600+Teardown/3541


  1. 1976~77년 당시 RAM 1MB 당 가격은 3만달러(한화 3500만원)가 넘었다. http://jcmit.com/memoryprice.htm [본문으로]
  2. 컴퓨터 그래픽에서 한 화면 분량의 화상 정보의 일시적 저장에 쓰이는 기억 장치. 디스플레이 해상도가 높아질 수록 많은 메모리 용량을 요구한다. [본문으로]
  3. TIA가 지원하는 색상 팔레트는 TV 방식에 따라 달랐는데 NTSC는 최대 128컬러, PAL은 104컬러, SECAM은 8컬러 팔레트였다. [본문으로]
  4. 여러 컴퓨터 괴물들이 참여해서 한 라인에 최대 15컬러 까지 표현하는데 성공하는 등 하드웨어의 한계를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http://youtu.be/fRr4kxZetYA) [본문으로]
  5. 초창기 모델명은 아타리 VCS 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타리 2600은 80년대에 이르러 변경된 모델명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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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와 찰리 브라운으로 유명한 찰스 먼로 슐츠의 만화 피너츠(Peanuts)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철학이 담겨있고 당시 시대정신이 잘 반영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1965년, 25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찰리브라운 크리스마스(A Charlie Brown Christmas)에서는 그 당시에도 상업주의와 세속주의에 젖어 있는 미국의 크리스마스를 아이들의 시선으로 꼬집고 있습니다.

주인공 찰리 브라운은 크리스마스 때 편지를 쓰고, 선물을 교환하고, 트리를 장식하지만 전혀 행복을 느끼지 못해 고민인데요,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친구 루시의 도움으로 크리스마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그 첫 번째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지휘하는 디렉터 역할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가지로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다보니 친구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부딪히게 되고, 결정적으로 Modern Spirit이 잘 반영된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해오는 장면에서 작고 초라한 묘목 한 그루를 가져오자 크게 비웃음을 삽니다. 바로 이 시대가 원하는 화려하고 멋진 크리스마스가 아니라는 것이죠.

결국 참다 못해 터져버린 찰리 브라운의 외침.

"누구라도 좋으니 크리스마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없나요?"

첨부하는 2분 40초간의 영상이 바로 이 애니메이션의 핵심이자 찰리 브라운의 친구 라이너스가 설명하는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는 분은 거북하게 들릴지 몰라도, 크리스마스는 엄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쉽게 말해 생일날 주인공은 축하 받지 못하고 점점 잊혀지고 있지요.

애니메이션이 방영된 48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여전히 거리에는 크리스마스가 상업주의로 도배되어 있고 모텔은 연중 최고의 호황을 누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즐기는 그 순간은 좋겠지만 결국 보내고 나면 허무감이 크게 밀려오는 크리스마스. 오늘 하루는 종교를 떠나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라며 영상을 공유합니다.

아, 그래서 애니메이션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찰리 브라운의 친구들도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며 함께 작은 트리를 장식합니다. 가장 위에 달린 별 장식으로, 목자들이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천사의 기쁜 소식을 들은 것을 떠올리면서 말이죠.

그럼 모두 Merry Christmas !

(덧) 국내에 정식발매 되지 않은 애니메이션이고 워낙 오래된 영상이라 영문 자막을 임의로 번역해서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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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rner Bros. All rights reserved.

1. 영화를 보신 분들은 대부분 공감하겠지만 영화를 통해 조난 당한 '우주 비행사'를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시각, 청각의 효과를 극대화 한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영상미를 통한 시각 경험이 일품이지만 음악과 효과음을 통한 청각 경험에도 큰 만족감을 얻었습니다.

2. 시점이 1인칭과 3인칭을 자주 오갔는데, 3인칭일 때는 관객이 한 명의 우주비행사가 되어 동료들을 지켜보는 듯한 경험을 주었고, ISS에서 작업할 때 나사를 조이거나 사물에 부딪히는 등의 효과음이 실제 우주복 안에서 울리는 느낌으로 간접 경험을 극대화 합니다. 이런 세세한 부분에서도 섬세한 디테일을 느꼈습니다.

3.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을 적절하게 에워싸는 앰비언트 뮤직(Ambient Music)을 주로 활용하여 공간감 조성을 시도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우주가 배경이기 때문에 데브리가 날라오거나 폭발하는 장면 등 많은 부분에서 사실성을 위해 과감하게 효과음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실내에서는 외부 효과음이 나는데 반해, 우주 밖에서는 외부 효과음이 차단되어 있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빠진 부분을 감싸주는게 바로 이 배경 음악입니다.

4.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수확은 작곡가 스티븐 프라이스의 재발견이었습니다. (아직 77년생이라니 앞으로 더 좋은 음악을 만들거라 기대합니다.) 스티븐은 원래 이 영화 음악부문의 에디터였는데, 알폰소 감독이 그래비티에서 구현하고 싶은 효과음이나 음악 방향성이 기존의 SF 영화들이 해왔던 것과 몹시 달라 고심하고 있을 때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작곡도 하게 되면서 음악 감독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5. 스티븐은 스페이스 뮤직에 어울리는 웅장한 오케스트라 스트링 뿐 아니라, 각 상황에 맞게 전자음과 노이즈도 적절하게 가미했습니다. 각 상황에 맞게 음악이 있는 듯 없는 듯 부유하도록 하는게 이 영화의 간접 경험을 극대화 하는데 일조하게 되죠.

6. 그런데 이 음악이 모든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다른 한편으론 모든 상황에서 적절하게 녹아내는 음악을 가미하려다보니 너무 '과하지 않았을까' 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산드라 블록이 표류하는 상황에서 고요함과 적막감을 통해 우주의 공포감을 조성하려면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 만으로 그 상황을 극대화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계속 흐르는 음악이 거슬릴 때도 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대부분 음악에 대한 감상이 되어버렸지만, 이 영화는 영상미를 통한 시각 만큼, 사실과 간접경험 사이에서 청각에 대한 제작자의 고민의 흔적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새로운 도전이자 시도임에는 틀림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우주비행사를 꿈 꾸거나 우주 배경의 SF를 좋아하시는 분에게 값진 경험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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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타리는 기출시되던 슈퍼퐁, 울트라퐁을 비롯해 스턴 서클 등 10가지 게임들을 카트리지로 구성해서 첫 2세대 콘솔, 게임브레인(Game Brain)을 출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게임들은 당시 경쟁사인 페어차일드의 채널F에 비해 너무 구식이었기 때문에 출시가 취소되었고, 오늘날 몇몇 시제품만 남겨두고 있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아타리의 차세대 프로젝트, 스텔라(Stella)

아타리의 R&D 부서는 페어차일드가 최초의 2세대 게임기라고 부를 수 있는 ROM 카트리지 방식의 채널F를 출시하기 몇년 전부터 퐁(Pong)을 넘어설 차세대 게임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차세대 게임기의 목표는 하나의 기기에 여러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퐁의 개발을 선두지휘하던 앨런 알콘(Al Alcorn)은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그 시기엔 게임 개발하는데 비용적인 부담이 커지고 매 게임마다 변형된 칩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카트리지 기반의 시스템 개발은 더욱 그랬죠. 그래서 하나의 기기에 여러가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유연한 시스템 개발이 필요해졌습니다." - Al Alcorn [각주:1]

:: Steve Mayer ::

당시 인텔 8080이나 모토로라 6800과 같이 차세대 게임기 개발에 적합한 8비트 프로세서들은 단가가 $100~300에 이르는 고가였습니다. 소비자가를 맞추기 위해선 비용적인 부담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이 난관은 부쉬넬과 알콘이 Ampex에 재직하던 시절에 함께 일하던 스티브 메이어(Steve Mayer) 론 밀너(Ron Milner)사이언 엔지니어링(Cyan Engineering)팀이 아타리에 가담하면서 실마리를 얻게 됩니다.

:: Chuck Peddle ::

1975년 9월경, 스티브와 론의 사이언팀은 MOS 6502 프로세서를 만든 모토로라 출신의 엔지니어 척 페들(Chuck Peddle)을 찾아갑니다. 척은 모토로라 재직 당시 6800 보다 더 저렴한 양산형 프로세서 개발을 제안했지만 모토로라는 척의 제안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원하던 6800 기반의 프로세서를 개발하기 위해서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척을 기용한 MOS Technology는 MOS 65xx 시리즈를 완성하게 되는데요, 이 프로세서의 단가는 모토로라 6800 이나 인텔 8080 프로세서의 15%에 불과했습니다. 척을 만난 사이언 팀은 이틀에 걸쳐 아타리 차세대 콘솔 시스템에 대해 논의을 진행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MOS 6502 프로세서를 $8 단가에 구입하기로 합의합니다. 구상중인 차세대 콘솔 사양에 적합한데다, 기존의 동전투입방식의 게임기에도 최적화 시킬 수 있었습니다.

같은해 12월경, 아타리 R&D 부서에 유능한 엔지니어 Joe Decuir가 영입되면서 차세대 콘솔 프로젝트는 스텔라(Stella)[각주:2]라는 이름으로 첫 프로토타입을 완성합니다. 첫 번째 프로토타입은 MOS 6502 기반의 커스텀 보드와, 6V 전원장치, 컨트롤러는 Kee Games의 동전투입방식 아케이드 게임기 'Tank'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고안되었습니다.

:: 스텔라 프로젝트의 프로토타입. 컨트롤러는 아케이드용 탱크 게임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

아타리의 실수? 애플 컴퓨터와 스티브 잡스

돌아보면 MOS 6502 프로세서 만큼 반도체 역사에 큰 궤적을 남긴 프로세서도 드물겁니다. 당시 아타리의 앨런 알콘에게 MOS 6502를 기반으로 만든 개인용 컴퓨터 프로토타입을 들고 찾아온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스티브 잡스(Steve Jobs). 최근까지 아타리에 재직중이던 괴짜 히피족 청년이었습니다. 동시에 HP에서 근무하던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의 도움으로 아타리의 히트작 벽돌깨기(Breakout)을 단 사흘만에 완성해서 아타리 사내를 발칵 뒤집은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퐁(Pong)과 같은 페들을 돌리는 형태의 게임이 세간에서는 이미 인기가 한풀 꺾였다고 인식하던 시절, 놀란 부쉬넬과 Steve Bristow는 벽돌을 부수는 형태의 1인용 퐁(Pong)을 고안합니다. 개발 단계에 들어가면서 알콘은 때마침 재직중이던 스티브 잡스에게도 칩 50개 미만으로 이 프로그램을 완성하면 성과금 $750 를 지급하고, 줄어든 칩의 개수에 비례해서 $100의 보너스를 추가로 지급하는 조건을 제안합니다. 비록 잡스는 뛰어난 엔지니어가 아니었지만, 당시 아타리를 자주 놀러오던 잡스의 친구 워즈니악의 존재를 인식하고 제안한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잡스는 나흘만에 완성하겠다고 약속하고 곧바로 워즈니악에게 연락해, 성공시 받게 되는 성과금을 절반으로 나누자는 조건하에 아타리의 새 게임을 만들기 시작합니다.[각주:3] 당시 게임을 프로그래밍 하려면 두달 가까이 걸리는데 반해, 뛰어난 엔지니어였던 워즈니악은 고작 사흘 만에 칩 45개로 게임을 완성합니다. 역사적인 벽돌깨기(Breakout)는 그렇게 탄생하게 됩니다.

:: 아타리의 벽돌깨기 게임. 오른쪽은 차고에서 애플 컴퓨터를 창업한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

그 후 워즈니악은 HP에 근무하면서 MOS 6502 프로세서를 이용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냅니다. 키보드로 입력하면 화면에 글자가 출력되는 혁명적인 기계였습니다. 잡스는 워즈니악을 설득해 인쇄 회로 기판(PCB)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하자고 제안했지만, 워즈니악은 윤리적인 이유로 재직중인 HP에 먼저 고안물을 보여주게 됩니다. 하지만 HP는 자사의 사업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상품 개발을 거절하게 되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각자의 회사에서 나와 차고에서 사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제품을 납품해서 판매해줄 곳을 찾는 것이 생각만큼 녹록치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개인용 컴퓨터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워즈니악이 가입한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회원들 조차도 컴퓨터광의 취미로 만들어진 기계일 뿐 사업 아이템으로 바당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바이트 숍'이라는 컴퓨터 상점을 운영해온 '폴 테럴'은 이들의 제품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판매 계약을 맺게 되지만 다음 문제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부품 비용으로 $15,000 가까이 필요했습니다. 당장 현금이 없던 스티브 잡스는 부품이나 자금을 지원해줄 스폰서를 물색하게 됩니다. 그렇게 최근까지 재직하던 아타리의 앨런 알콘을 찾아오기에 이른 것입니다. 아타리도 때마침 같은 MOS 6502 프로세서를 차세대 콘솔 개발과 동전투인 방식의 아케이드 게임기에 적용하려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는 스티브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아타리에 재직하던 시절에 좋아하던 사원이었기 때문에, 다른 벤처 캐피탈리스트들을 소개해줬습니다."[각주:4] - Al Alcorn

아타리 역시 이들의 개인용 PC가 '컴퓨터광이 만든 훌륭한 기계'일 뿐 사업으로 확장 할만큼 비전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잡스가 현금으로 선불로 지급하지 않는 한, 부품 칩을 판매하거나 투자해줄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애플 컴퓨터는 개인용 PC 시장을 개척하게 되었고, 아타리로서는 몇년 뒤 가정용 PC 사업에도 뛰어들면서 그 때 자신에게 왔던 큰 기회를 놓쳐버린 것을 아쉬워하지 않았을까요?

::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그 때 아타리가 애플I 프로토타입을 보고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IT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

아타리,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 매각

가정용 퐁(Pong)의 폭발적인 인기로 아케이드 시장의 인기를 가정용 게임기 시장으로 이어간 아타리지만, 이듬해인 1976년에 General Instrument가 발매한 AY-3-8500 칩으로 Pong류의 게임을 쉽게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여러 회사들이 복제품들이 양산해 헐값에 팔아치우기 시작합니다. 아타리는 Pong Double, Super Pong, Quadra Pong등 여러가지 변형된 퐁 시리즈를 연이어 출시하지만 퐁의 판매 둔화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소비자들은 퐁을 넘어선 새로운 게임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아타리의 1975-1976 회계보고에 의하면 $350만 영업이익, $3,900만 매출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하던 모습의 이면에는 치고 올라오는 경쟁사들에 대한 부담이 컸습니다. 또한 스텔라 개발을 위한 투자 비용이 연간 $100,000에 달하며 개발비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차세대 게임기의 빠른 결과물이 나오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스텔라 완성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재정이 필요했니다. 놀란 부쉬넬은 벤처 캐피탈리스트 돈 벨런타인(Don Valentine)을 찾아가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한 자문을 요청했고, 그는 아타리를 구입해줄 회사를 찾아보라고 권유 합니다.

"급속히 성장하는 사업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자본을 잠식합니다. 월가는 우리 제품들이 반짝 뜨다 말게 될 사업일지, 장기적으로 전망이 좋은 사업일지 결정하는데 난항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본을 확보하기 굉장히 힘겨워졌고, 쉽게 변하는 소비자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탄탄한 자본력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각주:5] - Nolan Bushnell

1976년, 아타리는 워너 커뮤니케이션(Warner Communications)에 $2,800만 금액으로 매각됩니다. 지분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던 놀란 부쉬넬은 단숨에 $1,500만을 가진 억만장자가 되었고, 워너는 놀란 부쉬넬을 아타리의 CEO로 유지한채 스텔라 개발에 아낌없는 지원사격을 펼칩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자본 문제를 해결하면서 아타리는 스텔라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스티브 잡스(Steve Jobs) - 월터 아이작슨 저
http://classicgaming.gamespy.com/View.php?view=Articles.Detail&id=401
http://www.gamasutra.com/view/feature/2000/the_history_of_atari_19711977.php?page=13
http://en.wikipedia.org/wiki/Atari_2600


  1.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p.36) [본문으로]
  2. 스텔라(Stella)는 Joe Decuir가 타던 프랑스 자전거 브랜드 이름에서 따왔다. [본문으로]
  3. 하지만 잡스는 추가 보너스를 받는 사실을 숨기고 워즈니악에게 성과금의 일부만 전달했다고 한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 - 월터 아이작슨 저> [본문으로]
  4. 애플은 아타리의 소개로 벤처 캐피탈리스트 중 '돈 벨런타인'을 만나게되었고, 초대 회장 마이크 마큘라를 영입하게 된다. [본문으로]
  5. C/Net News.com “The return of King Pong” by David Becker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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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를 설립한 8인의 반역자(traitorous eight)들은 실리콘밸리의 전성기를 열며 저명한 기업가들로 성장한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트랜지스터 발명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의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는 1956년, 기존의 트랜지스터보다 빠르고 다루기 쉬운 4층의 다이오드 연구개발을 목적으로 우수한 공대생들을 영입합니다. 하지만 괴팍한 성격의 이 천재 물리학자는 과도하게 연구주제를 바꿔가며 직원들을 견습생처럼 괴롭혔다고 합니다. 결국 1년 만에 반기를 들고 회사를 퇴사한 8명은 미 동부의 군수업체인 Fairchild Camera and Instrument Corporation에 자금 원조를 받아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社를 설립하게되고 2년만에 최초의 실리콘 집적회로를 출시합니다. 훗날 8인의 반역자(Traitorous Eight)[각주:1]로 불리게 된 이들로부터 60여개에 이르는 벤쳐들이 탄생 되면서 실리콘밸리는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8명의 멤버 중에는 오늘날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인 인텔(Intel)의 공동 설립자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고든 무어(Gordon Moore)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페어차일드의 비디오 게임 사업부 탄생

:: 제리 라우슨 (1940~2011) ::


8인의 반역자가 회사를 설립하고 십수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970년 초에 한 흑인 엔지니어가 페어차일드에 입사합니다. 제리 라우슨(Gerald Anderson "Jerry" Lawson)[각주:2]은 어린시절부터 TV 상점들을 들락거리며 전자 기술에 관심과 열정을 키워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자 회사에 취업하면서 자연스럽게 컴퓨터 기술과 프로그램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1970년대 초에 페어차일드에 입사한 제리는 때마침 아타리가 아케이드용 퐁(Pong)을 출시하면서 미국 전역에 신드롬을 일으킬 때, 이에 자극을 받아 자신의 차고에서 Demolition Derby라는 아케이드 게임기를 직접 만들게 됩니다. 퐁과 같이 동전을 투입해서 즐기는 형태였습니다.

우연히 제리의 아케이드 게임기를 발견한 페어차일드는, 협력업체인 알팩스(Alpex)社가 Intel 8080 프로세서로 구동되는 게임기를 페어차일드의 F8 프로세서로 전환할 수 있도록 기술 자문을 비밀리에 요청하게 됩니다. F8 프로세서로 구동되는 프로토타입을 완성한 제리는 보고를 위해 예산안을 들고 페어차일드의 부사장을 만나러 코네티컷주로 향합니다. 그리고 제리의 프로토타입 게임기를 살펴본 이들은 새로운 사업 가능성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 프로토타입을 보니 가치 있는 결과물이 나올 것 같군요. 한 번 추진해봅시다."[각주:3]

이렇게해서 페어차일드의 비디오 게임 사업부가 신설 되었고 제리는 신 사업부의 엔지니어 겸 마케팅 수장을 역임하게 됩니다. 오늘날, 2세대 비디오 게임기 시장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콘솔 페어차일드 채널 F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최초의 ROM 카트리지 게임기

:: Fairchild F8 Processor ::

페어차일드는 1976년, 자사의 F8 프로세서[각주:4]를 탑재한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페어차일드 채널 F (Fairchild Channel F)[각주:5]를 출시합니다. 64byte 메모리에, 2Kb 비디오 메모리가 내장되어 있었으며, 본체에 3채널 스피커가 달려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채널F는 Pong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라인당 4 컬러의 그래픽 성능을 보여줬습니다.

