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코이 군페이를 이야기 하지 않고 닌텐도의 역사를 논할 수 있을까? 그는 게임&와치부터 게임보이에 이르기까지 여러 게임기를 탄생시킨 디자이너이자 '요코이즘'으로 불리는 닌텐도의 DNA를 형성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진은 그의 평전.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울트라 핸드 (Ultra Hand)

전기 공학도생이던 요코이 군페이(横井軍平)는 1965년 닌텐도에 입사합니다. 입사 당시 그의 나이 24세, 닌텐도에서의 첫 업무는 기계 설비의 보수점검이었습니다. 평소 손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자기만의 장난감을 만들어서 만지작 거리는 취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야마우치 회장의 눈에 든 것도 그의 손재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업무 중에 장난감을 만지작 거리다 야마우치 회장에게 들키게 됩니다. 충분히 면책을 예상했겠지만 야마우치는 오히려 그의 비범한 손재주를 높이 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만든 장난감은 막대들을 격자로 이어 이음새 부분에 볼트로 조이고 끝 부분에 손잡이와 집게를 달아서 멀리 있는 것도 늘려서 집을 수 있는 재미난 도구였습니다. 야마우치는 회장은 시장성을 예견하고 바로 상품화를 지시하게 됩니다. 이 장난감은 1966년에 울트라 핸드(Ultra Hand)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고 폭풍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개당 800엔의 상대적인 고가품이었지만, 대중매체 광고가 나가면서 그해 크리스마스-연말 시즌까지 120만개의 판매량를 달성합니다. '오락(Entertainment)'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완구 업체로서 성공적인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 일본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울트라 핸드는 큰 인기를 얻는다. 사진은 잡지 광고와 제품 패키지 ::

닌텐도의 신 성장 동력원 '연구개발부'

울트라 핸드의 성공에 힘입어 야마우치 회장은 닌텐도에 연구개발부를 꾸려서 새로운 완구 사업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당시 총무부장이던 이마니시 히로시를 새 사업부의 수장으로 임명하고 요코이 군페이를 중축으로 장난감 개발을 시작합니다. 이 드림팀 사업부는 기대만큼 많은 히트 제품들을 만듭니다. 울트라 핸드가 출시된 이듬해인 1967년에는 울트라 머신(Ultra Machine)으로 실내 야구장을 가정용으로 옮겨서 어린이들이 집에서도 안전하게 배팅 놀이를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도에 출시된 울트라 시리즈의 세 번째 제품 울트라 스코프(Ultra Scope)는 1.2Kg에 이르는 무거운 무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아이들이 자기 키보다 높은 찬장 위나 골목의 담장 위를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 울트라 머신(Ultra Machine) ::


:: 울트라 스코프(Ultra Scope) ::

:: 닌텐도는 울트라 머신 (왼쪽)과 울트라 스코프로의 연이은 히트로 완벽하게 완구업체로 자리매김 한다. ::

닌텐도와 광선총 신드롬

울트라 시리즈를 선두로 러브 테스터(Love Tester)텐빌리온(Ten Billion)과 같은 장난감들을 연이어 출시하면서 완구회사로 발돋움한 닌텐도는 우에무라 마사유키(上村雅之)라는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면서 절정에 다다릅니다. 우에무라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쓰레기장에서 모은 부품을 뛰어난 손재주로 장난감을 만들어 놀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독학으로 산업대학에 들어가 전자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졸업 후 태양전지에 사용되는 감광 반도체를 제조하는 샤프(Sharp)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태양전지 영업을 위해 닌텐도 연구개발부를 찾아서 장난감에 전지를 사용할 것을 권합니다.

우에무라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재능을 알아본 요코이 군페이는 함께 닌텐도에서 장난감을 만들어보자고 입사를 권유하게 됩니다. 어릴적부터 장난감을 좋아했던 그는 닌텐도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여 입사했고 태양전지를 이용한 새로운 장난감 개발에 착수합니다.