채널F는 하드웨어 부품을 아웃소싱하는 과정에서 난항을 겪어야 했습니다. 게임기가 $169.95의 고가에 가격이 책정된 것도 하드웨어 단가가 높은 이유였습니다. 특히 그래픽 성능 향상을 위해 RAM 사용량이 늘어났는데요, 외주로 MOS Technology社의 RAM을 이용하면서 생긴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당시 페어차일드도 RAM 을 만들고 있었지만 생산 단가 때문에 MOS에서 생산된 RAM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MOS의 RAM은 불량률이 너무 높았기 떄문에 생산 단가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제리는 직접 빨간 수레와 박스 2개를 준비해서 MOS의 테스트 공정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테스트에 통과 못하고 버려진 불량품들을 박스에 담았습니다. 90% 정도가 채워졌을 때 공장 밖으로 나가서 길거리에 지나가는 MOS 직원들에게 공짜로 뿌리면서 RAM 제품의 품질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동 후로 페어차일드가 유닛당 $2로 가격 협상을 이끌었지만 제리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직접 인텔의 RAM 생산 부서를 방문해서 구해온 RAM 10개를 들고 부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이걸 좀 보십시오. 부사장님께서 대부분 사용 불가능한 (MOS의) 쓰레기를 개당 2달러씩 지불할 때, 저는 인텔에서 사용할 수 있는 1달러짜리 RAM을 10개나 구해 왔습니다."[각주:6]

:: 2개의 컨트롤러가 연결되고 게임 카트리지가 별도로 판매한 오늘날 콘솔 형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채널 F가 오늘날 콘솔 2세대를 시작한 게임기로 평가 받는 이유는, 최초로 ROM 카트리지(일명 게임팩)를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카트리지 형태는 마그나복스의 오디세이가 최초였지만 단순 점퍼 연결 방식이었습니다. 제리의 비디오 게임 사업부는 더이상 보드 안에 게임을 내장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하드웨어 부피가 너무 커져버리기 때문에 발열과 고장의 위험을 감수하기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결국 이런 욕구가 게임이 프로그래밍된 ROM 카트리지를 따로 만들어서 삽입하는 디자인을 고안하게 되었습니다.

채널F에는 하키와 테니스 게임 2개가 게임기 안에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었고 카트리지는 개당 $19.95에 판매되면서 게임기가 단종되기까지 총 27개의 카트리지가 출시되었습니다. 카트리지에는 하나 또는 두 개 이상의 게임이 내장되어 있었습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식의 비디오 게임기라는 점에서 시장에 큰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되었고 약 25만대의 판매고를 달성하면서 선전하게 됩니다.


:: 페어차일드 채널 F 의 TV광고 ::

카트리지를 채택한 2세대 콘솔 시장으로 진입

페어차일드 채널 F의 획기적인 시스템에 자극을 받은 아타리는 스텔라(Stella)라는 코드명의 카트리지 기반의 게임기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이듬해에 채널 F 보다 더 나은 그래픽과 사운드를 가진 아타리 2600가 출시하면서 새로운 경쟁 구도를 형성합니다. 이제부터 비디오 게임 시장은 카트리지를 채택한 2세대 시장으로 돌입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http://www.vintagecomputing.com/index.php/archives/545
http://en.wikipedia.org/wiki/Fairchild_Channel_F


  1. '8인의 반역자'라는 이름은, 쇼클리에 의해 붙여진 별명으로 전해진다. [본문으로]
  2. 흑인 컴퓨터 엔지니어로, 1970년대 실리콘밸리의 IT 수장들이 모여있는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의 일원이기도 했다. 훗날 애플을 설립한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도 클럽에 가입되어 함께 활동했다. [본문으로]
  3. VC&G의 제리 라우슨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 [본문으로]
  4. F8은 인텔을 설립한 로버트 노이스가 페어차일드를 퇴사하기 전에 개발 팀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프로세서는 출시 당시 가장 인기 있던 프로세서로 인텔의 8048 모델 개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본문으로]
  5. 이 콘솔은 초기에 페어차일드 VES (Video Entertainment System)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지만, 이듬해에 아타리가 VCS(Video Computer System)를 출시하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변경하게 된다. [본문으로]
  6. VC&G의 제리 라우슨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 [본문으로]
  1.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05.29 15:37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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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발발한 오일 쇼크 사태는 일본인에게 큰 불안을 안겨주었다. 갑작스런 물가 상승을 두려워한 나머지 시장 거리마다 생필품을 미리 사재기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사진은 1973년 11월 1일자 아사히 신문 보도 자료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위기 = 새로운 기회

완구 회사로 승승장구하던 닌텐도에게 오일 쇼크의 타격은 컸습니다. 갑작스런 물가상승을 두려워한 나머지 생필품을 사재기 하고, 과소비를 줄이는 등 일본 전역에 불안한 심리가 경제 활동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지갑문을 굳게 닫던 소비재가 바로 오락 산업이었던 만큼, 닌텐도가 야심차게 시작한 광선총 실내 사격장은 개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닌텐도는 창사이래 비즈니스 정체성을 두고 첫 번째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 내부적인 위기는 놀이 문화, 즉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사업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완구 사업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위기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오일 쇼크'라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빚어진 경제 불황 앞에서는 정체성을 지키기 힘겨웠던만큼 닌텐도가 사라질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닌텐도는 완구 사업을 축소하고 새로운 사업을 모색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닌텐도에게 운이 따라줬던 걸까요? 때마침 미국에서는 마그나복스의 오디세이아타리의 퐁이 출시되면서 TV에 연결해서 즐기는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가 인기몰이 중이었습니다. 야마우치 회장은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이 상용화 되면서 가정용 제품들이 출시되면 삶에 큰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고, 이 기술을 활용한 전자 게임 산업이 닌텐도의 정체성과 잘 맞아 떨어진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1974년에 닌텐도는 마그나복스로부터 오디세이의 일본 판매 계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비디오 게임 사업에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 1977년도에 출시된 닌텐도의 첫 비디오게임기 Color Tv Game 6. 총 4가지 모델로 출시 되었다. 특히 사진의 6S 화이트 모델은 C형 건전지만 사용 가능했던 초기 모델로, 소량으로만 판매되었기에 지금도 옥션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

Nintendo Color TV Game (任天堂 カラー テレビゲーム)

닌텐도는 마그나복스의 오디세이를 수입 판매하면서 직접 비디오 게임기를 만들기로 결심 합니다. 하지만 당시엔 게임기 개발 기술이 없었기에 기술 지원을 받아서 공동으로 제작할 전자 회사가 필요 했습니다. 광선총 개발의 주역인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미쓰비시와의 기술 제휴를 추진해서 본격적인 비디오 게임기 개발에 돌입합니다.

1977년 7월, 닌텐도의 첫 비디오게임기 Color TV Game (カラー テレビゲーム)이 출시됩니다. 닌텐도는 게임기에 내장된 숫자를 의미하는 Color TV Game 6Color Tv Game 15를 각각 출시합니다. 닌텐도의 이 게임기는 아직 카트리지 교환식이 아니라, 기판에 게임이 내장되어 레버로 모드를 전환해서 즐길 수 있었습니다.  6 시리즈에는 하키, 볼링, 테니스를 각각 2가지 모드로 총 6가지 게임이 내장(3x2)되어 있었고, 15 시리즈에는 여기에 6시리즈에 핑퐁 게임과 슈팅게임이 추가되어 총 15가지(7x2+1)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 게임 모드 설명서와 게임기 본체 중앙 레버들. 원하는 게임 모드에 맞게 조절해서 플레이 가능하다. ::

사실 6와 15 모델은 동일한 프로세서를 이용 했는데요, 닌텐도가 굳이 2가지 모델로 나눠서 출시한데에는 속 사정이 있었습니다. Color TV Game이 출시되기 2년전인 1975년에 이미 에폭(Epoch Co.)社가 일본 최초로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인 텔레비전 테니스(テレビテニス)를 출시한 상태였습니다. 가격은 19,500엔이었습니다. 후발주자 입장의 닌텐도가 선두주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제품을 출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판매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 에폭(Epoch)에서 출시한 일본 최초의 비디오 게임기, 텔레비전 테니스(テレビテニス) 마그나복스와 기술제휴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TV 화상에 스코어를 표현하는 기능이 없어서 점수판 다이얼이 기기 하단부에 달려 있다. ::

닌텐도는 6 모델은 9,800엔에, 15 모델은 15,000엔에 출시합니다. 10,000엔 미만의 게임기는 소비자들에게 심리적으로 구매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는데다 경쟁사의 제품의 반 값이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가격이 저렴한 6에 관심을 가지고 나면, 9개 모드를 더 즐길 수 있는 15 모델에 더 눈길이 가기 마련입니다. 닌텐도는 이런 소비자의 심리를 파악해서 2가지 모델로 판매하는 전략을 실행했고 소비자들은 5,000엔이나 더 비쌈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15 모델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제조업은 채산성을 높이며 이윤을 내는게 원칙입니다. 하지만 닌텐도는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채산성이 떨어지더라도 가격을 낮춰서 경쟁 업체과 가격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닌텐도의 이 판매 전략은 성공합니다.[각주:1] 6 모델과 15 모델 도합 100만대 가량 판매[각주:2]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에폭은 같은 해에 4인대전이 가능하고 사격게임도 즐길 수 있는 '시스템10'과 저가형 모델 'M2'를 잇달아 출시하지만 닌텐도 게임기가 워낙에 컴팩트하고 인기가 많아서 판세를 뒤집기 힘들었습니다.

:: Color TV Game 지면 광고 ::


:: Color TV Game TV 광고 ::

 

비디오 게임 회사 닌텐도(Nintendo)

Color TV Game은 6와 15모델 이후로도 1980년까지 Color TV Racing 112Color TV Game Block Breaker, Computer TV Game 등 출시했으며, 1978년도에는 아케이드용 Computer Othello를 출시하면서 아케이드 게임 사업에도 진출합니다. Color TV Game 의 성공으로 이제 닌텐도는 명실상부 비디오 게임 회사로 변신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첫번째 위기는 완구회사로, 두 번째 위기는 비디오 게임 회사로 변신하면서 극복한 셈입니다. 무엇보다 이 큰 변화에도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사업 정체성은 계속해서 지켜냈습니다. 이제 비디오 게임회사 닌텐도는 1980년에 뉴욕에 미국 지사(Nintendo of America)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나섭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 닌텐도의 아케이드 게임기 컴퓨터 오델로 (Computer Othello, 1978) ::

:: 한편, Color TV Game이 출시된 1977년에 한 젊은 공업디자이너가 닌텐도에 입사한다. 하지만 그가 활약하는건 몇 년 뒤의 일이다. ::

[참고 자료]

닌텐도 이야기 -김영환 저- <한국경제신문>
http://ajw.asahi.com/reliving_the_past/leaf/AJ2011110116049
http://blog.beforemario.com/


  1. 닌텐도는 이를 계기로 하드웨어 채산성이 떨어지더라도 소프트웨어로 이윤을 내는 판매 전략을 고수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비디오게임 산업의 정석이 된다. [본문으로]
  2. 6 모델은 약 30만대, 15모델은 70만대 정도로 추산. (위키 백과 기준)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lineni.com BlogIcon 리넨
    2012.06.28 18:01

    저는 몰랐던 시절의 이야기군요. :D 잘 읽었습니다.

  2. Favicon of http://archwin.net BlogIcon 아크몬드
    2012.08.03 09:06

    옛날 게임 이야기 재밌네요..

  3. Lee
    2012.10.22 20:31

    마야모토 시게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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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코이 군페이를 이야기 하지 않고 닌텐도의 역사를 논할 수 있을까? 그는 게임&와치부터 게임보이에 이르기까지 여러 게임기를 탄생시킨 디자이너이자 '요코이즘'으로 불리는 닌텐도의 DNA를 형성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진은 그의 평전.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울트라 핸드 (Ultra Hand)

전기 공학도생이던 요코이 군페이(横井軍平)는 1965년 닌텐도에 입사합니다. 입사 당시 그의 나이 24세, 닌텐도에서의 첫 업무는 기계 설비의 보수점검이었습니다. 평소 손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자기만의 장난감을 만들어서 만지작 거리는 취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야마우치 회장의 눈에 든 것도 그의 손재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업무 중에 장난감을 만지작 거리다 야마우치 회장에게 들키게 됩니다. 충분히 면책을 예상했겠지만 야마우치는 오히려 그의 비범한 손재주를 높이 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만든 장난감은 막대들을 격자로 이어 이음새 부분에 볼트로 조이고 끝 부분에 손잡이와 집게를 달아서 멀리 있는 것도 늘려서 집을 수 있는 재미난 도구였습니다. 야마우치는 회장은 시장성을 예견하고 바로 상품화를 지시하게 됩니다. 이 장난감은 1966년에 울트라 핸드(Ultra Hand)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고 폭풍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개당 800엔의 상대적인 고가품이었지만, 대중매체 광고가 나가면서 그해 크리스마스-연말 시즌까지 120만개의 판매량를 달성합니다. '오락(Entertainment)'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완구 업체로서 성공적인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 일본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울트라 핸드는 큰 인기를 얻는다. 사진은 잡지 광고와 제품 패키지 ::

닌텐도의 신 성장 동력원 '연구개발부'

울트라 핸드의 성공에 힘입어 야마우치 회장은 닌텐도에 연구개발부를 꾸려서 새로운 완구 사업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당시 총무부장이던 이마니시 히로시를 새 사업부의 수장으로 임명하고 요코이 군페이를 중축으로 장난감 개발을 시작합니다. 이 드림팀 사업부는 기대만큼 많은 히트 제품들을 만듭니다. 울트라 핸드가 출시된 이듬해인 1967년에는 울트라 머신(Ultra Machine)으로 실내 야구장을 가정용으로 옮겨서 어린이들이 집에서도 안전하게 배팅 놀이를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도에 출시된 울트라 시리즈의 세 번째 제품 울트라 스코프(Ultra Scope)는 1.2Kg에 이르는 무거운 무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아이들이 자기 키보다 높은 찬장 위나 골목의 담장 위를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 울트라 머신(Ultra Machine) ::


:: 울트라 스코프(Ultra Scope) ::

:: 닌텐도는 울트라 머신 (왼쪽)과 울트라 스코프로의 연이은 히트로 완벽하게 완구업체로 자리매김 한다. ::

닌텐도와 광선총 신드롬

울트라 시리즈를 선두로 러브 테스터(Love Tester)텐빌리온(Ten Billion)과 같은 장난감들을 연이어 출시하면서 완구회사로 발돋움한 닌텐도는 우에무라 마사유키(上村雅之)라는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면서 절정에 다다릅니다. 우에무라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쓰레기장에서 모은 부품을 뛰어난 손재주로 장난감을 만들어 놀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독학으로 산업대학에 들어가 전자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졸업 후 태양전지에 사용되는 감광 반도체를 제조하는 샤프(Sharp)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태양전지 영업을 위해 닌텐도 연구개발부를 찾아서 장난감에 전지를 사용할 것을 권합니다.

우에무라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재능을 알아본 요코이 군페이는 함께 닌텐도에서 장난감을 만들어보자고 입사를 권유하게 됩니다. 어릴적부터 장난감을 좋아했던 그는 닌텐도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여 입사했고 태양전지를 이용한 새로운 장난감 개발에 착수합니다.

:: 우에무라 마사유키(사진 왼쪽)는 닌텐도 엔지니어로 입사 후 광선총으로 히트시키고 훗날 패미콤(NES)을 만들게 된다. 사진은 닌텐도의 마리오 25주년 '이와타 사장이 묻는다' 인터뷰 장면 ::

그가 개발한 광선총(光線銃)은 울트라 핸드에 이어 완구회사 닌텐도의 상징이 된 제품입니다. 적외선 레이저를 발사하는 장난감 총에 과녁이나 표적이 되는 센서에 맞추면 총에 맞는듯한 굉음과 함께 시각적인 효과가 표현되었습니다. 광선총은 일반 총부터 라이플까지 그리고 스코어 과녁과 건맨(Gun Man), 사자(Lion)등의 표적 과녁 등 다양한 패키지로 출시되었고 2,000~4,000엔에 이르는 고가 제품이었지만 1970년대 초반에 100만대 이상 판매한 닌텐도의 대박 상품이 되었습니다.

광선총의 성공으로 닌텐도는 경영 실적도 상승하면서 그당시 오사카 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되었고 주가도 급등하게 됩니다. 하지만 광선총이 일본 전역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코이 군페이는 그 당시 일본에서 스키트 사격장 붐이 일어나던 것을 광선총 제품과 응용해서 좀 더 대중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실내 사격장을 고안하게 됩니다.

:: 광선총 GunMan과 Lion 세트. 표적에는 레이저에 반응하는 작은 센서가 있다 ::

때마침 일본에 붐을 일던 볼링 거품이 빠지면서 볼링장이 하나 둘 씩 문을 닫던 시기였습니다. 야마우치 회장은 볼링장 레인 끝을 센서와 전광판 스코어로 개조해서 광선총 사격장으로 활용하는 사업 수완을 발휘합니다. 그렇게 1973년에 닌텐도의 광선총 장난감을 이용한 실내 사격장이 개장하면서 세간에 주목을 받게 되었고 볼링처럼 여럿이 함께 즐기는 대전 게임 요소를 갖추던 이 사격장은 심야까지 즐길 수 있는 오락시설로 인기몰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영상투사기법을 활용해서 스크린으로 반응하는 아케이드 게임 와일드 건맨(Wild Gunman)을 출시했고 광선총으로는 최초의 수출 제품이 되었습니다.


:: 와일드 건맨(Wild Gunman)은 화면의 적이 총을 쏘기 직전에 재빠르게 쏴서 맞춰야 이긴다. ::

다시 찾아온 위기, 오일 쇼크 (Oil Shock)

울트라 핸드와 광선총의 성공으로 완구회사로 승승장구 해나가던 중 1973년에 전 세계적으로 오일 쇼크(Oil Shock)가 터지면서 닌텐도에게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쳐옵니다. 불황이 오면 가장 먼저 지갑문을 닫는 분야가 바로 오락(Entertainment) 산업군인 만큼 닌텐도에게 큰 타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광선총 사격장에 과감한 자본을 투입했던만큼 부채를 상환하기 힘겨워졌고, 곧바로 경영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다시 찾아온 이 총체적 난국을 닌텐도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닌텐도 이야기 -김영환 저- <한국경제신문>
http://blog.beforemario.com/


  1. 익명
    2012.08.08 18:59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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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여러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가정에서는 한 아들로, 동료들 사이에서는 조언자로, 한 모임에서는 리더로, 그리고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비전을 품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겐 원하는 바가 있고, 하나의 푯대만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원대한 꿈도 품고 있지만, 으레 그렇듯 세상 일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큰 벽에 좌절할 때도 있고, 부족한 역량과 한계에 철저하게 작아지는 자신에게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품는 꿈이 과연 가치가 있을까 다시금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정말로 '현실은 진실의 반대'가 아닐까 하고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 끝에는 고독과 외로움이 물밀듯 찾아옵니다. 

2012 Man of La Mancha - Charlotte Theater, Seoul.

아직 30 뿐인 짧은 생애지만 2008년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장 힘들던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 당시 제게 큰 위로와 용기를 심어준 뮤지컬이 있었습니다. 돈키호테 이갸기를 재각색한 '맨 오브 라만차(Man of La Mancha)' 입니다. 그 때 감동을 잊지 못해 2년 뒤에 다시 찾아서 봤지요. 그리고 올 해에도 반드시 관람할 계획입니다. 알론소 키하노라는 귀족 출신의 우스꽝스러운 이 노인은 자신을 기사 돈키호테로로 착각한 반쯤 정신 나간 사람이지만 그의 가슴에는 불 타는 열정과 용기가 있습니다. 정의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기사도의 꿈입니다. 세상이 손가락질 하고 비난한들 이 꿈과 열정은 결코 식지 않습니다.

극중의 주제곡이라 할 수 있는 '이룰 수 없는 꿈 (The Impossible Dream)'은 지금도 제가 힘들 때나 꿈에 대한 회의가 들 때면 가장 먼저 찾아 부르는 노래입니다. 알 돈자도 미치광이 돈키호테의 진심과 열정에 마음 문을 열어주는 순간이죠.

알 돈자: 왜 이런 일을 하는거지?
돈키호테: 아니, 무슨?
알 돈자: 당신이 하는 이 말도 안되는 이 모든 일들.
돈키호테: 세상에 자비를 더하고 싶을 뿐이오.
알 돈자: 세상? 이 세상은 똥구덩이고 우리는 거기서 꿈틀거리는 구더기...
돈키호테: 오,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는 거 압니다.
알 돈자: 오, 난 죽으면 지옥 가는 건 맡아놨고, 당신 시뇨르 돈키호테, 누구랑 싸우든지 깨질걸?
돈키호테: 오,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소.
알 돈자: 그럼 뭐가 중요해?
돈키호테: 내게 주어진 길을 따를 뿐이오.
알 돈자: 잘해봐요.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주어진 길이라니?
돈키호테: 그것은 진정한 기사의 임무이자 본분, 아니, 특권이오.


이룰 수 없는 꿈 (The Impossible Dream)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오
희망 조차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처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오늘 밤에도 다시 한 번 다짐 합니다. 내가 왜 이 꿈을 꾸고 있는지, 그리고 현재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이 길을 이룰 수 없을 지라도 반드시 걸어가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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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당골패(Nintendo Playing Card Company)라는 사명에서도 미루어볼 수 있듯, 그당시 닌텐도는 카드 제조사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 정체성은 어떤 계기로 인해 흔들리고 만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카드 사업의 신성장 동력을 얻은 닌텐도

닌텐도의 3대 회장 야마우치 히로시는 취임 후 인사 문제를 해결하고 미국을 방문합니다. 당시 미국은 전후 일본에 대한 경제 회복 계획의 일환으로 일본 기업들을 미국으로 초청해서 여러가지 사업 프로그램들을 진행했습니다. 야마우치 회장도 당시 동종 업계인 세계 최대 카드 제조사 United States Playing Card Company(이하 US플레잉)를 찾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카드 회사가 남루한 2층 건물과 창고에서 카드를 제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는데요, 일본보다 더 큰 시장을 소유한 US플레잉 조차도 작은 규모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카드 제조사로서 닌텐도의 한계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을 겁니다. 야마우치는 닌텐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순 카드 제조에만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미국 방문 후 닌텐도는 카드 사업을 재정비 합니다. 카드 재질을 종이에서 세려된 플라스틱으로 코팅으로 마무리해서 대량생산 체재로 들어갔으며, 특히 1959년부터 '캐릭터 라이센싱' 이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해냅니다. 월트 디즈니(Walt Disney)와의 제휴로 다양한 캐릭터 카드 상품을 출시하게 되는데요, 이 사업은 대중매체 광고에 힘입어 큰 성공을 거둡니다.[각주:1] 특히 이 분야에서 라이센싱 방식의 컨버전스 비즈니스가 흔하지 않던 시절인만큼 야마우치의 뛰어난 사업 수완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 닌텐도가 디즈니 캐릭터 라이센싱으로 출시한 카드게임 '101 Dalmatians Marching Game' ::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닌텐도

1963년, 닌텐도는 오사카 증권거래소 2부에 상장 됩니다. 그리고 사명을 '닌텐도주식회사(任天堂株式会社)'로 변경하며 새출발 합니다. 새 사명은 카드 회사라는 기존의 이름을 넘어[각주:2] 새로운 분야의 사업을 확장-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닌텐도의 사업 확장은 결과적으로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시절을 맞이합니다. 새롭게 시도하는 사업마다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면서 창사 후 첫 위기를 겪게 됩니다.

닌텐도의 주식 상장 후 첫 사업은 '즉석 쌀밥' 이었습니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바로 밥이 되는 간편한 방식으로 당시엔 획기적인 사업 아이템이었지만 본질적인 '밥 맛'을 살리지 못해서 실패합니다. 두 번째는 당시 도쿄에서 성행하던 '러브호텔' 사업 이었습니다. 하지만 닌텐도가 있던 교토(京都) 지역의 전통과 보수적인 문화적 차이를 간파하지 못해 러브호텔 사업 역시 실패 합니다. 세 번째 사업 아이템은 '택시' 였습니다. 관광 산업이 발달한 교토에서 대중교통의 이용량이 많을거라 예상하고 시장성을 확신하게 되었죠. 택시 사업은 앞서 소개한 두 사업에 비해 잘 운영되었습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질 수록 경영하는데 힘에 부치기 시작합니다. 택시 기사들의 계속되는 임금 인상과 복지 혜택 요구, 그로 인한 노사간의 갈등, 추가적인 인력 관리 등에 부딪히면서 결과적으로 택시사업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닌텐도는 택시 사업의 실패를 통해 적은 인력으로 최대희 효율을 낼 수 있는 사업을 지향하게 됩니다.

:: 거듭되는 실패에도 카드 사업은 닌텐도를 뒷받쳐주고 있었다. 사진은 1965년에 출시한 그림책 트럼프. ::

본질을 되찾기 시작한 닌텐도

상장 후 3~4년간 닌텐도는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인해 경영 위기를 맞이합니다. 상장 당시 980엔이던 주가는 100엔 미만으로 곤두박질 쳤으며 야마우치 회장의 지도력에도 위기가 닥쳐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기존의 카드 사업은 계속해서 큰 수익을 내며 닌텐도를 뒷받쳐 주고 있었습니다. 늘 닌텐도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온 야마우치 회장은 화투와 카드 사업으로 제한하면 닌텐도는 더이상 성장할 수 없기에 다양한 사업에 도전한 것이지만 결국 닌텐도가 가장 잘 하는 분야는 역시 '카드' 였습니다.

화투와 트럼프 카드의 본질. 닌텐도가 해오던 사업은 결국 '엔터테인먼트'의 한 분야을 깨닫게 되면서 닌텐도의 정체성에 대한 힌트를 얻습니다. 닌텐도 제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인먼트(오락) 도구, 이것이 바로 닌텐도 사업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당시 설비 점검을 맡던 한 명의 엔지니어가 재미 삼아 만들어 놀던 '장난감'의 계기로 실마리를 찾게됩니다.

완구 회사 닌텐도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 완구회사 닌텐도의 시작, 울트라 핸드(Ultra Hand) ::

참고 자료

닌텐도 이야기 -김영환 저- <한국경제신문>
http://www.ebay.com/itm/280837453206
http://blog.beforemario.com/


  1. 디즈니 캐릭터 카드가 출시된 첫해애 약 60만개의 판매량을 달성한다. [본문으로]
  2. 기존의 사명인 '닌텐도골패'에서 골패(骨牌)는 카드(カルタ)의 의미가 담겨있다. [본문으로]
  1. 노크
    2012.05.21 11:59

    그 한명의 엔지니어가 바로 훗날 게임의 신이라고 불리게되는 미야모토 시게루 님이였죠 ㅎㅎ

  2. DBDB
    2012.05.30 11:30

    감질나는 부분에서 끝나버렸네요. 재밌게 읽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2.06.01 19:19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이야기 흐름상 감질나게 끝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
      조만간 다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겠습니다.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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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게임 기업 닌텐도가 120년간 업계를 선두할 수 있던 것은 '놀이 문화'에 대한 기업 이념과 비전을 관철해온 결과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우리나라 전 국민의 90% 이상이 한 번쯤 접해보고 즐긴다는 '고스톱'은 48장의 화투(花鬪)를 가지고 만든 게임입니다. 이 화투는 19세기 조선 말기에 일본 쓰시마섬의 상인들로부터 넘어와 우리 식으로 변형되었다고 전해지는데요,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 일본의 야마우치 후사지로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이 화투가 오늘날 게임 산업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닌텐도(Nintendo)의 시작입니다. 

화투의 탄생, 야마우치 후사지로

:: 화투를 만드는 야마우치 후사지로 ::

19세기말 일본 메이지 시대, 교토에 살던 야마우치 후사지로(山内房治郎)는 평소 그림을 잘 그리고 손재주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개화 후 일본에 서양 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오면서 트럼프 카드 게임을 처음 접한 그는, 조개 껍데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본 풍속과 결합해서 스스로 독창적인 카드를 만듭니다. 1년 12달을 상징하는 카드마다 4장씩 엮어서 총 48장으로 표현한 놀이용 카드를 그렸는데요, 각 달마다 스토리를 담아냈고 카드마다 등급과 점수를 다르게 매겨서 다양한 형태의 게임을 표현할 수 있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화투의 기원인, 하나후다(花札, hanafuda)입니다. 반은 재미 삼아 만든 이 화투로 사업의 가능성을 걸어본 야마우치는 본격적으로 상점을 열어서 자신이 만든 카드를 생산-판매하기 시작합니다. 메이지 22년(1889년) 9월 23일, 자신의 사업을 하늘에 맡긴다는 뜻으로 '닌텐도 곳파이<任天堂骨牌(임천당골패)>'로 지은 카드 상점이 이렇게 시작 됩니다.

닌텐도를 창업한 아마우지는 본격적으로 화투 생산에 들어갑니다. 카드 한 장에 종이를 여러 장 겹쳐서 손에 쥘 만큼 두껍게 압축하고 외곽선을 강조하기 위해 꽃잎으로 추출한 물감들을 사용해서 화려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들의 첫 수공업 제품인 화투 '대통령(大統領)' 은 당시 놀이 문화라는 개념이 모호했던 교토 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삼삼오오 모여서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이 화투의 가장 큰 장점 이었습니다. 야마우치는 닌텐도 배 화투대회를 열어서 교토 인근지역에서 주목을 받을만큼 비즈니스 수완을 발휘합니다.

:: 닌텐도의 화투 대통령(大統領)은 나폴레옹 이미지로 패키지 되어 있다. ::

화투가 시작부터 일본 전역에 인기몰이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업 초기엔 교토와 인근 지역에만 판매를 하는 정도로 작은 규모로 시작했지만 폭력조직 야쿠자들이 화투를 도박에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닌텐도의 사업은 그야말로 '대박'이 터집니다. 전국에 기하급수적으로 야쿠자들의 도박판이 만들어지면서 화투의 수요가 급증합니다. 화투는 무엇보다 소모품이었기 때문에 금방 종이가 찢어지거나 너덜너덜해져서 자주 교환해야 했습니다. 결국 닌텐도는 넘치는 주문량을 감당할 수 없어서 전문적으로 도제를 육성해서 대량생산 체재로 돌입합니다. 화투의 첫 성공에 이어 야마우치는 1902년,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의 트럼프 카드를 생산하게 됩니다. 기존의 트럼프들은 재질이 나빴지만 야마우치는 화투를 제작하던 노하우를 발휘해서 고품질의 트럼프를 함께 만들어서 판매합니다. 화투와 마찬가지로 트럼프 역시 도박판에서 많이 사용하던 상품이라 날개 돋친듯 팔려나가기 시작합니다.

화투와 트럼프 카드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닌텐도였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교토와 오사카 인근 지역에만 직영판매하다보니 전국적인 수요를 감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19세기 말은 현대와 다르게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쉽게 갖춰지지 않던 때였습니다. 이런 닌텐도의 고민거리는 일본담배소금공사(일본전매공사)와의 협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담배와 소금은 일본에서 국가가 운영하던 독점 산업이라 전국적인 유통과 판매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투나 트럼프는 담배 한 갑 크기를 지닌데다, 담배 외판의 주 거래 업소 중에 하나가 도박장이었던 점에서 닌텐도의 상품과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유통망까지 갖춘 닌텐도는 이렇게 승승장구 하며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 닌텐도의 화투와 카드 광고판 ::

수성의 닌텐도, 야마우치 세키료

1929년, 야마우치 후사지로의 데릴 사위인 야마우치 세키료(山內積良)가 닌텐도의 차기 대표로 취임합니다. 당시 후계자가 없던 후사지로는 자신의 딸을 통해 데릴 사위로 세키료를 맞아들이게 되었고, 2대 야마우치는 기업을 좀 더 큰 규모로 일궈냅니다. 1933년에 '합명회사 야마우치 닌텐도(合名会社山内任天堂)'로 새출발하며 철근 콘크리트로 사옥을 짓고 제품의 업그레이드를 단행합니다. 수공업적인 생산 시스템도 공장과 기계로 인한 대량생산 체제를 갖췄고 종래의 일본전매공사와의 협력으로 진행된 위탁 판매 체재만으로로는 판매에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닌텐도 스스로 유통망을 갖추기로 결심합니다. 1947년에 닌텐도는 자사만의 전문 유통회사인 '주식회사 마루후쿠(丸福)'를 별도로 설립해서 전국적으로 직영 판매를 확대합니다.

화투의 품질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다양한 종류의 제품이 나온 것도 2대 야마우치 때였습니다. 당시 종이를 여러 장 붙이던 수공업 형태로는 생산 속도와 비용 측면에서 모두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공장에 의한 대량 생산 체재를 갖추면서 종이 사이에 석회 가루를 넣어서 굳히고 앞뒤로 디자인을 더욱 세련되게 하는 등 제품의 질을 향상 시킵니다. 무엇보다 석회 가루를 넣는 제조 방법에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져왔는데요, 오늘날처럼 화투를 칠 떄마다 특유의 경쾌한 탁! 탁! 소리가 나게 되면서 게임을 즐기는 재미가 더해졌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치다 보면 안에 석회가 터져 나와서 빈번하게 재구입해야 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화투는 비싼 제품이 아니고 소모품으로 인식되어서 재구입에 대한 반감도 적었던 점이 닌텐도에게 큰 이익을 안겨줬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도박 산업이 더욱 커지면서 닌텐도의 화투와 트럼프의 인기는 도무지 식지 않았습니다.

:: 일본에서 최초로 트럼프를 생산한 곳도 닌텐도였다. ::

격변의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 야마우치 히로시 ::

닌텐도의 야마우치 가문에는 아들 복이 없던 걸까요? 1대 야마우치에게 아들이 없어 데릴 사위가 가업을 승계해야 했던 것처럼 2대 야마우치에게도 후사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장녀 야마우치 키미를 통해 데릴사위로 들여온 사카노조가 닌텐도의 상속자가 됩니다. 그리고 1927년, 사카노조의 아들 야마우치 히로시(山内溥)가 태어나면서 야마우치 가문에 아들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히로시가 5살 쯤 될 무렵 차기 대표로 내정된 사카노조가 돌연 가출해 버립니다. 그의 아내 키미는 이 일을 부끄럽게 여겨 사카노조와 이혼 절차를 밟게 되고 2대 야마우치의 어린 손자인 히로시가 닌텐도의 상속자가 됩니다. 아직 전문 경영인 개념이 없던 20세기초 세습 경영은 기업의 존폐문제였던 시절인 만큼 기업의 후사 문제는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2대 야마우치는 이런 내부적인 위기와 문제를 사전에 종식시키고자 어린 시절부터 히로시를 상속자로 지명하고 철저한 후계자 교육을 시킵니다. 1947년에 닌텐도가 주식회사 마루후쿠를 설립했을 때 어린 야마우치 히로시가 대표로 취임한 것도 후계자 승계의 일환이었습니다.히로시는 어린시절부터 외조부인 2대 야마우치로부터 기업 경영을 위한 교육 부터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늘상 외조부에게 고집스럽고 반항적인 모습으로 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느덧 성인이 된 히로시가 와세다 대학 법학과에 입학할 무렵 외조부 2대 야마우치가 갑작스런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히로시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닌텐도의 대표가 됩니다.

이제 겨우 약관의 히로시가 기업을 이끌어가기엔 반대파가 많았던 탓이었을까요? 1949년, 히로시는 외조부로부터 닌텐도의 경영권을 승계하는 조건으로 야마우치가의 친척들을 모두 퇴사시키고 반대파를 하나씩 제거해 나갑니다. 회사 경영에 있어 야마우치 일가 친인척들의 간섭과 반대가 심한대다 지난 60여년간 기업 내에 팽배해있던 연공서열제와 관료주의가 닌텐도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히로시는 취임 후 자신의 경영 방침에 걸림돌이 될 많은 중역들을 정리해고 시켰고 이런 구조조정 과정에서 100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어린 경영자를 따를 수 없다면서 파업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대대적인 물갈이 작업을 마친 야마우치 히로시는 1951년, 사명을 '임천당골패 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새로 매입한 부지에 지은 신사옥으로 이전해 새출발 합니다. 수십년간 화투와 트럼프만 만들던 닌텐도에게 약관의 젊은 대표로부터 새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 야마우치 히로시가 지휘하던 초기의 닌텐도는 다양한 사업을 시도하며 '정체성' 찾기에 나선다. ::

참고 자료

닌텐도 이야기 -김영환 저- <한국경제신문>
http://www.nintendo.co.jp/n09/hana-kabu_games/index.html
http://ja.wikipedia.org/wiki/%E5%B1%B1%E5%86%85%E6%BA%A5
http://www.nintendo.co.jp/corporate/history/index.html

 

  1. ss
    2012.05.09 00:14

    다음편은 언제쯤 나오나요??

  2. Favicon of http://blackli.tistory.com BlogIcon 흑광
    2012.09.27 11:55

    닌텐도의 역사 잘 봤습니다.