:: 우에무라 마사유키(사진 왼쪽)는 닌텐도 엔지니어로 입사 후 광선총으로 히트시키고 훗날 패미콤(NES)을 만들게 된다. 사진은 닌텐도의 마리오 25주년 '이와타 사장이 묻는다' 인터뷰 장면 ::

그가 개발한 광선총(光線銃)은 울트라 핸드에 이어 완구회사 닌텐도의 상징이 된 제품입니다. 적외선 레이저를 발사하는 장난감 총에 과녁이나 표적이 되는 센서에 맞추면 총에 맞는듯한 굉음과 함께 시각적인 효과가 표현되었습니다. 광선총은 일반 총부터 라이플까지 그리고 스코어 과녁과 건맨(Gun Man), 사자(Lion)등의 표적 과녁 등 다양한 패키지로 출시되었고 2,000~4,000엔에 이르는 고가 제품이었지만 1970년대 초반에 100만대 이상 판매한 닌텐도의 대박 상품이 되었습니다.

광선총의 성공으로 닌텐도는 경영 실적도 상승하면서 그당시 오사카 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되었고 주가도 급등하게 됩니다. 하지만 광선총이 일본 전역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코이 군페이는 그 당시 일본에서 스키트 사격장 붐이 일어나던 것을 광선총 제품과 응용해서 좀 더 대중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실내 사격장을 고안하게 됩니다.

:: 광선총 GunMan과 Lion 세트. 표적에는 레이저에 반응하는 작은 센서가 있다 ::

때마침 일본에 붐을 일던 볼링 거품이 빠지면서 볼링장이 하나 둘 씩 문을 닫던 시기였습니다. 야마우치 회장은 볼링장 레인 끝을 센서와 전광판 스코어로 개조해서 광선총 사격장으로 활용하는 사업 수완을 발휘합니다. 그렇게 1973년에 닌텐도의 광선총 장난감을 이용한 실내 사격장이 개장하면서 세간에 주목을 받게 되었고 볼링처럼 여럿이 함께 즐기는 대전 게임 요소를 갖추던 이 사격장은 심야까지 즐길 수 있는 오락시설로 인기몰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영상투사기법을 활용해서 스크린으로 반응하는 아케이드 게임 와일드 건맨(Wild Gunman)을 출시했고 광선총으로는 최초의 수출 제품이 되었습니다.


:: 와일드 건맨(Wild Gunman)은 화면의 적이 총을 쏘기 직전에 재빠르게 쏴서 맞춰야 이긴다. ::

다시 찾아온 위기, 오일 쇼크 (Oil Shock)

울트라 핸드와 광선총의 성공으로 완구회사로 승승장구 해나가던 중 1973년에 전 세계적으로 오일 쇼크(Oil Shock)가 터지면서 닌텐도에게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쳐옵니다. 불황이 오면 가장 먼저 지갑문을 닫는 분야가 바로 오락(Entertainment) 산업군인 만큼 닌텐도에게 큰 타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광선총 사격장에 과감한 자본을 투입했던만큼 부채를 상환하기 힘겨워졌고, 곧바로 경영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다시 찾아온 이 총체적 난국을 닌텐도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닌텐도 이야기 -김영환 저- <한국경제신문>
http://blog.beforemario.com/


  1. 익명
    2012.08.08 18:59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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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당골패(Nintendo Playing Card Company)라는 사명에서도 미루어볼 수 있듯, 그당시 닌텐도는 카드 제조사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 정체성은 어떤 계기로 인해 흔들리고 만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카드 사업의 신성장 동력을 얻은 닌텐도