  3. Favicon of http://gamingpoint.org/2013/03/top-10-best-snes-games/ BlogIcon Top 10 SNES Games
    2013.03.23 19:31

    닌텐도 역사의 좋은 요약입니다. 나는 아직도 유럽 사람보다 일본어 게임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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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모노폴리'와 함께 보드게임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생게임(The Game of Life)은 1860년 밀튼 브레들리(Milton Bradley)라는 한 석판인쇄공으로 부터 만들어진다. 그후로 100여년이 지나고, 그의 이름으로 설립된 회사는 최초로 LCD 디스플레이를 채택한 휴대용게임기를 출시하게 된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 Milton Bradley (1836~1911) ::

때는 19세기의 미국, 1860년에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된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한창 미전역에 선거 유세를 펼치던 시절입니다. 그 당시 밀튼 브레들리(Milton Bradley)라는 석판 인쇄공은 링컨 후보의 초상화를 인쇄해서 판매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인쇄를 모두 마치고 판매를 시작했을 때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선거 유세중이던 링컨이 어느날 한 소녀로부터 받은 편지로 인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턱수염을 기르기 전의 맨 얼굴로 인쇄를 모두 마친 브래들리의 그림은 더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브레들리의 판화 인쇄물을 보면서 링컨이 아니라며 사기꾼으로 몰고갈 정도였으니 당시 링컨의 턱수염이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을지 짐작해볼 수 있을겁니다. 결국 브레들리는 자신이 찍어낸 링컨의 판화 그림 인쇄물들을 전부 소각해야만 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불운으로 첫 사업에 실패했지만, 브레들리는 곧바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모색하게 됩니다. 때마침 친구로부터 보드게임의 아이디어를 얻은 그는, 자신의 뛰어난 제도 기술을 잘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보드게임을 출시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날 보드게임의 선구자로 불리는 인생게임의 최초작 'The Checkered Game of Life' 입니다. 이 게임을 한 번이라도 즐겨보신 분은 잘 알겠지만 게임을 통해 '진실한 삶'과 '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훌륭한 게임성을 갖췄습니다. 인생게임은 결과적으로 미전역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곧바로 브레들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됩니다. 그 뒤, 이 창업자의 이름으로 세워진 밀튼 브레들리 기업(Milton Bradley Company)은 1984년 하스브로(Hasbro)에 인수된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보드게임부터 전자 게임 업계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교환식 카트리지와 LCD 스크린을 채택한 마이크로비전(Microvision)

1979년, 보드게임에만 집중해온 밀튼 브레들리도 전자게임 시장이 활성화 되면서 휴대용 게임 사업에 착수합니다. 그들의 첫 작품 마이크로비전(Microvision)은 휴대용 게임기 역사에 큰 이정표를 제시한 제품이었습니다. 휴대용 게임기 최초로 LCD 액정을 사용하고, 그 당시 비디오 게임 업계에 유행하던 교환식 게임 카트리지 시스템을 채택합니다.

마이크로비전은 엔지니어 Jay Smith[각주:1]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16x16 픽셀의 LCD 액정이 채택되었습니다. 컨트롤러는 패들과 여러개의 버튼들이며 카트리지마다 버튼이 부착되어 있어서 제각각 다른 기능을 하는 점이 특이사항입니다. 이 게임기는 초반에 Intel 8021과 TMS1100 프로세서를 동시에 채택했지만 비용과 전력소모 및 과열 문제[각주:2]로 인해 나중엔 TMS1100만 단독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이크로비전은 처녀작 답게 문제점이 많았습니다. 스크린이 쉽게 부패되는가하면 심각한 방전 문제가 발생했으며, 컨트롤러가 포함된 게임 카트리지가 게임기와 접촉하면서 버튼부가 쉽게 망가지는 등 여러 결함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으며, 1982년까지 꾸준하게 생산되며 사랑받아온 제품으로 오늘날 화자되고 있습니다.


VFD 휴대용 게임기의 영원한 베스트셀러, 토미 팩맨 (Tomy Pac Man)

1970~80년대에는 VFD(진공 형광 디스플레이) 액정으로 다양한 제품이 만들어지던 시기였던만큼, 휴대용 게임기도 하나 둘 씩 출시되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스플레이 표현력이 더 뛰어나고 전력소모가 적은 LCD에게 자리를 빼앗기지만, 게임을 구현하기가 더 쉽고 외부 온도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각주:3] 튼튼한 장점덕에 널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휴대용 게임기와 장난감을 만들던 완구회사 토미(TOMY)는 1980년에 아케이드용으로 출시되어 일본부터 미 전역에 인기몰이중이던 남코(Namco)팩맨(Pac Man)을 정식 라이센스를 얻어서 VFD 액정을 채택한 휴대용 게임기 팩맨(Pac Man)을 출시합니다.

게임기 디자인 부터가 워낙에 개성적이고 노란색 팩맨의 이미지와 딱 맞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남는 VFD 휴대용 게임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게임 자체는 허술한 점이 많았습니다. 액정이 심하게 깜빡거렸으며, 팩맨의 입이 왼쪽에만 달려 있어서 먹이를 먹으려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해야만 하는 시스템적인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내에서도 영실업이 정식 수입되어 판매했기 때문에 80년대 초중반에 많은 이들이 접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반다이와 코카콜라의 만남, Catch a Coke

1980년대에 이르러 게임 시장이 활성화 되면서 다양한 프로모션 제품이 출시됩니다, 1982년에 반다이가 코카콜라와의 제휴로 제작한 휴대용 코카콜라 게임기 Catch a Coke가 바로 그 예입니다. 완구 회사인 반다이도 당시 트랜드에 발 맞춰 휴대용 전자 게임기 사업에 뛰어들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게임기는 시중에 판매되지 않았고, 코카롤라에서 프로모션용으로만 고객들에게 증정되었습니다. 게임은 좌우 버튼으로 이동하면서 코카콜라 캔을 받아서 스코어를 얻는 단순한 미니 게임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반다이가 손목 시계 게임기로로 출시한 Monkey Business와 동일한 게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개념 휴대용 게임기, 넬소닉(Nelsonic)의 게임워치(Game Watch)

1980년대 초에 이르러 LCD가 보급화되면서 디지털 시계도 부흥하게 됩니다. 넬소닉(Nelsonic)은 그당시 시계 제조 업체였던 M.Z. Berger를 인수하자마자 자사의 완구 사업 아이템과 결합하여 아동층부터 젊은 층을 대상으로한 완구용 손목시계 사업을 시작합니다. 인기있던 바비인형 등의 캐릭터들을 삽입해서 아동층과 젊은 세대에게 큰 인기를 얻습니다.
 
넬소닉은 곧 이어 휴대용 게임 기능을 탑재한 신개념 손목시계 게임 워치(Game Watch)를 완성합니다. 넬소닉의 게임 워치 사업 모델이 탁월했던 것은 그 당시 인기있던 아케이드 게임 제작사와의 라이센스 계약을 채결해서 팩맨, Q*Bert, 등의 유명 게임을 축소판으로 손목시계에 담아낸 점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아타리가 게임기와 게임 개발사와의 써드파티(Third-Party) 개념을 완성시켜 게임들을 유통한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결국 게임 워치는 큰 성공을 이루이었고, 10년 넘게 장수하며 30여종 이상의 유명 게임들의 라이센스를 얻어 출시하면서 폭넓은 인기를 얻게 됩니다.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격변기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휴대용 게임시장은 대격변기를 거치게 됩니다. 이외에도 열거되지 않은 콜레코(Coleceo), 엔텍스(Entex), 밤비노(Bambino), 파커 브라더스(Parker Brothers), 타이거(Tiger) 등 많은 전자&완구 회사들이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 참여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시장에는 많은 기업들이 경쟁을 벌일지라도 늘 시장을 선도하는 1위 기업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격변기의 휴대용 게임기 시장은 곧 일본의 한 완구 회사에 의해 평정됩니다. 3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휴대용 게임을 비롯해서 비디오 게임 시장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들 중 하나로 인정받는 이들이 전자 게임 산업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문헌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www.handheldmuseum.com
http://thebiggamehunter.com/company-histories/milton-bradley/
http://en.wikipedia.org/wiki/Milton_Bradley


  1. Jay Smith는 몇년 뒤에, 비디오게임기 Vectrex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2. Intel 8021 프로세서는 9V 배터리 2개가 필요했지만, TMS1100은 절반인 1개만 필요했다. Intel 8021 칩은 전력소모가 많은 만큼 많은 열을 발생시켜서 과열 문제로 하드웨어 자체에도 큰 무리를 주게 되었다. [본문으로]
  3. LCD는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액정이 쉽게 망가지는 단점이 있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archvista.net BlogIcon 아크몬드
    2012.04.08 02:34

    재밌게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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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80년대에 이르러 인형/완구류 업체들은 하나 둘 씩 전자 게임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바비인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있던 마텔(Mattel) 역시 전자게임 시장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최초로 휴대용 게임 시장을 열었다. ::

 
 
 
마그나복스와 아타리가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시장을 열면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을 때, 휴대용 게임 시장 역시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아케이드 게임기를 보면서 집에서도 즐기고 싶던 욕구가 가정용 비디오 게임으로 이어졌다면, 다음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즐기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럽게 휴대용 전자 게임기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휴대용 게임기의 기원을 탐색하면서 의외였던 것은, 예상 외로 그 시기를 1950~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던 점입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잠망경 시뮬레이션 게임기 Electronic - Firing Range 이며, 두 번째는 삼목 게임기 Electro Tic-Tac-Toe 입니다.
 
 

 

Cragstan's Electronic Periscope - Firing Range (1960's)


1950-60년대 전후 미국 점령하의 일본에서는 양철 재료로 제조된 틴토이(일명 깡통로봇) 산업이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주개발 경쟁이 심화되었고, 어린이들에게는 우주를 소재로 하는 장난감이 큰 인기를 끌었죠. 지금부터 소개할 크랙스턴(Cragstan)사도 주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완구류 등을 미국에 수입해서 OEM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건전지를 넣고 자동으로 움직이며 총을 쏘는 틴토이 우주비행사(ASTRONAUT)로 인기몰이 중이었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이 회사는 휴대용 게임기의 기원이라고 불릴만한 장난감을 출시하게 되는데요, 잠수함에서 잠망경으로 적을 탐색하고 공격하는 컨셉의 잠망경 장난감 'Firing Range' 입니다. 이 장난감은 건전지를 전원으로 사용하며, 시작 버튼과 무기 발사 버튼이 양쪽에 달려 있었습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필름스트립 형태로 부착 되어있는 움직이는 화상에 빛이 들어오면서 배가 출현하고, 발사 버튼을 누르면 무기 효과음이 나오는 아주 단순한 형태의 장난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기는 스코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디스플레이가 필름이다보니 어떤 시각적인 효과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전자 게임기라고 볼 수 없겠지만, 베터리를 전원으로 사용하고 테이블 위에 삼각대를 놓고 양쪽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디스플레이를 잠망경으로 보듯이 즐길 수 있는 컨셉만으로도 게임의 경험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휴대용 게임기의 기원으로 불릴 만한 것 같습니다.
 

  

Waco's Electro Tic-Tac-Toe (1972)

 
시간이 흘러 1972년, 미국의 장난감 재조사인 WACO에서 전자 게임기를 출시하게 됩니다. Electro Tic-Tac-Toe는 두 명의 플레이어가 녹색과 빨간색 레버를 바꿔가며 게임기에 부착된 9개의 버튼을 순서대로 누르면 해당 불빛이 들어오면서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게임이 끝나는 신호가 없기 때문에 수동으로 CLEAN 레버를 내려야 불이 꺼지고 다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이 게임기는 전자식 보다는 기계식[각주:1]에 가까운 게임기였습니다.

위 두 게임기는 아직 디스플레이 부분에서 전자 게임기의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초창기의 휴대용 전자 게임기는 주로 LED나 VFD(진공 형광 디스플레이), 또는 LCD를 사용한 디스플레이어와 컨틀롤러가 같이 붙어있는 하나의 게임기에 하나의 게임만 내장된 형태[각주:2]였으며, 손으로 들고 다니는 게 가능할 정도로 작거나, 테이블 위에 놓고 즐길 수 있는 정도의 크기까지 포함되었습니다. WACO의 삼목 게임기가 출시되고 4년 후인 1976년에 이르러, 드디어 최초의 전자식 휴대용 게임기가 탄생하게 됩니다.
 
 

 

바비인형의 마텔(Mattel), 휴대용 전자 게임시장을 열다.

 
마텔(Mattel)사는 인형의 집과 바비 인형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던 완구 회사입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마그나복스와 아타리가 가정용 비디오 게임 시장을 열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곧바로 가정용 비디오 게임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들은 휴대용(handheld) 게임기라는 또 다른 분야의 시장을 찾아 사업 가능성을 확신하면서 마텔전자(Mattel Electronics)를 출범하게 됩니다.
  
마텔이 최초로 만든 휴대용 게임기는 Missile Attack 이었습니다. LED 디스플레이를 채택해서 계기판에 삽입된 다수의 LED 조명이 들어오면, 레버와 버튼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전자 게임의 조건을 모두 갖췄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기는 미사일로 공격한다는 게임 컨셉 때문에 시장에 출시하지 못한 채 곧바로 단종시켜야 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소련과의 냉전(Cold War)으로 사회적인 긴장감이 팽배하던 시기라 전쟁을 상징하는 게임 컨셉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게임기 내에 디스플레이 밑면에 그려져있는 도시 그림은 사실상 뉴욕시의 외관과 비슷했기 때문에 NBC에서는 CF 방송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마텔은 곧바로 게임의 방향성을 전환했습니다. 첫번째 실패가 좋은 경험이 되었을까요? 두 번째는 건전한 스포츠로 게임 소재를 전환했습니다. 그렇게 레이싱 게임기 Auto Race(1976)가 탄생했습니다. 이 게임기는 4개의 기어를 변속하면서 속도를 높이거나 줄일 수 있고, 게임이 시작되면 숫자 카운트가 올라가면서 디스플레이에 있는 각종 장애물을 피하면서 최대한 부딪히지 않고 오랫동안 주행해야 하는 게임입니다. 게다가 오른쪽의 핸들로(휠이 아니라 레버 형태지만) 차선 변경이 가능했습니다.
  
 
이듬해에 출시된 Football(1977)은 미국내 NFL(미식축구)의 인기와 함께 마텔에게 큰 성공을 안겨줍니다. Football은 출시 된 첫 해에 시어스를 통해 판매되었지만, 제품의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한 첫해에는 10만개 미만으로 생산되었고 반년 넘게 생산이 중단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의 인기가 미전역을 뒤흔들면서 시어스가 자기들의 판단이 틀렸음을 알게되면서 1978년에 재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재생산된 1978년 2월 중순, 한 주에 50만대를 판매하는 진기록을 달성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Football의 성공에 힘 입은 마텔은 이후로 야구, 농구 등 다양한 스포츠 게임을 잇달아 출시하게 되었고 널리 사랑받게 됩니다.
  

:: 2000년 12월, 홀리데이 시즌을 맞아 마텔은 23년 만에 Football과 Baseball을 재출시하기도 했다. ::

 
Football을 통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마텔은 휴대용 전자 게임 시장을 연 선구자로서 게임 시장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었고 이어서 비디오 게임 시장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당시, 마텔에서 마케팅 디렉터로 있던 마이클 카츠(Michael Katz)[각주:3]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우리의 큰 성공은 첫 휴대용 게임기 아이디어를 개념화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디자인 그룹에 계산기 크기 만한 전자 게임기의 구상을 요청했죠.[각주:4]" - 마이클 카츠
 
마텔의 혁신으로인해 수많은 완구류 업체들도 휴대용 게임기 시장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제 휴대용 게임기 산업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면서 4억달러 규모로 전환 되었고, 마텔을 시작으로 콜레코(Coleco), 엔텍스(Entex), 반다이(Bandai), 토미(Tomy) 파커 브라더스(Parker Brothers), 넬소닉(Nelsonic) 등 많은 업체들이 시장에 참여합니다.
 
 
  
  
  
  
참고문헌
  
The Ultimate History of Video Games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www.handheldmuseum.com/
http://en.wikipedia.org/wiki/Handheld_game_console#cite_note-ultimate_history-13
 


  1. 버튼에 들어오는 불빛은 LED 가 아니라, 각 초록색과 빨간색 타일에 전구 불빛을 비추는 형태였다. [본문으로]
  2. 이 형태는 1980년대 말에 닌텐도가 카트리지 형태의 게임보이(Game Boy)를 출시하기 까지 유지된다. [본문으로]
  3. 마이클 카츠는 마텔과 콜레코를 거쳐 세가(Sega of America) 미국 지사의 수장을 맡게된다. [본문으로]
  4. Kent, Steven (2001). The Ultimate History of Video Games. Prima Publishing. p. 2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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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중심이자 십자가에 맞아서 기억상실에 걸린 컨트리송 대회 수상자 출신의 엠네지아 수녀, 발레리나를 꿈꾸며 레오파드를 입고싶어하지만 원장 수녀에게 허락받지 못해 불만인 레오 수녀, 원장 수녀의 대역이자 넘치는 장난끼를 주체하지 못해 늘 원장 수녀를 골탕 먹이는 로버트 수녀, 그리고 수녀원의 2인자로  늘 원장 수녀와 티격태격하지만 정이 많아 수녀들을 잘 챙겨주는 휴버트 수녀, 그리고 호보케 수녀원의 리더이자, 과거 서커스단 출신으로 TV를 너무 좋아하는 레지나 원장 수녀.
  
간단한 등장인물들의 소개만으로도 해학이 묻어나는 뮤지컬 넌센스의 한국판 두 번째 공연이 돌아왔습니다. 대학로 AN아트홀 소극장에서 개성과 끼로 무장한 5명의 배우들과 관객이 호흡하며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던 즐거운 공연이었습니다. 넌센스(Nunsense) 시리즈는 1987년에 미국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 다양한 버전으로 사랑받는 뮤지컬 입니다.
 
이번 넌센스2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은 이야기 상에서부터 극중 수녀들이 기획하고 준비한 '자선 쇼'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설정을 밑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만의 문화적 코드로 플롯을 재구성하기가 용이한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 공연장에 입장하는 관객들은 수녀원이 아니라 무속 설정의 무대 배경에 살짝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도 극중 수녀들이 준비한 '쇼'의 무대라는 점에서, 중간중간 보여주는 귀신 분장이나, 표주박 술 등의 소품들도 공연이 진행되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공연은 이야기-쇼-이야기-쇼-이야기 순으로 짜여진 플롯으로 공연이 진행되면서 뮤지컬 배우들답게 멋진 가창력과 노래를 통한 가사 전달, 연기, 그리고 유머까지...여느 공연들과 마찬가지로 배우들이 준비한 다양한 끼를 보면서 즐겁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관객들과 함께 하는 미니게임,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게 했던 엠네지아 수녀의 복화술 연기부터, 탭댄스, 롤러 스케이트 발래 연기, 마술, 1인자와 2인자 수녀가 객석에 난입하면서까지 즐겁게 해주는 취중 연기까지...1시간 40분동안 시종일관 터지는 웃음을 그치지 않도록 구성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주 내용 자체가 단순한 탓이었을까요? 쇼를 이야기와 함께 풀어내는 과정에서 너무 쇼에 비중을 크게 둔 것 같습니다. 쇼를 통해 정신없이 웃고 즐기는 사이에 이야기는 결말에 다다렀고, 다소 싱겁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더 크고 좋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코 수녀원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엠네지아 수녀가 고뇌하는 모습이라던지, 어쩔 수 없이 수녀들과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절정의 상황들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바람에 주이야기를 깊게 음미할 수 없던 점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넌센스2는 분명히 즐겁고 유쾌하며, 한 번 더 보고 싶은 공연임에 틀림 없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홈페이지를 방문해서 공연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 짧은 100분동안 즐거웠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며 미소 짓게 만들어주는군요. 향후에도 다양한 넌센스 시리즈를 만나 관객들과 즐겁게 소통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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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넌센스 홈페이지 (http://cafe.naver.com/inunsense2)

 
  1. 익명
    2012.03.15 18:16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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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핀터레스트는 '북마킹'과 '사진'을 결합해서 거대한 온라인 카탙로그 서비스를 완성했다. ::

최근 핀터레스트(Pinterest)라는 서비스가 인기라고 합니다. 이 서비스가 세간에 주목 받기 시작하면서 비슷하거나 모조품 처럼 보이는 서비스도(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덩달아 눈에 띄고 있습니다. 게다가 타 서비스에서 핀터레스트와 같은 UI로 보여주거나, 다른 서비스와 결합해서 매시업(Mashup) 서비스로 내놓은 지혜로운 모습까지 다양하게 보입니다.
  
요즘은 예전과는 다르게, 새로운 서비스를 접하면 식상함을 먼저 느끼게 됩니다. 모바일 앱까지 포함하면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서비스와 정보 속에 파묻혀 지내기 때문이겠죠. 핀터레스트를 처음 접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몇일간 살펴보니 사람들이 감탄할 만도 하더군요. 우리가 평소 벽이나 보드에 메모를 하고, 사진을 붙여서 핀을 꼽는 습관을 감성적으로 재현해 냈습니다. 그 뿐일까요, 사진을 Pin으로 꼽는 듯한 직관적인 UI를 채택했기 때문에 라이프스타일 부터 전문 분야까지 카테고리별로 분류해서 카탈로그를 보듯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비스에 계속 상주하게 됩니다. 여성 회원 비율이 압도적이라고 하니, 이 서비스를 이용하다보면 얼마나 자주 들리고 싶을지 짐작이 갑니다. 서비스를 이용하는 습관은 자연스럽게 서비스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지겠죠.
 
 

:: 최근에는 소셜 미디어로 더욱 많은 온라인 서비스가 탄생하고 있지만 그릇의 용도도 다양하고 사랑 받는 서비스는 극소수다. ::

그 시대에 사랑받는 서비스들이 화자될 때마다 저마다의 성공 비결들을 빠지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서비스는 검색엔진을 통해 공평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어떤 서비스는 글자 수 제한으로 실시간에 가까운 정보의 확산을 이루었는가하면, 어떤 서비스는 친구들을 기가막히게 잘 찾아줘서 전 세계 온라인 네트워크에 혁명을 일으키기도 했죠. 또 어떤 서비스는 온라인 동영상을 통해, 어떤 서비스는 사진 공유로, 어떤 서비스는 우리들이 북마킹 하는 새로운 습관을, 어떤 서비스는 이력과 경력 관리를... 이외에도 많이 있겠지만 늘 그 시기에 각광받고 사랑 받는 온라인 서비스들이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런데 늘 새로운 서비스가 나타나고 발전하는 것 같아도 결국 온라인 상에서 우리가 해온 본질적인 행동(Action)은 얼마나 변했을까요? 무언가를 생산하고(글이든 멀티미디어든), 널리 알리고(배포하고 공유하고), 서로 반응해주고(Interaction 이라고도 하죠), 원하는 정보들을 잘 엮어서 보여주는 것(검색에서 최근 유행하는 큐레이션까지). 그게 오늘날 모바일 기술이 발전하고 최근에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더욱 확산되었지만 애초부터 우리가 온라인을 통해 해온 본질적인 행동은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제 개인적인 화두는 '사랑받는 온라인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선 도대체 무엇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까?' 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전세계에 수 많은 스타트업과 기업들로부터 새로운 서비스들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아이템과 비전을 가지고 멋진 디자인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서비스를 만들어내지만 정작 주목 받고 사랑 받는 서비스들은 뛰어난 기술과 아름다운 디자인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주목 받지 못하는 서비스들의 BM(Business Model)이 형편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더군요.
  
오늘은 사랑받는 온라인 서비스 (특히 소셜 미디어와 웹&앱 서비스들)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 개인적인 생각들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포스팅 합니다. 물론 마케팅부터 시작해서 트렌드와 기술, 방법론 등 수많은 요소들이 있겠지만 그 부분은 오늘 포스팅에선 생략하기로 하고, 저는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들을 제가 주목하고 있는 2가지로 풀어내 보겠습니다. 바로 메시지(Message)컨셉(Concept)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론에 앞서 이 포스팅은 전문적인 식견이 아니라 지극히 제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용어나 단어 사용부터 시작해서 잘못된 부분이 있거나 더 좋은 의견이 있다면 편안하게 지적해 주시길 바랍니다. 가감할 부분은 충분히 반영해서 포스팅을 수정해 나가겠습니다. =)
  

최근에 위 사진을 보신 적이 있다면, SNS에 관련된 분야에 몸 담으시거나 관심이 많으신 분일거라 생각합니다. 최근 인기 있는 주요 소셜 미디어 서비스를 '도너츠'를 가지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반은 장난 스러운 문장들이지만 온라인 서비스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메시지'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사진이 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위에 열거된 서비스를 이용하는 유저들은 내가 이 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지, 그리고 이 서비스가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메시지 - 서비스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을 계속해서 전달해주자.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서비스들을 이용하다보면 내가 왜 이걸 해야하지? 라고 느끼게 하는 서비스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일례로 위 사진에서 열거된 구글 플러스는 아직 시작단계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재로선 자신만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논란이 있겠지만 다수가 공감하리라 믿습니다.) 자, 그럼 저는 지금부터 '도너츠'를 가지고 한가지 가상의 상황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도너츠를 좋아하는 대학생입니다. 주말에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약속장소를 시내의 A 도너츠 가게로 정했습니다. 약속 당일, 장소에 먼저 도착한 저는 스마트폰을 열어서 포스퀘어(Foursquare)를 실행합니다. 오랜만에 방문한 A 도너츠 가게에 체크인(Check-in) 하기 위해서죠. 체크인을 하고 나니 저 멀리 여자친구가 오고 있는 모습이 보이네요. 이제 저희는 가게에 들어가서 주문한 도너츠를 받아서 자리에 앉습니다. 맛있는 도너츠를 보기전에 먼저 인증샷을 찍어서 트위터(Twitter)로 도너츠를 먹고 있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트윗합니다. 도너츠 사진은 빈티지한 사진으로 멋지게 만들어서 공유해주는 인스타그램(Instagram)을 이용해 페이스북, 트위터에도 동시에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지요. 그리고 오늘은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이 도너츠 가게의 멋진 내부와 진열된 맛있는 도너츠들을 동영상으로 찍기로 하고 열심히 촬영했습니다.
  
데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A 도너츠의 페이스북(Facebook) 브랜드 페이지를 방문합니다. 당연히 저는 이미 이 페이지를 좋아요[Like] 중인 팬이죠! A 도너츠는 브랜드 트위터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 역시 Follow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평소 A 도너츠 브랜드에 대한 정보를 자주 확인하는 저는, 오늘 먹은 도너츠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 동시에 평소 보이는 서비스 문제점도 서슴치 않고 이야기 합니다. 담당자가 제 의견에 반응을 하면서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답변해주네요. 이제 유튜브(Youtube)에다가 오늘 방문한 A 도너츠 매장과 도너츠 영상을 올려야 겠습니다. 이 영상은 제 블로그를 포함해서 많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영상이 공유되겠죠?
  
도너츠를 좋아하다보니, 평소 도너츠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도너츠의 종류와 레시피 등을 확인하기 위해 최근 유행하는 핀터레스트(Pinterest)에 접속해서 도너츠를 검색해봅니다. 정말 다양하고 맛있는 도너츠부터 요리법까지 사진들이 카탈로그 처럼 펼쳐져서 제 눈을 즐겁게 해주는군요. 그리고 최근에 A 도너츠 브랜드를 창업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도너츠 장인 B씨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요 링크드인(Linked in)에 접속해서 도너츠를 만드는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보고 이들의 커리어들을 확인해봐야겠습니다. 혹시 아나요? 저도 졸업 후에 전공을 살려서 도너츠 회사의 브랜드의 마케터가 될 지 말이죠. =)
 
제가 위에서 열거한 서비스는 총 7가지입니다. 이 7가지 서비스들은 우리가 온라인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동 범위 내에 선택되고 사랑받는 서비스들 입니다. 특히 현재 소셜미디어 분야에서 대표적인 서비스로 자리매김하고 있죠.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제가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만큼 이미 우리의 온라인 생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GPS와 모바일 기술의 발달로 LBS 서비스의 대표주자가 된 포스퀘어, 가볍고 온라인에 직관적으로 감성적인 사진으로 필터링해서 공유할 수 있는 인스타그램도 있습니다. 굳이 소셜미디어 서비스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분야의 온라인 서비스들도 저마다 우리들이 온라인 행동 범위 내에서 선택되어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 받는 서비스가 되려면 그 서비스를 통해 이용자들이 온라인 상에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지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줘야 합니다. 인스타그램처럼 온라인 상에서 사진을 쉽고 멋지게 찍어서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포스퀘어처럼 내가 들렸던 장소들을 온라인에 기록하고, 서두에 잠깐 소개했던 핀터레스트와 같이 특정 분야의 정보들을 예쁘게 편집해서 공유할 수 있게 해주거나,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행동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메시지는 서비스의 비전으로 이어집니다. 서비스의 기획-설계 단계에서부터 유행에 편승해 성공한 서비스들의 기능들만 이것저것 붙여서 조합하다 보면 프로젝트는 산으로 가버리거나 고질라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보다 우리가 온라인에서 해오는 행동들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비전을 품어야 비로소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명확한 메시지를 뒷받침해주는 또 다른 중요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일관된 컨셉(Concept) 입니다.
  

:: 결국 컨셉은 UX에 관한 이야기다 ::


일관된 컨셉 -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해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자.

 
제가 말한 컨셉은 말만 거창했지 결국은 UX(User Experience)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UX에 대한 프로세스나 전반적인 방법론에 대해 이 시간에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건, UX의 어떤 요소들도 서비스의 메시지를 흔들지 않을 일관된 컨셉을 가지고 풀어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전체적인 방향성이 될텐데요, 다시 위에서 열거한 서비스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스타그램(Instagram)은 모바일 단말기로 사진을 찍어서 바로 온라인 상에 공유할 수 있는 행동을 보다 발전시켜서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발전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빈티지한 아날로그 카메라의 필터 기능을 채택했습니다. 그냥 사진을 찍더라도 다양한 카메라 필터 때문에 이용자가 사진을 찍은 뒤에 그 사진을 더욱 감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다양한 필터 기능을 제공했습니다. 이것이 인스타그램의 가장 큰 강점이자 메시지를 뒷받침 해주는 강력한 컨셉입니다.
  
포스퀘어(Foursquare)는 어떨까요? LBS 서비스의 선두주자 이지만 단순히 GPS로 위치를 찾아서 체크인하는 기능을 뒷받침 해주기 위해 특정 장소(Venue)에 가장 빈번하게 체크인 한 유저에게 가상의 시장(Mayor)의 권한을 부여해주거나 서비스에서 이루어지는 특정 조건을 만족했을 때 부여해주는 뱃지(Badge)로 명확한 서비스 컨셉을 갖추면서 서비스 메시지를 빛내줍니다. 단순히 뱃지만 놓고 본다면 별 매력이 없습니다. 포스퀘어의 LBS 서비스 메시지를 뒷받침 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뱃지에 열광하며 포스퀘어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핀터레스트(Pinterest)는 기존에 북마킹과 사진을 결합시켜서 직관적인 정보의 편집과 공유를 이루게 될겁니다. 이를 위해 보드에 (Pin)을 꼽아서 메모하고 스크랩하던 우리의 습관을 컨셉으로 잡아 명확하게 구현해 냈습니다. 피닝(Pinning)으로 불리는 이 새로운 행동은 사진 UI와 결합되어 여성들에게 감성적으로 어필하면서 업계에 신데렐라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메시지를 명확하게 해준 일관되고 멋진 컨셉입니다.

카카오톡(Kakao Talk)은 오늘날  대한민국 스마트폰의 대명사입니다. 단순히 문자를 주고 받는 행동을 더욱 발전 시켰습니다. 네트워크를 통해 마음껏 문자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로 말이죠. 이를 위해 컨셉을 명확하게 하기위해 다양한 UI와 기능들을 보완했고 대한민국 스마트폰 혁명과 함께 견고한 위치를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각 이동통신사와 대기업에서 비슷한 어플을 내놓아도 카카오톡의 위치가 견고한 것도 이미 명확한 메시지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컨셉으로 유저들 마음에 정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위 서비스들의 디자인과 기능들은 모두 일관된 컨셉을 가지고 있고, 서비스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

저는 위 서비스들이 기획-설계 단계에서 개발로 이어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구성했을 지, 시장조사는 어떻게 하고 스토리보드는 어떤 방향으로 짰을 지 등을 말이죠. 아니, 현재 단계에서는 굳이 알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서비스를 구현해 나가면서 현재보다 더 멋진 기능과 디자인 아이디어들이 튀어 나왔다 하더라도 본래의 메시지, 서비스 비전이 흔들리는 요소가 있다면 과감하게 제거했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이라도 모든 장소와 위치에 어울리는 건 아닐테니까요.
 
그리고 위 서비스들은 앞으로도 UI가 변하고 여러가지 기능이 추가되더라도 메시지를 흔들리게 하거나 정체성을 잃게 하지 않는 한은 오랫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계속해서 열릴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새로운 서비스들은 우리가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행동 양상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행동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메시지와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할 컨셉으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그 서비스는 도태될 것이 분명하고 서서히 사람들에게 잊혀져가게 됩니다.)
 
 

명확한 메시지를 제시하고 일관된 컨셉을 유지하자.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2012년엔 10여년전 닷컴버블 이래로 벤쳐가 다시 열풍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새로운 온라인 서비스와 제품을 만들며 꿈을 키워가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와 기술들도 하나의 푯대를 향해 조화롭게 나아가지 못한다면 목적지에 도달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 글은 제 개인적으로도 마음을 다잡는 포스팅이기도 합니다.
  
가슴 뭉클한 비전으로 무장된 메시지, 그리고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해줄 일관된 컨셉. 이 기본을 평생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 이라면 멋진 서비스를 탄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
 
  1. Favicon of http://itagora.tistory.com BlogIcon 트람
    2012.03.26 11:39

    오랜만에 방문하여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월요일 아침부터 많은 생각을 해주게 하는 글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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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urs
Happiness Colours by Camdiluv ♥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경제학원론을 살펴보면 GNP(국민 총생산)와 GDP(국내 총생산)로 행복(Happiness)지수를 측정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GNP와 GDP의 수치가 높은 국가는 그만큼 행복지수도 높을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죠. 이 경제학 관점에서 본 행복은 시대를 거듭하면서 기존의 자본주의에서 이어진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경제와 행복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부끄러운 기록과 함께 이 글을 작성하는 2011년 연말, 그 여느때보다 대한민국 청소년의 학교폭력, 왕따 문제로 이어지는 자살 이슈로 시끄러운 요즘에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그만큼 더 행복해졌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2011년 마지막 포스팅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올 한 해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19세기 영국이 낳은 사상가 존 러스킨(John Ruskin)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Unto This Last) 입니다. 사실 저는 경제학이라는 학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이 책이 올해 가장 큰 감명을 받았던 이유는 자본주의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에 속해있는 제 고정관념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경제학이란 철저하게 손익과 형평성을 따지는 경제학이 아니라 사랑과 온정으로 '생명의 부(富)'를 이루고자 하는 생명의 경제학이었습니다.
 
존 러스킨이 주장하는 이 생명의 경제학의 핵심은 한 성경 구절로부터 시작 됩니다. 바로 성경 말씀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포도원 일꾼>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그 주인은 하루 품삯으로 1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오전 9시쯤 돼 그가 나가 보니 시장에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너희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도 포도원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12시와 오후 3시쯤에도 다시 나가 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오후 5시쯤 다시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왜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서 빈둥거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 주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내 포도원에 와서 일하라’고 말했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이 관리인에게 말했다.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지불하여라. 맨 나중에 고용된 사람부터 시작해서 맨 처음 고용된 사람까지 그 순서대로 주어라.’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 각각 1데나리온씩 받았다. 맨 처음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는 자기들이 더 많이 받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각 사람이 똑같이 1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들은 품삯을 받고 포도원 주인을 향해 불평했다.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은 고작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고되게 일한 우리와 똑 같은 일당을 주시다니요?’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일꾼 중 하나에게 대답했다. ‘여보게 친구, 나는 자네에게 불의한 것이 없네. 자네가 처음에 1데나리온을 받고 일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자네 일당이나 받아가게. 나중에 온 일꾼에게 자네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네. 내가 내 것을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내가 선한 것이 자네 눈에 거슬리는가?’

이처럼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장 1-16절)
 
포도원 주인은 하루에 뜨거운 뙤약볕에서 10시간을 일한 사람이나 1시간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은 일당을 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형평성에 따르면 포도원 주인의 처사는 조금도 합리적이지도 않고 불공평 합니다. 아무리 기독교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저라도 포도원 주인의 행동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철저한 손익과 형평성을 밑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에서 발전한 신자유주의에 머물러있는 한, 경제가 발전하는 나라일 수록 그 결과는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 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이런 부는 결코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부자가 되는 기술은 절대적으로나 궁극적으로나 자신을 위해 많은 재산을 모으는 기술일 뿐만 아니라, 이웃이 자기보다 적게 소유하도록 획책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인 것이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거절하고 있는 것은, 식량만이 아니다. 지혜도 거절하고, 미덕도 거절하고, 구원조차도 거절하고 있다.”
 
존 러스킨은 사랑과 온정이야말로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지금으로부터 무려 150년 전에 말이죠. 인간 관계는 손익과 형평성으로 풀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책에서도 예시로 든 '빵 한조각 밖에 남지 않은 굶주리는 가정에 엄마와 자녀들의 이해관계'가 경제학이 말하는 손익과 형평성으로 계산이 될까요? 우리 인간은 동물과 다르기 때문에 온정과 사랑이야 말로 경제학을 이루는 근간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생명이 곧 부(富)다. 이 생명은 사랑과 환희와 경의가 모두 포함된 총체적인 힘이다. 가장 부유한 국가는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국민을 길러 내는 국가이고, 가장 부유한 이는 그의 안에 내재된 생명의 힘을 다하여 그가 소유한 내적, 외적 재산을 골고루 활용해서 이웃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
 
별나라에서 온 경제학이라고 생각될지 모르나, 사실 이 경제학이야말로 지금까지 존재해 온 유일한 경제학이었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중략)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국민을' 길러 내는 경제학이라 했는데, 과연 '고귀함'과 '다수'가 양립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믿는다. 양립할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상호 공생하는 관계라고 믿는다.”
 