닌텐도의 3대 회장 야마우치 히로시는 취임 후 인사 문제를 해결하고 미국을 방문합니다. 당시 미국은 전후 일본에 대한 경제 회복 계획의 일환으로 일본 기업들을 미국으로 초청해서 여러가지 사업 프로그램들을 진행했습니다. 야마우치 회장도 당시 동종 업계인 세계 최대 카드 제조사 United States Playing Card Company(이하 US플레잉)를 찾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카드 회사가 남루한 2층 건물과 창고에서 카드를 제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는데요, 일본보다 더 큰 시장을 소유한 US플레잉 조차도 작은 규모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카드 제조사로서 닌텐도의 한계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을 겁니다. 야마우치는 닌텐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순 카드 제조에만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미국 방문 후 닌텐도는 카드 사업을 재정비 합니다. 카드 재질을 종이에서 세려된 플라스틱으로 코팅으로 마무리해서 대량생산 체재로 들어갔으며, 특히 1959년부터 '캐릭터 라이센싱' 이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해냅니다. 월트 디즈니(Walt Disney)와의 제휴로 다양한 캐릭터 카드 상품을 출시하게 되는데요, 이 사업은 대중매체 광고에 힘입어 큰 성공을 거둡니다.[각주:1] 특히 이 분야에서 라이센싱 방식의 컨버전스 비즈니스가 흔하지 않던 시절인만큼 야마우치의 뛰어난 사업 수완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 닌텐도가 디즈니 캐릭터 라이센싱으로 출시한 카드게임 '101 Dalmatians Marching Game' ::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닌텐도

1963년, 닌텐도는 오사카 증권거래소 2부에 상장 됩니다. 그리고 사명을 '닌텐도주식회사(任天堂株式会社)'로 변경하며 새출발 합니다. 새 사명은 카드 회사라는 기존의 이름을 넘어[각주:2] 새로운 분야의 사업을 확장-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닌텐도의 사업 확장은 결과적으로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시절을 맞이합니다. 새롭게 시도하는 사업마다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면서 창사 후 첫 위기를 겪게 됩니다.

닌텐도의 주식 상장 후 첫 사업은 '즉석 쌀밥' 이었습니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바로 밥이 되는 간편한 방식으로 당시엔 획기적인 사업 아이템이었지만 본질적인 '밥 맛'을 살리지 못해서 실패합니다. 두 번째는 당시 도쿄에서 성행하던 '러브호텔' 사업 이었습니다. 하지만 닌텐도가 있던 교토(京都) 지역의 전통과 보수적인 문화적 차이를 간파하지 못해 러브호텔 사업 역시 실패 합니다. 세 번째 사업 아이템은 '택시' 였습니다. 관광 산업이 발달한 교토에서 대중교통의 이용량이 많을거라 예상하고 시장성을 확신하게 되었죠. 택시 사업은 앞서 소개한 두 사업에 비해 잘 운영되었습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질 수록 경영하는데 힘에 부치기 시작합니다. 택시 기사들의 계속되는 임금 인상과 복지 혜택 요구, 그로 인한 노사간의 갈등, 추가적인 인력 관리 등에 부딪히면서 결과적으로 택시사업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닌텐도는 택시 사업의 실패를 통해 적은 인력으로 최대희 효율을 낼 수 있는 사업을 지향하게 됩니다.

:: 거듭되는 실패에도 카드 사업은 닌텐도를 뒷받쳐주고 있었다. 사진은 1965년에 출시한 그림책 트럼프. ::

본질을 되찾기 시작한 닌텐도

상장 후 3~4년간 닌텐도는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인해 경영 위기를 맞이합니다. 상장 당시 980엔이던 주가는 100엔 미만으로 곤두박질 쳤으며 야마우치 회장의 지도력에도 위기가 닥쳐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기존의 카드 사업은 계속해서 큰 수익을 내며 닌텐도를 뒷받쳐 주고 있었습니다. 늘 닌텐도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온 야마우치 회장은 화투와 카드 사업으로 제한하면 닌텐도는 더이상 성장할 수 없기에 다양한 사업에 도전한 것이지만 결국 닌텐도가 가장 잘 하는 분야는 역시 '카드' 였습니다.

화투와 트럼프 카드의 본질. 닌텐도가 해오던 사업은 결국 '엔터테인먼트'의 한 분야을 깨닫게 되면서 닌텐도의 정체성에 대한 힌트를 얻습니다. 닌텐도 제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인먼트(오락) 도구, 이것이 바로 닌텐도 사업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당시 설비 점검을 맡던 한 명의 엔지니어가 재미 삼아 만들어 놀던 '장난감'의 계기로 실마리를 찾게됩니다.