러스킨의 경제학 이론이 너무 이상적이었기에 그당시 사회주의자라고 오해 받으며 오래동안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러스킨의 이상과 이론이 현실이 되어가는 국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해오던 선진국들이 하나둘씩 무너져가는 가운데 행복한 국민을 길러내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의 정책이 새로운 대안이 되고 있는 점도 그렇고, 아시아에서도 국가총행복(GNH)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부탄'과 같은 나라가 그 예입니다. 특히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최대 다수의 행복한 국민을 만들기 위해 정책적으로 근로자들의 교육과 훈련에 집중하며 비정규직을 철폐하고 국가 예산에 교육과 복지에 들어가는 비중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래서 과도한 세금에도 만족하며 납세를 하고 있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국가가 그만큼 투명하고 국민들의 안정을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실업을 하더라도 사회에서 실업보험이 넉넉히 지급되는데다, 기술 클래스 별로 나눠서 동일노동-동일임금 정책을 지원하는 덴마크 같은 국가에서는 실업을 하게 되면 전국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직업 훈련소에서 교육을 받아 기술 승급을 높인 뒤 오히려 높은 임금으로 노동을 받을 수 있는 기회까지 열리게 됩니다. 기업 역시 동일한 임금으로 과잉고용 문제를 겪지 않는데다 고용에도 탄력성을 얻게되어 정규직-비정규직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공산국가들처럼 일 하는 성취감과 욕구가 없어 결과적으로 국가의 생산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겁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지만 러스킨의 이론은 사회주의와 다릅니다. 모두에게 균등한 임금으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노동 분야에 마땅하고 바람직한 제도를 적용해서 각 노동 분야마다 고정된 임금을 규정하되, 유능한 노동자는 계속 고용되고 무능한 노동자는 고용되지 않도록 운영해야 한다. 반면 이치에 어긋나 거스른 파괴적인 노동 제도는 무능한 노동자가 반값에 일자리를 잡아 유능한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거나, 혹은 가격에 대해 출혈경쟁을 펼쳐 유능한 노동자로 하여금 부당한 임금을 받고 일하도록 조장한다. 동일한 노동 분야별 임금의 평등화야말로 최단 시간에 최단 거리로 이르는 길을 개척해서 도달해야 할 우리의 첫 목적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요? 실업율을 낮추기 위해 낮은 임금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정규직 및 고용주와의 갈등을 빚게된 비정규직 문제만해도 그렇고, 그 밖에 여러가지로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국가 정책적으로 시도하며 노력을 거듭해도 해결책이 쉽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갖는 한계라는 것이 오늘날의 주장인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이쯤에서 줄일까 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같은 비전공자라도 많은 분들의 일독을 권하며, 마지막으로 러스킨이 밝히는 '진정한 부(富)와 부자'에 대한 생각을 여러분도 한 번 되짚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사회에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탄탄한 재력을 갖춘 사람 중에 검소하고, 주위의 인정을 받고, 근면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누리고 있는 삶의 희락이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본보기가 될 인물들은 세상에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알려지는 여부는 하늘의 뜻에 맡겨둔 채, 행복한 인생을 살기로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때문에 더욱 많은 부(富)보다는, 소박한 기쁨을 추구하고, 보다 높은 액수의 재산보다는 보다 깊은 천국의 보물을 추구하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재산목록 제1호로 삼고, 자만이 아닌 자존감이 높고, 화평과의 잔잔한 사귐을 통해 스스로를 존귀하게 높이는 그런 사람들이다”
 
2012년도에는 대한민국에 이렇게 사랑과 온정이 넘치는 부자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간 우리나라도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국민을 길러내는 부유한 국가가 되리라 믿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
 
추가로, 이 책을 읽게 되기까지 2년이나 지났지만 블로그를 통해 책을 추천해주신 최동석 교수님께 이 글을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 익명
    2012.01.16 11:29

    비밀댓글입니다

  2. Favicon of http://masters.or.kr/24545 BlogIcon 주우
    2013.01.08 23:11

    제가 번역한 ^노자의 발견^에서 노자는 복지국가를 제시하죠. 남을 진정 잘 되게 하면 신이 주는 복을 말합니다. 상대적 빈곤보다 현실에 만족하는 법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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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 위치한 트리니티 대학은 모교에 350만달러를 기증한 졸업생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종교-사회 분야의 연구 센터를 그의 이름으로 변경해서 기념한다. 그 주인공 레오나드 그린버그(Leonard E. Greenburg)는 가죽 공구사에서 전자 게임회사로 거듭난 콜레코(Coleco Industry Inc.)에서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연 기업인이자 박애주의자로 오늘날까지 사회 공익활동에 기여하고 있다. ::

 
  
 
 
1932년. 러시아 이민자 출신의 유태인 모리스 그린버그(Maurice Greenberg)는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Connecticut Leather Company(코네티컷 가죽회사)를 설립합니다. 이 회사는 초기에 구두 수선에 필요한 용품을 제작해서 구두 공방이나 가게에 납품하는 사업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몇년 뒤에 그린버그 사장의 아들 레오나드 그린버그(Leonard Greenberg)가 다양한 가죽 공구 제품들을 만들기 시작하는데요, 그중에 모카신 키트는 아주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회사는 50년대에 이르러서 플라스틱 재질의 완구류 사업을 확장하게 됩니다. 특히 유아용 소형 풀장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1962년, 코네티컷 가죽회사는 자사의 가죽 용품 사업 지분을 매각하고 콜레코(Coleco Industries Inc.)라는 사명으로 변경합니다. 그 무렵, 그린버그의 또 다른 아들 아놀드 그린버그(Arnold Greenburg)는 재직중이던 법무사 사무소를 나와 콜레코의 경영 일선에 참여[각주:1]하게 되면서 콜레코의 완구류 사업은 크게 성장합니다. 이듬해인 1968년, 콜레코 테이블용 하키 게임을 만들던 캐나다의 완구 회사 Eagle Toys를 인수해서 '콜레코 케나다'로 사업을 확장합니다.
 
 

:: 그린버그 부자와 초창기 Connecticut Leather Company 건물 모습. 우측사진은 1971년 5월 25일, 뉴욕증권거래소 상장후 첫번째 주식 거래 기념 사진 ::


콜레코는 창업주와 그의 두 아들, 그린버그 부자들의 삼두정치로 운영 되었습니다. 아버지 모리스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사업을 추진해나가는 리더십을, 레오나드는 제조와 엔지니어링에 재능을, 그리고 아놀드는 재무와 마케팅에 뛰어난 성과를 발휘하면서 회사는 성장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콜레코는 1971년에는 NYSE(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고, 포츈 500 기업에 선정되며 승승장구 했고 이후 1976년,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텔스타(Telstar)를 출시하면서 전자 게임 산업에 진출합니다.
 
  

텔스타(Telstar)로 전자 게임 산업에 출사표를 던진 콜레코

 
콜레코가 게임 사업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단순했습니다. 자사의 제품들이 너무 봄-여름 시즌에 치중되어 있다보니 콜레코 공장의 제조 라인이 1년간 잘 가동되어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야외 활동이 줄어드는 늦가을-겨울 시즌에도 판매할 제품이 필요했습니다. 그당시 아놀드 그린버그는 텔스타를 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동기를 밝힙니다.
  
"우리는 공장 운영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적합한 제품을 반드시 찾아야만 했습니다. 이당시 전자 게임 사업만큼 매력적이고 콜레코와 잘 어울리는 비즈니스는 없었죠.[각주:2]"
 

:: 텔스타는 초기버전과 가격을 낮춘 클래식 버전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첫 해에 100만대 이상의 판매량은 달성한다. ::

 
텔스타는 최초로 GI(General Instruments)AY-3-8500 싱글칩을 이용한[각주:3] 게임기로, 테니스, 하키, 핸드볼 3가지 게임이 내장되어 있었습니다. GI의 칩을 이용하게 된 계기는 당시 콜레코의 수석 전자 디자이너인 에릭 브롬리(Eric Bromley)는 그린버그의 지시대로 제작단가를 $100 아래로 낮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합니다. GI의 프로세서는 기판 당 $8~10에 이르는 가격면에서 큰 매리트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텔스타는 초기 모델을 $69.95에, 같은 해에 출시한 텔스타 클래식(Telstar Classic)은 $50에 판매하면서 가격경쟁력을 얻는데 성공했고, 내장된 세 게임마다 3단계의 레벨(Level)이 존재하는 차별성을 둬 소비자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콜레코는 그해 텔스타를 100만대 이상 판매하면서 마그나복스와 아타리가 주름잡던 가정용 비디오게임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했습니다.
 
  
 
텔스타 개발에 대한 재미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요, 최초의 가정용 비디오 게임 오디세이를 만든 랄프 베어(Ralph H. Baer)의 협력을 통해 완성했다는 점입니다. 출시 초기에 콜레코는 텔스타 시제품의 FCC(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미국 연방 통신 위원회)의 RFI(Radio Frequency Interference: 고주파 잡음 방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마침 아놀드 그린버그는 오디세이를 만든 랄프 베어를 기억했고, 그가 소속되어있는 Sanders Association 연구실로 협력을 요청해서 텔스타 RFI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하게 됩니다.
 
더욱이 이듬해인 1977년, 콜레코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임기로 알려져 있는 텔스타 아케이드(Telstar Arcade) 역시 랄프 베어가 Sanders에서 유능한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을 모아 팀을 결성해 특이한 삼각형 모양의 기판을 디자인하는데 기술적으로 큰 도움을 줍니다.[각주:4] 텔스타 아케이드는 퐁 페달, 슈팅건, 레이싱 휠의 3가지 모드의 컨트롤러를 3면에 하나씩 갖췄고 4개의 게임 카트리지를 $25에 별도로 판매[각주:5] 했습니다. 삼각형 모양의 게임 카트리지는 은색의 알루미늄 재질로 외관을 코팅했는데요, 에릭 브롬리의 설명에 의하면 발열과 RFI(고주파 잡응 방해) 때문에 카트리지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한 결과였다고 합니다.
 

:: 참신한 게임기로 알려진 텔스타 아케이드(Telstar Arcade)는 게임 카트리지와 하드웨어가 모두 삼각형 모양이다. ::


콜레코의 계속되는 도전, 휴대용 게임기 일렉트로닉 쿼터백(Electronic Quarterback)


콜레코는 창사 이래 텔스타로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지난 30여년간 늘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하지만 위기 때마다 즉각적인 회복으로 회사를 유지해왔습니다. 1977년 Mattel이 휴대용 미식축구 게임기 Mattel's Football을 출시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아놀드는 마텔의 풋볼 게임에서 휴대용 게임기 사업의 큰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듬해에 콜레코는 마텔의 제품보다 더 기능적으로 향상된 휴대용 미식축구 게임기 일렉트로닉 쿼터백(Electronic Quarterback)을 출시하게 됩니다.
  

:: 콜레코는 비디오게임 성공적인 진출에 이어, 휴대용 미식축구 게임기 시장에도 진출하게 된다. 좌측은 마텔의 미식축구 게임 ::


콜레코는 마텔을 쫓는 후발주자였지만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밝은 미래를 확신한 아놀드의 마케팅 감각이 빛을 발휘하게 됩니다. 일렉트로닉 쿼터백의 TV 광고를 마텔 제품과 콜레코 제품의 인형옷을 입은 두 배우가 자신의 제품이 더 뛰어남을 강조하며 경쟁하는 내용으로 구성하면서 출시 초반부터 '마텔의 풋볼 게임의 경쟁자 = 콜레코 일렌트로닉 쿼터백'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CF는 향후 인텔리비전 vs. 아타리 2600 경쟁구도의 CF보다 몇년 더 앞선 게임업계 최초의 경쟁형태의 광고로 의미가 깊습니다. CF 광고에 힘입어 인기몰이에 성공한 콜레코는 일렉트로닉 쿼터백을 300만대 이상 판매하면서 휴대용 게임 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또한 Sears사에 라이센스 계약를 체결해서 로열티를 받는 등 다방면에서 판매 전략을 확대합니다.
 


이제 게임 시장은 아케이드 및 가정형 비디오게임을 시작으로 휴대용 게임에 이르기까지 분야가 다양해지고 많은 업체들이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사업에 뒤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 기술의 발전과 함께 게임 산업도 더욱 풍성해지게 됩니다.




참고 문헌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www.trincoll.edu/Academics/centers/GreenbergCenter/Pages/LGreenberg.aspx
http://www.pong-story.com/coleco_telstar.htm
http://www.colecovisionzone.com/page/coleco%20industries/coleco%20history.html
http://en.wikipedia.org/wiki/Coleco_Telstar
http://www.gooddealgames.com/articles/Home%20Video%20Game%20History.html
http://www.handheldmuseum.com/Coleco/EQB.htm
 

  1. 훗날 아놀드는 콜레코의 대표이사로 취임하게 된다. [본문으로]
  2.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p.32) [본문으로]
  3. http://en.wikipedia.org/wiki/AY-3-8500 [본문으로]
  4. 랄프 베어와 콜레코의 관계에 대해서는 데이비트 윈터가 제공한 랄프 베어의 편지에 수록되어 있다. http://www.pong-story.com/coleco_telstar.htm [본문으로]
  5. 텔스타 아케이드에는 1번부터 4번까지 4개의 카트리지가 존재했는데, 카트리지 마다 3개의 게임이 내장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onionmixer.net BlogIcon onion
    2012.01.09 13:46

    에헤헤.. 좋은글 잘봤습니다.
    역시 revolution은... 예측조차 되지 않는곳에서 일어나는거군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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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 Jobs 1955-2011

2011. 10. 6. 09:43 | chat



5 October, 2011

드라마 처럼 열정적으로 살다가,
드라마 처럼 조용하게 떠났습니다.

그가 IT 역사에 남긴 업적은 길이길이 기억 되겠죠.
그와 한 시대를 살고, 그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제품을 누릴 수 있었다는게 제겐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1. Favicon of http://realog.net BlogIcon 악랄가츠
    2011.10.06 17:31

    아이팟-아이폰으로 이어진 지난 7년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친근하였던 그,
    이제 그의 발표를 볼 수 없다는 점이 무척 슬프네요.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10.06 18:53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우리 시대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의 PT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게 가장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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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은 Bill Evans의 ELSA 듣고 있습니다.
소원은 파스타를 만드는 중입니다.
소원은 한강 둔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소원은 게임 'The Sims Social' 을 즐기고 있습니다.


음식을 만들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운동을 하는 등의 소소한 일상들이 이제 타인에게 굳이 알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 된다면 어떨까요? 페이스북이 f8 개발자 컨퍼런스를 통해 제시한 오픈 그래프 (New Open Graph)가 한 단계 더 진화했습니다. 이제부터 나의 관심사나 삶에서 이루어지는 행동들을 굳이 사람들에게 알리는 수고를 거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페이스북을 통해 연결된 친구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8억명이라는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이용자를 가진 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는 그러한 행위들이 네트워크를 타고 더욱 빠른 속도로 퍼질 것입니다.
 
3년 전, 페이스북 커넥트(facebook connect)를 발표한 뒤로 전 세계 대부분의 웹사이트를 페이스북으로 연동시켰고, 작년에 발표한 소셜 플러그인(social plugins)을 통해 '좋아요(Like)'라는 새로운 신드롬을 일으킨 데 이어, 이제는 더욱 진화한 오픈 그래프로 우리의 삶을 '또' 변화 시킬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오픈 그래프는 8억명이라는 거대 네트워크를 통해 빠른 정보 확산을 이룬다.


오픈 그래프는 페이스북 커넥트를 통해 연결된 페이스북 앱(app)이 나의 페이스북 개인 정보들을 토대로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CNN 뉴스의 페이스북 앱을 이용한다면, 좋아하는 뉴스 카테고리나 개인 취향을 일일이 입력하지 않아도, 페이스북에 자연스럽게 쌓여진 정보들만 가지고도 맞춤 뉴스들만 뽑아서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이번 f8을 통해 한 단계 진화한 오픈 그래프는(New Open Graph) 이런 페이스북 앱에 연결된 내 개인의 행동들(위 영상처럼 음악을 듣고, 운동을하고, 요리를 하는 등)을 '티커(Ticker)'라는 창을 통해 자연스럽게 내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사전에 사용자의 동의 하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픈 그래프와 티커의 조합으로 내 친구가 읽고 있는 뉴스 기사, 내 친구가 달리고 있는 장소, 내 친구가 좋아하는 음악, 내 친구가 현재 즐기고 있는 게임 등을 공유하기 때문에 거대한 사용자 네트워크를 가진 페이스북에서는 정보들의 확산이 더욱 빠르고 풍성한 정보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듣는 음악들을 통해 친구들은 내 음악 취향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고, 기업들에겐 고객의 귀중한 데이터를 얻게 되는 셈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볼까요?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짝사랑 하고 있는 대학교 선후배 그(녀)가 평소 이어폰을 통해 듣고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알아내려는 수고가 줄어들 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그녀가 듣고 있는 음악이 페이스북 앱 서비스를 통해 연결된 음악이라면 말이죠. =)
 

:: 내 친구가 현재 듣고 있는, 그리고 평소에 좋아하는 음악이 뭘까? 이제는 페이스북이 쉽게 그 답을 알려줄 지도 모른다. ::


또한, 이 오픈 그래프를 통해 고객의 정보를 원하는 기업들에게도 새로운 기회이자, 치열한 경쟁의 장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오픈 그래프는 기업에겐 새로운 마케팅 기회이자, 치열한 경쟁의 장이 될 것이다.


이번 새로운 오픈 그래프를 통해, 기업들은 자사가 가지고 있는 페이스북 앱의 초점과 방향성을 확실하게 다잡았을 것입니다. 기존의 앱에서 나오는 액션들은 페이스북 메인의 뉴스피드(feed)에 상태(status)글들과 함께 뒤죽박죽 섞이다보니 오픈그래프로 뿌려주는 어플의 액션 메시지가 그닥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티커(Ticker)'를 통해 개인이 등록하는 상태 글은 뉴스 피드로 뿌려지고, 나머지 행동의 메시지는(친구를 맺거가, 댓글을 달거나, 소셜 게임에서 도전 과제를 달성 하는 등) 모두 오른쪽 화면(web기준)의 티커로 정리됩니다.
 
 

:: 이번에 페이스북은 티커(ticker)를 통해 정보를 잘 정리정돈 했다. ::

 
따라서, 페이스북 앱을 이용할 때 자동으로 뿌려주는 메시지들도 티커를 통해 정리되고 출력 되기 때문에 더이상 소홀히 다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기업들은 티커에 노출될 자사 앱의 메시지 관리가 페이스북 마케팅에 있어서 필수 요소가 될 것이며, 오픈그래프를 잘 활용하여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재밌고 유익한 메시지를 만들어서 입소문을 유도해야 합니다. 앞으로 티커가 입소문의 발원지이자, 새로운 창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페이스북에서 가장 큰 앱 시장 규모를 가지고 있는 소셜 게임을 한 단계 더 진화시켜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의 CEO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는 '이미 페이스북의 소셜게임이 우리가 게임을 하는 방식이나, 산업의 흐름을 변화 시키고 있으며, 새롭게 개선된 오픈 그래프를 통해 다음 단계로 진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 현재 즐기고 있는 게임이나, 달성한 성과에 대한 메시지 외에도, 다양한 액션을 메시지로 구현해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

 
새로운 오픈 그래프가 발표되자마자 미디어 분야에서 가장 발 빠르게 오픈 그래프를 활용하기 시작했는데요, 글을 작성하는 현 시점에서 새로운 오픈 그래프를 활용한 미디어용 페이스북 앱을 몇 개 소개하면 이하와 같습니다.
 