완구 회사 닌텐도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 완구회사 닌텐도의 시작, 울트라 핸드(Ultra Hand) ::

참고 자료

닌텐도 이야기 -김영환 저- <한국경제신문>
http://www.ebay.com/itm/280837453206
http://blog.beforemario.com/


  1. 디즈니 캐릭터 카드가 출시된 첫해애 약 60만개의 판매량을 달성한다. [본문으로]
  2. 기존의 사명인 '닌텐도골패'에서 골패(骨牌)는 카드(カルタ)의 의미가 담겨있다. [본문으로]
  1. 노크
    2012.05.21 11:59

    그 한명의 엔지니어가 바로 훗날 게임의 신이라고 불리게되는 미야모토 시게루 님이였죠 ㅎㅎ

  2. DBDB
    2012.05.30 11:30

    감질나는 부분에서 끝나버렸네요. 재밌게 읽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s://gamelog.kr BlogIcon 소원™
      2012.06.01 19:19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이야기 흐름상 감질나게 끝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
      조만간 다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겠습니다.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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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게임 기업 닌텐도가 120년간 업계를 선두할 수 있던 것은 '놀이 문화'에 대한 기업 이념과 비전을 관철해온 결과다. ::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우리나라 전 국민의 90% 이상이 한 번쯤 접해보고 즐긴다는 '고스톱'은 48장의 화투(花鬪)를 가지고 만든 게임입니다. 이 화투는 19세기 조선 말기에 일본 쓰시마섬의 상인들로부터 넘어와 우리 식으로 변형되었다고 전해지는데요,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 일본의 야마우치 후사지로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이 화투가 오늘날 게임 산업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닌텐도(Nintendo)의 시작입니다. 

화투의 탄생, 야마우치 후사지로

:: 화투를 만드는 야마우치 후사지로 ::

19세기말 일본 메이지 시대, 교토에 살던 야마우치 후사지로(山内房治郎)는 평소 그림을 잘 그리고 손재주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개화 후 일본에 서양 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오면서 트럼프 카드 게임을 처음 접한 그는, 조개 껍데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본 풍속과 결합해서 스스로 독창적인 카드를 만듭니다. 1년 12달을 상징하는 카드마다 4장씩 엮어서 총 48장으로 표현한 놀이용 카드를 그렸는데요, 각 달마다 스토리를 담아냈고 카드마다 등급과 점수를 다르게 매겨서 다양한 형태의 게임을 표현할 수 있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화투의 기원인, 하나후다(花札, hanafuda)입니다. 반은 재미 삼아 만든 이 화투로 사업의 가능성을 걸어본 야마우치는 본격적으로 상점을 열어서 자신이 만든 카드를 생산-판매하기 시작합니다. 메이지 22년(1889년) 9월 23일, 자신의 사업을 하늘에 맡긴다는 뜻으로 '닌텐도 곳파이<任天堂骨牌(임천당골패)>'로 지은 카드 상점이 이렇게 시작 됩니다.

닌텐도를 창업한 아마우지는 본격적으로 화투 생산에 들어갑니다. 카드 한 장에 종이를 여러 장 겹쳐서 손에 쥘 만큼 두껍게 압축하고 외곽선을 강조하기 위해 꽃잎으로 추출한 물감들을 사용해서 화려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들의 첫 수공업 제품인 화투 '대통령(大統領)' 은 당시 놀이 문화라는 개념이 모호했던 교토 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삼삼오오 모여서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이 화투의 가장 큰 장점 이었습니다. 야마우치는 닌텐도 배 화투대회를 열어서 교토 인근지역에서 주목을 받을만큼 비즈니스 수완을 발휘합니다.