  • 오픈 그래프를 활용한 가디언(Guardian)의 페이스북 앱 <바로가기>
  • 곧 개편 예정인 야후 뉴스 사이트 정보 <바로가기>
  • 오픈 그래프를 활용한 소셜리더(Social Reader)의 페이스북 앱 <바로가기>
 
이제 기업들은 페이스북 페이지 외에도 오픈그래프와 티커를 통해 강력한 마케팅 도구를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더이상 기업용 페이스북 앱이 옵션이 아닌 '필수'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티커 역시 한정된 공간이며, 현재 페이스북 앱이 3만개 이상이라 하니, 티커에 넘쳐나는 메시지의 홍수 속에서 의미 있고 효과적인 바이럴을 유도하기 위해 더욱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 게임 뿐 아니라 마케팅에 도구로서도 한 단계 더 진화한 셈이다. ::

   
   

오픈 그래프로인해 보안과 사생활 보호 이슈가 더욱 쟁점화 될 것이다

  
페이스북의 사생활 노출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페이스북 커넥트가 이슈화 될 무렵부터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작년에 오픈 그래프를 처음 발표 했을 당시에도 오픈 그래프를 활용한 앱을 많이 사용할 수록 24시간 이상 내 정보가 외부로 노출이 됩니다. 이번 업데이트 역시 내 생활 곧곧마다 페이스북에 흔적을 남기게 되고 빠른 속도로 그 정보가 확산될테니
 
엊그제 올라온 가디언의 컬럼 제목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왜 페이스북의 새로운 오픈 그래프가 우리를 웹의 권력 시스템 구축에 일조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사생활 보호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 내용 중에 '수 만개의 앱(app)들은 페이스북에게 현재 우리가 뭐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물어볼 것이다.' 라는 말이 의미 심장하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읽은 가디언지의 컬럼은 페이스북 앱을 통해 티커로 공유 되고 말았네요. =)
 

:: 어쨌든 난 이 컬럼를 읽었고, 이 사실이 티커를 통해 친구들에게 공유 되었다. ::

 
이번 페이스북의 업데이트가 사생활 보호와 보안 문제에 대한 경종을 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국 선택하는 것은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모든 것은 사용자의 동의 하에 이루어지니까요. 다만, 한 단계 더 진화한 오픈 그래프를 통해 보안과 사생활 보호 문제가 더욱 이슈가 될 것은 분명하니, 앞으로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어떤 선을 가지고 페이스북을 이용할 지는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충분히 고민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1. Favicon of http://dayofblog.pe.kr BlogIcon 새우깡소년
    2011.09.29 09:07

    김태현 님,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앞으로 변화될 페이스북 생태계 변화가 기다려집니다.
    오픈그래프, 알면 알수록 즐겁지만 흥미로워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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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9월 22일, 페이스북 개발자 컨퍼런스 F8에서 발표한 신규 프로필 서비스, 타임라인(Timeline)이 큰 이슈를 불러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발표한 업데이트들이 하나 같이 혁신적이고 '진짜 SNS'가 무엇인지 그 저력을 여지 없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타임라인은 10월 1일부터 업데이트 된다고는 하지만, 간단한 앱 설치 과정을 통해 미리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정보 공유 차원에서 정리해봤습니다. 스크린샷 가이드가 필요 없으신 분들을 위해 요약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2011.12.16] 타임라인 정식으로 설치할 수 있게 변경되었습니다. http://www.facebook.com/about/timeline 링크로 가셔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사용 언어 설정을 영어 (English)로 적용
  2. 페이스북 개발자 페이지로 이동 (https://developers.facebook.com/apps)
  3. 신규 앱 생성 버튼 클릭 (+ Create Nw App)
  4. 앱 이름과 네임스페이스 입력 (대충 아무거나 입력하시면 됩니다.)
  5. 앱이 생성되면 왼쪽 메뉴에 오픈그래프 (Open Graph) 클릭
  6. 오픈그래프 설정 시작 페이지에서 액션(동사형태)과 오브젝트(명사형태)의 단어 각각 입력. (편의상 [watch] a [timeline] 으로 입력)
  7. 나머지 오픈그래프 설정 3 단계에서 다음 -> 다음 -> 저장으로 설정 완료
  8. 페이스북 첫화면으로 이동하면 상단에 타임라인 적용 관련 메시지 확인 후 수락 (Get it Now) 클릭
  9. 타임라인이 적용 된 프로필 페이지 확인. 끝.
  
 
스크린샷과 함께 적용 설정법을 보고 싶으시면 이하에 펼치기를 클릭해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프로필 페이지로 이동하시면 타임라인 UI가 적용된 모습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첫눈에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아무래도, 커버 이미지 설정이 아닐까 싶은데요, 프로필 이미지와는 별개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어있습니다. 내 사진첩에서 선택을 하거나, 직접 올려서 커버 이미지를 자유롭게 설정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타임라인의 가장 큰 매력은, 예전 글을 쉽게 찾아서 확인할 수 있는 점입니다. 처음엔 UI가 상당히 어색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굉장히 편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페이지 우측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연도별로, 그리고 월별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가운데 있는 라인(Line)을 통해 디테일하게 과거 글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라인에서 아래로 내려갈 수록 과거 글이고, 라인에 찍혀 있는 점(spot) 좌우측으로 글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한줄 리스트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UI 디자인에 상당히 신경 쓴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방식을 사용하는 서비스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감히 '혁신적이다.'라고 말하고 싶을정도로 너무나 마음에 드는 UI 입니다. =)
 
 
 
타임라인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보니 제가 처음 페이스북을 시작한 2009년 7월의 글이 보이네요.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페이스북을 처음 이용하던 당시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
 
 
 
이번 타임라인 업데이트를 통해 원하는 시기에 내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주 용이해졌습니다. 과거에 갔던 여행 기록을 남기거나 그 당시에 찍은 사진을 날짜에 맞춰서 저장을 하는 등의 기록도 타임라인을 통해 쉽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가운데 타임라인 상에 마우스 커서를 가져다 올리면 라인상에 + 버튼이 오버레이 되면서 해당 시기의 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를 클릭하면 년, 월까지 기본으로 지정되어 글 작성시에 날짜 설정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태(status) 기록도 아주 다양해졌습니다. 단순히 글을 작성하는 것 뿐 아니라, 직장 상태나, 연애, 주거, 건강, 여행, 어학 공부 등 디테일하게 카테고리별로 액션들을 설정해서 기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향후 세밀한 분류(sort)가 가능하기 때문에 내가 작성한 status의 구분 및 검색이 용이한 장점이 있습니다.
 
 

더욱 강력해진 기능과 서비스, 걱정되는 부분은...?

 
지금까지 타임라인 적용법과 변경 내용들을 가볍게 살펴봤습니다. 사실 제가 후반부에 소개한 타임라인 기능은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이외에도 다양한 기능들이 있습니다. 이정도만 보더라도 감탄을 넘어서 무서워지기 까지 하네요. 페이스북은 이제 우리의 삶을 본격적으로, 그리고 아주 세밀하게 수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보안 기능도 강화되고, 친구 그룹에 따라 노출하는 정도도 다양하게 설정 할 수 있게 되었지만(직장 동료들에게는 Public 글만 보이게 하는 등) 도구가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여전히 SNS에서는 내 사생활 노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결국 선택은 이용자가 하겠지만요. =)
 
페이스북이 그랬듯, 이번 업데이트를 통해 경쟁하는 트위터와 구글+에게 좋은 자극을 줄 것 같습니다. 이런 경쟁을 통해 향후 SNS가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더 진화할 지 기대됩니다.
 
이번 업데이트들은 10월 1일부터 미국부터 순차적으로 적용된다고 합니다. 글을 작성하는 지금 시점에서 1주일 이상 기간이 남았는데, 타임라인을 미리 경험하고 싶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 Favicon of http://blog.jidolstar.com BlogIcon 지돌스타
    2011.09.26 17:13

    매우 잘보고 갑니다. 덕분에 쉽게 따라해볼 수 있었습니다.

  2. 윤슬아
    2012.02.13 15:12

    질문이 있습니당!! 제 계정으로 로그인하면 http://www.facebook.com/about/timeline 이 링크 하단에 타임라인 신청 혹은 적용 버튼이 아예 안떠요... 언니의 계정으로 로그인하여 저 링크에 들어가보니 뜨더군요!! 컴퓨터의 문제는 아닌 듯 하고... 계정에 타임라인 적용이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이 있는것 같은데 이유가 뭔줄 아시나요ㅠㅠㅠㅠㅠㅠㅠ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2.02.14 11:08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사용하시는 웹브라우저의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버전을 체크하는 것 같더군요. 혹시 인터넷 익스플로러 6 또는 7 버전을 사용하신다면 8버전 이상으로 업데이트 해주셔야 합니다. 그밖에 파이어폭스나 크롬, 사파리 등의 다른 웹브라우저를 이용하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

  3. 쿠쿠
    2012.04.30 11:28

    앱 디스플레이 이름 설정하고 넘기면 빨간 박스와 함께 다시이름쓰는게 나오네요.. 그거 무한반복하고 있어요 ㅠㅠ
    머가 문제인지 도통.... 구글 크롬에서 하고있고 페북 만든지 이제 1일 차라 ...
    혹시 도와 주실수 있으신지요???

  4. 쿠쿠
    2012.05.11 18:56

    알려주신 링크로 가니 하단에 앱이랑 커버 소식은 뜨는데 타임라인 사용 은 없네여,, 익스8 크롬 다헤봣는데도 그러네요..
    ㅠㅠ 걍 기달리는게 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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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UNG FILMS & 오돌또기 & LOTTE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2005년 당시, 명필름이 국내 동화 베스트셀러로 유명한 '마당을 나온 암탉'을 애니메이션 영화화 하겠다고 발표했을 땐 주변에서는 기대보다 우려가 많았습니다. 워낙에 업계 형편이 열악한 이유도 있지만, 당시엔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원더풀데이즈, 오세암 등이 빈약한 시나리오와 더불어 흥행에 실패하면서 국내 애니메이션 부흥에 대한 의지가 꺾여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 전문 제작사 오돌또기와 공동제작으로 의기투합하면서 약 6여년간의 제작기간을 거쳐 올 2011년에 와서야 드디어 첫 선을 보이게 됩니다. 사실 이 작품은 제작비 부분에서 눈물겨운 탄생을. 경기도콘텐츠디지털진흥원과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공모전을 통한 초기 제작비를 겨우 마련했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배급사를 찾는 과정에서 롯데엔터테인먼트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더 오랜 기간이 걸렸을지 모를 일입니다.
  
다음 주 개봉(2011년 7월 28일)에 앞서 지난 월요일 저녁에 위드블로그 캠페인에 선정되어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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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국내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실겁니다. 기술력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와 '연출'이죠. 100만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다는 점에서 시나리오 문제는 어느정도 보장받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애니메이션화 하는 단계에서 관객 연령층 타깃을 잡기가 난해하다는 점입니다.
  
문자로 된 원작이 워낙에 사색적인데다 꿈을 향한 도전, 삶과 죽음의 문제, 자연의 섭리 등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겨있다보니 전체관람가를 목표로 하기엔 아동들에게 어렵고 지루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위험도가 높습니다. 결국 원작에는 없지만 애니메이션만을 위한 내러티브 요소들을 갖추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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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진지한데다 느끼한 캐릭터로 매력을 발산하는 천둥오리 '나그네(최민식분)'가 성인들에게 웃음코드를 유발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놈의 앞머리는 어찌나 시도 때도 없이 느끼하게 휘날리는건지...ㅋ) 연기한 본인의 말처럼 애착이 갈만합니다. 또한 즐거움과 웃음을 주는 조연격의 수달 캐릭터 달수(박철민분)는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유쾌하고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박철민의 전매특허인 구수한 입담이 캐릭터에 그대로 담겨서 러닝타임 내내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분명히 원작에 없는 개그 캐릭터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지만 다소 섞여 있는 비속어가 개인적으로 거슬리기도 했습니다.
  
겨울이 되자 천둥오리들이 늪으로 돌아올 때 펼쳐지는 군무와 영상미는 압도적이었습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기술력은 역시나 뛰어나더군요. =) 그 기술력은 천둥오리 무리의 파수꾼을 뽑는 10여분 가량의 레이싱 경주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박진감이 넘치고 몰입도가 굉장합니다. 제작진이 이 부분에 얼마나 열정을 쏟아부었는지 짐작할 법하죠. 특히 레이싱 후반부에 빨간머리와의 마지막 스퍼트 부분의 연출이 굉장히 인상깊었습니다. (게다가 유쾌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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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요소들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원작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해주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상대적으로 짧은 90분 러닝타임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빠른 진행 만큼 감정 노선이 급전개 되는데다, 파수꾼 레이싱이 끝나고 나서 마무리는 허무하게까지 느껴졌습니다. 말미의 약육강식, 자연의 섭리를 표현하고자 했던 원작의 메시지가 잘 와닿지 않더군요.

시사회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부모와 아이들의 대화들 가운데 '달수' 캐릭터의 이야기였던 것을 보면, 원작을 그대로 살리는게 좋았을지 재미 요소를 위해 각색되는 과정이 필요했는지에 대한 판단 여부는 앞으로 이 애니메이션을 논할 때 두고두고 화자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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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주된 관심거리였던 '성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기로 했습니다. 전문 성우를 쓰는 것과 유명 배우를 기용하는 것 사이에는 흥행 보장수표와 시장의 규모와도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구요. 이런 와중에도 '마당을 나온 암탉'이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서 감정이입된 연기자의 목소리와 영상을 맞추기 위해 2중 녹음 방식을 택한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앞으로 이런 선례가 잘 정착되길 바랍니다.
  
이런저런 어줍잖은 잔소리가 많았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은 최근에 본 국내 애니매이션중에서 완성도가 높은 작품 이었습니다. 원작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옳았을 지, 아니면 제작진의 각색과 유머러스한 내러티브 요소의 삽입이 적절한 판단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 지 모르나 하나의 작품으로 놓고 볼 땐 충분히 임팩트가 있습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앞으로 더 좋은 작품들이 나올 기대감을 가지게 된것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척박한 환경에서 6년간 열정을 쏟아낸 제작진에 갈채를 보내며, 영화의 흥행을 기원합니다.
  
 
2011.08.19 Update - 마당을 나온 암탉이 150만 관객을 돌파, 손익분기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계속해서 한국애니메이션에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길 바랍니다. =)
 
   

  
  1. Favicon of http://wiinemo.tistory.com BlogIcon 위네모
    2011.07.14 08:16

    한국 애니메이션은 이전 부터 실망한 감이 많았는데
    (천년여우 여우비나 그외 기타 등...)
    이번 마당을 나온 암탉은 뭔가 조금 다른 시도가 보이는 것 같네요.
    한번 기회되면 봐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좋은 소개 감사드립니다!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07.14 09:54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원작에 대한 기대감이 커서 그렇지 확실히 재미있습니다.
      전연령층을 목표로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더군요.

      퀄리티가 극장판보다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이 애니메이션이 느긋한 분량의 TV-Series로 나올 수 있는 환경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늘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2. Favicon of http://blog.leestory.com BlogIcon 리스토리
    2011.07.14 09:52

    기대되는 한국애니메이션입니다.
    저도 꼭 한번 보고 싶네요.
    내용 잘 보고 갑니다^^

  3. 레레
    2011.07.14 13:22

    중학생때 이 소설을 읽고 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좋아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솔직히 별로인거 같아요.
    원작은 아동도서이지만 죽음에 대해 잘 다뤘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는 내용을 멋대로 각색해서 그런 느낌들이 다 사라졌어요ㅠ
    제목만 같고 다른내용인거 같은 ㅠ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도 참;; 원작의 캐릭터와는 너무 다른 캐스팅이라 포스터만 보고 실망했습니다.

    유아용으론 딱인듯 싶네요. 그림도 아기자기하고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07.14 13:29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말씀하신 부분 크게 공감합니다. 원작의 메시지들과 다 읽고 난 뒤에 남는 여운이 영화에서는 잘 살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점이 가장 아쉽군요...

      아무래도 전연령층을 대상으로 해야 하다보니 유머러스한 요소를 빼먹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

  4. 신군
    2011.07.14 18:30

    나그네 성우분은 최민식님으로 알고있습니다. 최민수로 소개되어있네요. ^^;

  5. 마이즈
    2011.07.15 14:42

    빨리 개봉했으면 좋겠어요! >_<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07.15 16:20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여러모로 많은 것을 생각해주는 애니메이션이었어요.
      마이즈님이 보고 오시면 더 좋은 감상평이 나올 것 같습니다. =)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6. Favicon of http://nnkent11.tistory.com BlogIcon NNK
    2011.07.18 09:09

    너무 재미나보입니다 ㅎㅎ
    저도 애니메이션 영화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
    우연히 들르게 되었는데 앞으로 좋은 인연 되었으면해요~ ㅎㅎ

  7. Favicon of http://nnkent11.tistory.com BlogIcon NNK
    2011.07.18 19:17

    오늘도 잠시 들렀다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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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가볼 기회가 없는 프랑스 레스토랑에 다녀왔습니다. 말로만 듣던 푸와그라는 처음 한 입만 부드럽게 넘어갔지만 듣던대로 느끼하고 역해서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고, 랍스타와 성게알이 가미된 리조또는 중간중간 비릿맛이 강했습니다. 치맛살 부위로 만든 스테이크는 씹는 질감이 좋더군요. =)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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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6월 말입니다. 이제 약 한 달 뒤면 여름 방학이 다가올텐데요. 올 여름은 게임 업계에서 여느 때와는 다른 시기를 보낼 것 같습니다. 이르면 10월 부터 시작될 '셧다운' 제도 때문이죠. 정책이 바뀌면서 이를 준비하는 기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셧다운 제도가 시행 되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아이들의 게임 과몰입과 중독 문제는 전혀 진전을 보이지 못할 겁니다. 부모의 관심과 이해가 변화지 않는 한은...
 
오늘도 아이들의 '게임 시간'을 놓고 팽팽하게 대립하며 고군분투하고 계실 부모님들께 한 편의 글을 소개할까 합니다.
 
 
 
 
과거에도 밝힌 바 있지만, 저는 기독교인이고 교회에서 유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계에서도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부정적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특히 예배 콘텐츠로 수천 교회를 섬기며 국내 어린이 선교에 앞장서고 있는 팻머스문화선교회의 대표로부터 이런 시각의 컬럼이 올라왔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선량욱 대표의 생각과 입장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이제 셧다운의 위헌 여부에 대해서는 법률 전문가와 관련 업종에 종사하시는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셧다운제가 근본적으로 부모와 자녀 간의 세대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양극화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할 것입니다.
  

:: 세대간 의사소통에 차이를 겪는 건 이미 옛날 이야기. ::


세대가 다르다 = 개념 자체가 다르다.