:: 닌텐도의 화투 대통령(大統領)은 나폴레옹 이미지로 패키지 되어 있다. ::

화투가 시작부터 일본 전역에 인기몰이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업 초기엔 교토와 인근 지역에만 판매를 하는 정도로 작은 규모로 시작했지만 폭력조직 야쿠자들이 화투를 도박에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닌텐도의 사업은 그야말로 '대박'이 터집니다. 전국에 기하급수적으로 야쿠자들의 도박판이 만들어지면서 화투의 수요가 급증합니다. 화투는 무엇보다 소모품이었기 때문에 금방 종이가 찢어지거나 너덜너덜해져서 자주 교환해야 했습니다. 결국 닌텐도는 넘치는 주문량을 감당할 수 없어서 전문적으로 도제를 육성해서 대량생산 체재로 돌입합니다. 화투의 첫 성공에 이어 야마우치는 1902년,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의 트럼프 카드를 생산하게 됩니다. 기존의 트럼프들은 재질이 나빴지만 야마우치는 화투를 제작하던 노하우를 발휘해서 고품질의 트럼프를 함께 만들어서 판매합니다. 화투와 마찬가지로 트럼프 역시 도박판에서 많이 사용하던 상품이라 날개 돋친듯 팔려나가기 시작합니다.

화투와 트럼프 카드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닌텐도였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교토와 오사카 인근 지역에만 직영판매하다보니 전국적인 수요를 감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19세기 말은 현대와 다르게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쉽게 갖춰지지 않던 때였습니다. 이런 닌텐도의 고민거리는 일본담배소금공사(일본전매공사)와의 협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담배와 소금은 일본에서 국가가 운영하던 독점 산업이라 전국적인 유통과 판매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투나 트럼프는 담배 한 갑 크기를 지닌데다, 담배 외판의 주 거래 업소 중에 하나가 도박장이었던 점에서 닌텐도의 상품과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유통망까지 갖춘 닌텐도는 이렇게 승승장구 하며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 닌텐도의 화투와 카드 광고판 ::

수성의 닌텐도, 야마우치 세키료

1929년, 야마우치 후사지로의 데릴 사위인 야마우치 세키료(山內積良)가 닌텐도의 차기 대표로 취임합니다. 당시 후계자가 없던 후사지로는 자신의 딸을 통해 데릴 사위로 세키료를 맞아들이게 되었고, 2대 야마우치는 기업을 좀 더 큰 규모로 일궈냅니다. 1933년에 '합명회사 야마우치 닌텐도(合名会社山内任天堂)'로 새출발하며 철근 콘크리트로 사옥을 짓고 제품의 업그레이드를 단행합니다. 수공업적인 생산 시스템도 공장과 기계로 인한 대량생산 체제를 갖췄고 종래의 일본전매공사와의 협력으로 진행된 위탁 판매 체재만으로로는 판매에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닌텐도 스스로 유통망을 갖추기로 결심합니다. 1947년에 닌텐도는 자사만의 전문 유통회사인 '주식회사 마루후쿠(丸福)'를 별도로 설립해서 전국적으로 직영 판매를 확대합니다.

화투의 품질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다양한 종류의 제품이 나온 것도 2대 야마우치 때였습니다. 당시 종이를 여러 장 붙이던 수공업 형태로는 생산 속도와 비용 측면에서 모두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공장에 의한 대량 생산 체재를 갖추면서 종이 사이에 석회 가루를 넣어서 굳히고 앞뒤로 디자인을 더욱 세련되게 하는 등 제품의 질을 향상 시킵니다. 무엇보다 석회 가루를 넣는 제조 방법에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져왔는데요, 오늘날처럼 화투를 칠 떄마다 특유의 경쾌한 탁! 탁! 소리가 나게 되면서 게임을 즐기는 재미가 더해졌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치다 보면 안에 석회가 터져 나와서 빈번하게 재구입해야 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화투는 비싼 제품이 아니고 소모품으로 인식되어서 재구입에 대한 반감도 적었던 점이 닌텐도에게 큰 이익을 안겨줬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도박 산업이 더욱 커지면서 닌텐도의 화투와 트럼프의 인기는 도무지 식지 않았습니다.