 
오늘날 초중고 학생들을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라고 부릅니다. 또는 N세대라고도 하죠.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와 그 문화에 익숙하다보니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접해있는 우리 디지털 이민자(Digital Immigrants) 세대와는 감성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아예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스마트폰으로만 놓고 봐도 전화통화에보다는 문자 메시지에 익숙하고, 전자기기로 한번에 여러 가지를 다양하게 수행하는 멀티태스킹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 났습니다. 그래서 기성세대들이 봤을 때 '4차원 우주인'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우리 아이들 세대는 기술친화적이고 물리적인 것보다 가상 공간과 메시징에 더욱 익숙합니다. 방구석에 있더라도 그들은 끊임없이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을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물론, 온라인 게임에서까지 말이죠. Ofer Zur 와 Azzia Zur 박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 아이들 세대와 어른 세대는 약 30가지 정도로 가치관의 차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항목들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들이 물리적인 환경보다 네트워크 환경을 통해 소통 하는데 익숙하고 이를 통해 사회성을 기른다고 주장합니다. 그 도구에는 (페이스북, 트위터, 인터넷 뿐 아니라) 온라인 게임도 포함되어 있으며, 어떤 온라인 게임에는 전 세계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접속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게임이 친구들과 할 수 있는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니! 기성 세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것이 바로 오늘날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들의 현실입니다. 결코 그들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20세기 말부터 있던 '세대 차이'는 대도시화와 햇가족화에 따른 생각과 가치관의 차이 정도로 인식해 왔지만 오늘 날 디지털 시대의 세대 차이는 아예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새로운 '세계'로 접어든 것입니다. 위에 소개한 컬럼 서두에서 예화로 밝히는 아버지의 '게임 한 판'과 아이들의 '게임 한 판'이 체감하는 시간이 다른 것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21세기형 세대 차이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게임의 룰 = 게임이 다음 세대 문화임을 인정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

  
(종교 이야기를 해서 거부감이 드실 분이 계실지는 몰라도) 기독교에는 '선교적 마인드'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선교지에 가면 가장 먼저 그 나라의 말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그 곳 사람들에게 친숙한 환경으로 진짜 선교를 할 수 있다는 뜻이죠.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우리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셧다운제가 이제 올해 안으로 적용 되겠지만 부모의 관심과 태도가 이전과 다를 것이 없다면 아무런 효과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게임 과몰입과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건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과 의무'입니다. 비록 바쁘고 힘드시더라도, 그리고 초반엔 아이들에게 무시당할지라도(분명히 아이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킬겁니다) 아이들과 함께 게임을 즐겨 보려고 노력을 한다거나, 그것 조차 힘들다면 적어도 우리 아이가 즐기는 게임이 어떤 게임인 지 알고 연령대에 맞는 건전한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조절해주는 최소한의 관심을 가져주셔야 합니다.
 
부모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분위기 또한 잘못된 것이지만 아예 개념 자체가 다른 세대의 놀이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관심의 부재 역시 오늘날 게임이 사회적 문제로 커져버린 데 일조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게임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만 하도록 방치해두면 안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우리 아이들 세대가 게임을 통해 향유하고 공유하는 문화를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로 접근하신다면 분명히 우리 아이들의 게임 습관과 환경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게임을 못하게 막지는 말아주세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오늘날 아이들에게 게임만큼 큰 놀이문화는 없습니다. 부모님은 지금까지 '적대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게임을 바르고 유익하게 즐길 수 있도록 '관찰자'와 '조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아이들의 관심을 게임보다 더 즐겁고 유익한 것으로 다양하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셔야 합니다. 가장 큰 놀이문화이지만 그렇다고 게임이 놀이 문화의 전부는 아닙니다. 부모님과 함께 향유 할 수 있는 놀이문화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날로그 감성과 경험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이제 부모님 세대 밖에 없습니다.
  
무엇이든 한 번에 이루어지는 건 없습니다. 이는 지난 번 포스트에서도 밝혔지만 사회와 업계, 그리고 가정이 협력해서 잘 굴러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가정에서 우리 아이가 즐기는 게임에 대한 부모의 관심과 참여로부터 시작됨이 분명할 겁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게임을 즐기고 있나요? 그렇다면 '메이플 스토리'나 '카트 라이더'가 어떤 형태로 즐기는 게임인지 아시나요? 혹시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셨다면 아이에게 관심이 있는건지 한 번 반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한 번 게임을 즐기고 있는 우리 아이 옆자리로 가셔서 관심을 가져 보시는 건 어떨까요? PC게임이든 닌텐도이든 다 상관 없습니다. =)
 
 

:: 관심을 가지라, 그리고 함께 즐기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아이들은 중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


  1. Favicon of http://wiinemo.tistory.com BlogIcon 위네모
    2011.06.29 19:49

    쓰인 글 쭉 읽어보니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네요
    부모의 입장으로서는 꼭 참고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06.29 20:56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위네모님, 건강하시죠? 요즘 개인적으로 분주한 일상을 보내느라 블로그가 뜸해서 제대로 방문하지도 못했네요...orz

      공감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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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기념으로 김태현 어린이에게 사준 선물.
매물이 없어서 친구를 통해 16GB WiFi버전으로 겨우 구입. =)

Nikon D90 // AF Zoom-Nikkor 24-85mm f2.8-4D 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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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유의 문화 공연을 자주 여는 정동극장은 한국인보다 외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특별히 제가 관람하고 온 '미소(Miso) 춘향연가'는 지난 14년간 한국에서 가장 익숙한 사랑이야기 성춘향전을 '한국식 뮤지컬'을 표방하는 공연입니다. 작년부터 정동극장을 전용관으로 선택해서 매일 2회 공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색과 음을 현대적으로 풀어서 외국인에게도 거부감 없이 한국의 미를 알리는 취지가 공연 내에 한가득 담겨져 있었습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해서인지 대사가 거의 없지만 그만큼 연기자들의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가 살아있습니다. 춘향전을 모르더라도 충분히 사랑 이야기와 유희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2011 MYUNGDONG · CHONGDONG THEATER All Right Reserved.

미소-춘향연가에서 가장 눈여겨 볼 부분은 바로 악역 캐릭터 '변학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탐관오리의 대명사이자 늘 탐욕스럽고 흉악한 모습으로만 비춰지던 변학도는 미소에서 카리스마 있고 매혹적인 캐릭터로 탈바꿈합니다. 춘향은 몽룡을 떠나보내고 수청을 요구하던 변학도의 유혹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던 점이 신선했는데요, 고전에서 과감하게 거절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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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의 딸로 태어나 몽룡을 위해 수절해야만 했던 삶의 모순이 더욱 춘향을 갈등하게 했던 것일까요? 이런 뒷배경을 외국인들이 쉽게 알 수 없겠지만, 저는 물론 춘향전을 알고 있던 관객이라면 카리스마 있는 변학도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갈등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역시 사람은 외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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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춘향연가는 미(美)-소(笑)-애(愛)의 3가지 요소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즐거움, 그리고 사랑을 담았다는 뜻이죠. 아름다움에서 우리 고유의 소리와 색을 이야기 속에 잘 담아 표현하는 모습이 일품이었습니다. 춘향과 이몽룡, 변학도의 3그룹이 서로 대치하며 난타와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춘향의 무리는 오고무를, 이몽룡과 변학도 무리가 대치하며 북을 치는 모습은 굉장히 박력있고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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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이 국가의 부음을 받아 춘향과 이별해야 하는 모습은 애환이 넘치는 이별가를 주제곡을 시작으로 대금, 아쟁, 가야금, 해금, 피리의 관현악 4중주로 이 둘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관현악 4중주를 할 때 슬라이드 상영을 해주는데 가사와 함께 노래도 다시 한 번 더 불러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몽룡이 거지 꼴로 변장해서 암행어사 시찰을 다니다 옥중의 춘향을 만날 떄의 애절함이 가장 포인트 같은데 이별씬에 비해 이 부분이 부각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 2011 MYUNGDONG · CHONGDONG THEATER All Right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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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주는 희극 요소도 빠지지 않습니다. 특히 냇가에서 목욕하는 장면이나 첫날밤에 몰래 훔쳐 보는 우리 옛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요 냇가에서 마치 한국식 발레단을 보는 듯한 연출이 기억에 남습니다. 첫날밤에 문지방으로 몰래 지켜보는 모습도 많은 배우들이 제각각 문짝을 들고 숨어서 둘러싸는 것으로 공간적인 제약을 극복했습니다. 이런 장면들에서 연출가의 센스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방의 재치와 함께 영화 Mission Impossible을 중간에 우리 악기로 효과음을 넣어주는 장면은 관객들을 웃음바다로 만들어주기도 했는데요 전혀 예상치 못하던 부분이라 허를 찔린 기분이었습니다. 방자와 향단의 위트도 눈여겨 볼 부분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어울러진 소(笑)는 합격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
  
  

ⓒ 2011 MYUNGDONG · CHONGDONG THEATER All Right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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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미소 공연은 무대 장치를 잘 활용하는데요, 가장 뒷편에 2층에서 MR을 틀어주는 것 말고도 직접 가야금과 대금으로 연주하는 부분도 View Point 중에 하나 같습니다. 음악쪽으로 관심이 많다보니 그런쪽에 눈이 자동적으로 가더군요. =)
  
이야기가 끝으로 다다를수록 기악과 색은 더욱 화려해지며 갈등이 고조됩니다. 짧은 시간에 우리의 색을 압축시켜 보여주려 하다보니 다소 현란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 아쉽군요. 또한 극적인 '암행어사 출두' 사건은 너무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감도 있었는데요, 변학도가 카리스마를 보여준 것에 비해 결말이 너무 허무해보여서 관객들이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도 한 번 고민해봐야 할 부분 같습니다.
  
  

ⓒ 2011 MYUNGDONG · CHONGDONG THEATER All Right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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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대미는 화려한 풍물놀이로 마무리 짓습니다. 사실 마지막 춘향과 몽룡의 혼인잔치 끝에 뜬금없이 풍물이 나오다보니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긴 하지만 관객들의 흥을 돋우고 작게나마 참여를 통해 웃음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실제로 관객 두 명을 참여시켜서 대결하는 모습도 기억에 남고 마지막에 무대 밖으로 나가서 관객들과 호흡하고 포토타임을 갖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시나 외국인 관광객들이 아주 좋아하더군요. =)
  
미소-춘향연가는 우리의 고유의 미를 현대적인 감성으로 풀어낸 멋진 공연입니다. 앞으로 이런 공연들이 많이 나와서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길 바라봅니다.
  
 
(상기 사진들은 미소 홈페이지의 사진을 인용했습니다.)
 
 

::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까지 풍물놀이가 이어졌다. ::

 
 
  1. Favicon of http://wiinemo.tistory.com BlogIcon 위네모
    2011.04.27 09:34

    어릴적에 교과서에나 봤을법한 춘향뎐..
    문학으로 접하는 것과 다른, 색다른 문화 체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 )

  2. Favicon of http://shnlucky.tistory.com BlogIcon shinlucky
    2011.04.28 15:42

    전 이상하게 변학도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더군요.!
    음악소리가 흥겹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귀가 아프기도 했네요 ㅎㅎ
    하지만 전체적으로 즐거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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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9가지 전자 제품 중에 하나로 아케이드 버전 퐁(PONG)의 프로토타입 모델을 꼽았다. 사실 그는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아타리에서 잠깐 일하면서 불후의 명작 벽돌깨기(Breakout) 게임을 완성시킨 장본인이었다. (사진 출처 - Gizmodo) ::

  
  
단골손님 한 명이 스크린 안에 공이 진공 상태에 있는 듯한 모습의 PONG(퐁) 게임기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한 친구가 그에게 플레이를 권하자 그 둘은 기계앞에 섰다. 설명서에는 '높은 점수를 얻으려면 공을 놓치지 마세요.'라는 안내가 적혀있었다. 동전을 넣고 기계에서 경적이 울리며 게임이 시작 되자 그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스크린에 있는 공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만 숨죽여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스크린 상단의 스코어가 변했다. 3-3. 첫 번째 플레이어는 손잡이를 돌려보기로 한다. 화면 안의 페들이 스크린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스코어는 5-4. 그의 의도 대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스크린 끝으로 공을 튕기며 나는 PONG의 효과음이 바 안에 울려퍼지며 아름다운 잔향을 남기고 있었다. 점수차는 6-4로 조금 벌어지고 8-4의 더블스코어가 되자 그제서야 두 번째 플레이어는 어떻게 게임을 해야하는지 겨우 눈치챈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게임은 끝나가고 있었으니, 그들의 첫번째 대전은 11-5로 종료되었다.
 
 
  
이미 7 쿼터가 지났지만, 그들은 지치는 기색 없이 게임을 이어갔다. 가게 안에 계속해서 울려퍼지는 PONG의 효과음이 가게의 다른 손님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킬 만큼 매력적이었다. PONG이 가게에 들어온 첫 날, 영업시간이 종료될 때까지 가게 안의 모든 손님들이 게임을 즐겼다. 다음날 아침 10시. 많은 손님들이 PONG을 하기 위해 Andy Capps앞에 줄지어 모여들었다. 영업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흘러 밤10시가 되자 불현듯 기계 멈춰버렸다. 동전이 통 안에 꽉 차서 작동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한 것. 동전통을 비우고 나서야 다시 기계가 돌아갔다.
 
Scott Cohen이 쓴 아타리의 역사에 관한 책, 'Zap: The Rise and Fall of Atari'를 살펴보면 1972년 PONG(퐁)을 처음만난 미국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위 글은 미국의 Andy Capp's Cavern 이라는 핀볼바(Bar)에서 PONG의 프로토타입이 최초로 설치되었을 때의 내용을 일부 발췌했습니다. 프로토타입을 통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아타리는 2개의 검은색 손잡이 다이얼이 달린 노란색 캐비넷 모양의 PONG을 미국 전역에 출시했고 전국적으로 엄청난 신드롬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시 핀볼게임기계의 경우 1주일에 $40 이상의 수익을 올리면 많이 번다고 할 수 있었는데 PONG은 1주일에 $200 이상을 벌게 해주면서 너도 나도 PONG을 구입해서 영업소에 들여놓기 시작합니다.
  

:: PONG의 프로토타입 모델 ::

PONG이 출시된 후 펼쳐진 미국 거리의 풍경은 오늘날 '신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PONG이 설치된 가게, 주점, 음식점들마다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동전통이 금방 차버려서 하루에도 여러번 동전통을 비워줘야 했으며, 아타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기계가 고장난 줄로 착각한 업주들들로부터 하루에도 수차례 항의 전화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하루에도 매일같이 은행에 수많은 동전을 들고 찾아가는 업주들 때문에 은행이 동전을 교환하느라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집니다. 다소 과장이 섞여 있을지 모르지만 PONG의 인기는 그만큼 대단했습니다.
  
  

:: PONG을 만든 앨런 알콘(Al Alcorn)과 여러 버전의 기판들 ::

PONG의 개발을 전담한 앨런 알콘은 7400버전의 TTL IC(직접회로)들을 이용해 기판을 만들었는데요, 그는 칩 하나 당 평균 25~50센트에 이르는 다양한 가격의 IC를 75개 가량 조합해서 기판을 완성합니다. 그는 기판의 오작동률을 1~2%로 떨어질 때까지 고장률을 낮추고, 놀란 부쉬넬이 컴퓨터 스페이스를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제작 단가를 낮추는데 집중했습니다.
  
PONG의 개발 비화 중에 가장 재밌는 부분은 바로 '효과음' 입니다. 비디오게임에서 음향 및 사운드가 주는 중요한 위치를 처음으로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됩니다.(마그나복스 오디세이는 효과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PONG을 즐기면서 페들이 공을 튕겼을 때 나는 효과음에 가장 먼저 매료되었는데, 놀란 부쉬넬이 앨런 알콘에게 이 부분에 주변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하면서 진짜 공을 치는 듯한 좋아지는 효과음을 특별히 주문하게 됩니다. 일설에 또 다른 창업자인 테드 데브니(Ted Dabney)는 '피우~[Boo]'나 '쉿[Hiss]' 소리 느낌이 나는 효과음을 넣고 싶었다고 합니다. =)
  
하지만 앨런이 훗날 고백하기를 놀란 부쉬넬이 사운드 효과를 요구할 시점에 이미 예산을 초과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또 부품을 구입해 추가할 수 없었떤 그는 어쩔 수 없이 완성된 기판을 다시 분해해서 사운드톤을 가지고 있는 회로를 찾아 되집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PONG 비디오게임 산업 최초로 아타리와 마그나복스의 법정공방이 이루어졌다. ::

게임 산업 최초의 법정 공방

 
한편, PONG이 출시된 지 2주 후, 마그나복스는 PONG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고 자사가 만든 컨트롤러와 게임 형태에 대한 특허 사용권을 지불하지 않고 출시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974년에는 아타리와 마그나복스와가 특허권을 놓고 법정공방이 펼쳐졌습니다. 콘솔 게임업계 최초의 지적재산권 분쟁이었습니다. 마그나복스의 변호사가 1972년 5월에 켈리포니아 버링게임에서 열린 오디세이 시연회에 놀란 부쉬넬이 Ping-pong 게임을 시연한 것을 목격한 증인을 찾아내면서 마그나복스가 승소하게 되었고, 아타리는 $700,000의 벌금을 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PONG 시리즈의 생산이 모두 끝난 1977년의 일이었고, 그들이 PONG으로 닦은 기반과 성공에 비하면 약소한 수준이었습니다.
  
PONG은 출시 후 1973년 3월까지 8,000~10,000대 가량의 아케이드 기계 판매량을 달성하면서 크게 성공합니다. 아타리는 PONG 기계마다 시리얼번호를 적용했는데 최초 ZZ-001 부터 ZZ-999까지, 다음은 AA-001 부터 AA-999, 그다음은 YY → BB 순으로 1000개 단위로 생산해서 판매량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약 38,000대에 이르는  PONG 시리즈 기계들을 생산했다 하니, 콘솔도 아닌 아케이드 기기로서는 얼마나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ONG은 출시 뒤에도 많은 후속작들이 등장했는데요, 같은 해에 4명이서 즐기는 PONG DOUBLES 을 비롯해서 QUADRA PONG, PIN PONG, DOCTOR PONG 등을 출시했습니다. 하지만, 오디세이와 마찬가지로 폭발적인 인기만큼 수 많은 불법 복제품이 양산되면서 골머리를 썩히기도 했습니다.
  
아케이드용 PONG의 성공에 힘입어 1975년, 시어스(Sears)와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퐁(Pong)의 15만대 판매 독점 계약을 맺어 출시합니다. 전량 매진 되면서 아케이드 시장에서와 같은 큰 인기[각주:1]를 누리게 되면서 마그나복스와의 전면전이 시작됩니다. 이제 '1세대 비디오게임'이라는 새로운 산업의 경쟁구도가 완성됩니다.
  
  
  
  
  
  

  
  
  
참고 문헌

Zap: The Rise and Fall of AtarI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http://www.pong-story.com/arcade.htm
http://www.ieeeghn.org/wiki/index.php/First-Hand:The_Development_of_Pong:_Early_Days_of_Atari_and_the_Video_Game_Industry#Atari_enters_the_home_computer_market
http://www.pong-story.com/atpong1.htm
http://www.gizmodo.com.au/2010/12/steve-wozniak%E2%80%99s-9-favourite-gadgets/
  
  


  1. 당시 퐁을 즐기던 가정집에서는 텔레비전의 형광체가 타서 자국이 남거나 패들이 마모되어 교체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곤 했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madmaiz.blog.me BlogIcon 마이즈
    2011.04.11 09:39

    저희 집에도 TV에 연결하는 가정용 버젼 Pong이 있었지요 >_<

  2. Favicon of http://lineni.com BlogIcon 리넨
    2011.04.11 09:55

    우와~ 퐁이다. 굉장히 유명한데 전 해본적은 없네요 -3-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1.04.11 11:07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사실, 연배가 높은 분들이 아니면 오리지널을 직접 플레이해보긴 어렵죠.

      저도 닌텐도 세대라 직접 만져보지 못했는데 한 번 해보고 싶네요.ㅋ

  3. Favicon of http://wiinemo.tistory.com BlogIcon WiiNemo
    2011.04.11 22:14

    오리지널 퐁의 등장이군요!
    저도 오리지널은 해본적이 없어서 좀 아쉽네요 ~

  4. Favicon of http://osten.co.kr BlogIcon osten
    2011.04.16 14:06

    드디어 퐁이군요.
    스페이스워는 여러가지 변종들을 찾아서 할 정도로 좋아했는데; 정작 전 퐁은 별로 재미는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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