:: 일본에서 최초로 트럼프를 생산한 곳도 닌텐도였다. ::

격변의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 야마우치 히로시 ::

닌텐도의 야마우치 가문에는 아들 복이 없던 걸까요? 1대 야마우치에게 아들이 없어 데릴 사위가 가업을 승계해야 했던 것처럼 2대 야마우치에게도 후사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장녀 야마우치 키미를 통해 데릴사위로 들여온 사카노조가 닌텐도의 상속자가 됩니다. 그리고 1927년, 사카노조의 아들 야마우치 히로시(山内溥)가 태어나면서 야마우치 가문에 아들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히로시가 5살 쯤 될 무렵 차기 대표로 내정된 사카노조가 돌연 가출해 버립니다. 그의 아내 키미는 이 일을 부끄럽게 여겨 사카노조와 이혼 절차를 밟게 되고 2대 야마우치의 어린 손자인 히로시가 닌텐도의 상속자가 됩니다. 아직 전문 경영인 개념이 없던 20세기초 세습 경영은 기업의 존폐문제였던 시절인 만큼 기업의 후사 문제는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2대 야마우치는 이런 내부적인 위기와 문제를 사전에 종식시키고자 어린 시절부터 히로시를 상속자로 지명하고 철저한 후계자 교육을 시킵니다. 1947년에 닌텐도가 주식회사 마루후쿠를 설립했을 때 어린 야마우치 히로시가 대표로 취임한 것도 후계자 승계의 일환이었습니다.히로시는 어린시절부터 외조부인 2대 야마우치로부터 기업 경영을 위한 교육 부터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늘상 외조부에게 고집스럽고 반항적인 모습으로 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느덧 성인이 된 히로시가 와세다 대학 법학과에 입학할 무렵 외조부 2대 야마우치가 갑작스런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히로시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닌텐도의 대표가 됩니다.

이제 겨우 약관의 히로시가 기업을 이끌어가기엔 반대파가 많았던 탓이었을까요? 1949년, 히로시는 외조부로부터 닌텐도의 경영권을 승계하는 조건으로 야마우치가의 친척들을 모두 퇴사시키고 반대파를 하나씩 제거해 나갑니다. 회사 경영에 있어 야마우치 일가 친인척들의 간섭과 반대가 심한대다 지난 60여년간 기업 내에 팽배해있던 연공서열제와 관료주의가 닌텐도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히로시는 취임 후 자신의 경영 방침에 걸림돌이 될 많은 중역들을 정리해고 시켰고 이런 구조조정 과정에서 100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어린 경영자를 따를 수 없다면서 파업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대대적인 물갈이 작업을 마친 야마우치 히로시는 1951년, 사명을 '임천당골패 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새로 매입한 부지에 지은 신사옥으로 이전해 새출발 합니다. 수십년간 화투와 트럼프만 만들던 닌텐도에게 약관의 젊은 대표로부터 새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 야마우치 히로시가 지휘하던 초기의 닌텐도는 다양한 사업을 시도하며 '정체성' 찾기에 나선다. ::

참고 자료

닌텐도 이야기 -김영환 저- <한국경제신문>
http://www.nintendo.co.jp/n09/hana-kabu_games/index.html
http://ja.wikipedia.org/wiki/%E5%B1%B1%E5%86%85%E6%BA%A5
http://www.nintendo.co.jp/corporate/history/index.html

 

  1. ss
    2012.05.09 00:14

    다음편은 언제쯤 나오나요??

  2. Favicon of http://blackli.tistory.com BlogIcon 흑광
    2012.09.27 11:55

    닌텐도의 역사 잘 봤습니다.

  3. Favicon of http://gamingpoint.org/2013/03/top-10-best-snes-games/ BlogIcon Top 10 SNES Games
    2013.03.23 19:31

    닌텐도 역사의 좋은 요약입니다. 나는 아직도 유럽 사람보다 일본어 게임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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